양선화(출판노동자)

[평화를 읽다] 서평 연재를 2025년 동안 이어갑니다. 양선화(출판노동자), 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류소연(책방 달리봄 대표), 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네 명의 필자가 다양한 장르, 각양각색의 주제를 다룬 책을 평화와 반군사주의,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읽어갑니다.

 

헌등사》는 일본어와 독일어, 이중 언어로 집필하는 작가 다와다 요코의 2014년작 중편소설이다. 일본어로 쓰고 싶은 이야기, 독일어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각각 따로 있는 걸까? 이것도 흥미로운 지점이지만, 《헌등사》는 애초에 그가 일본인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작품이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직후 3년간 이 소설을 썼다고 생각하면, 이 소설 특유의 혼란스러움과 속죄의식, ‘현재 진행형 멸망’이 어느 정도 이해된다.

 

어린이는 건강을 빼앗기고, 노인은 죽음을 빼앗기고

100세가 넘은 노인 요시로는 도쿄에서 증손자인 초등학생 무메이를 혼자서 키우고 있다. 무메이는 중증 장애가 있는 듯, 혼자 옷을 입거나 무엇을 씹어 소화하는 것마저도 도전 끝에 겨우 해낸다. 그런데 이 상태는 소설에서 한 번도 장애로 말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는 모든 어린이가 무메이와 비슷한 상태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어떤 일인가 일어났다. 거기에 손쉽게 ‘방사능 유출’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도 있고, 흐린 눈을 하고 짐짓 ‘기후 재앙’을 더할 수도 있지만 뭐가 됐건 이 지구는 성장을 멈췄다.

“8월에는 가루눈이 날리고, 2월에는 뜨거운 바람이 수시로 대량의 모래를 싣고” 오는 지구의 모습은 그렇게까지 낯설지 않다. 정도의 차이일 뿐, 소설 밖의 우리가 착실히 향해 가고 있는 근미래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보다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은 노인과 아이의 자리바꿈이다. 이 세계에서 어린이, 즉 ‘무메이(무명) 세대’는 아무도 건강하지 않고 사망률도 매우 높다. 반대로 노인은 지나치게 건강하다. 70~80세는 ‘젊은 노인’이라 불리며 요시로처럼 100세는 넘어야 진짜 노인이 된 셈이다. 이들은 무메이같이 자기보다 ‘늙은’ 어린이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사랑과 책임이 바탕이 된 행동이지만 어쩔 수 없이 형벌로도 보인다. 단순히 말해, 요시로 세대는 무메이 세대에게 건강을, 아니 사실은 삶 자체를 빼앗은 죄로 자신들 역시 중요한 것을 빼앗겼다. 바로 죽음이다. 요시로는 자신들이 과연 언젠가 죽기는 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몸이 죽더라도 정신이 그 안에 갇혀 고통받는 것은 아닌지 궁금해한다.

이 심각한 세대(서로)교체에 비하면 다른 배경 설정들은 농담 수준으로 가볍다. 추위와 더위가 섞여 버리는 바람에 “갑자기 따뜻해졌네요” 하는 순간 바로 한기가 돈다거나. 소설 속 자조처럼, 이제 사람들이 혁명을 말하지 않고 날씨 이야기‘나’ 한다는 비난은 가당치 않다. 날씨 이야기에 비하면 혁명 이야기는 얼마나 가소로운가?

이 농담 같은 시대 설정은 소설 내내 치고 빠진다. 정부와 경찰은 이미 민영화되었는데, 경찰의 주요 활동은 관악 합주이다. 영어를 배우는 일이나 외국으로 나가는 일은 금지되었는데, 누가 그런 법을 만들었는지, 법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알 수는 없다.

도쿄는 이제 위험 지역이라 다들 마지못해 가설 주택을 지어 살고 있고, 전자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100만 대의 죽은 세탁기는 태평양 밑으로 가라앉아 물고기들의 캡슐 호텔이 되었다”. 반면, 오키나와는 도쿄에서 절대 나지 않는 오렌지 같은 과일과 채소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윤택”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야생동물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메이는 그저 요시로의 죽은 언어에서만 그것들을 발견하고 경이로워한다. “왜가리든 바다거북이든 무메이는 생물의 이름을 보거나 들으면 그 이름 속에서 생물이 튀어나오리라고 여기는지 눈을 떼지 않았다”.

일본은 “대륙에서 내쳐”진 신세인 데 반해, “남아프리카와 인도는 지하자원을 폭력적인 속도로 채굴해 공산품으로 바꿔 팔던 국제 사업에서 일찍이 손을 떼고, 언어를 수출해 윤택한 경제를 누리고 있다”. 일본도 따라가려고 하고 있으나, 마땅히 수출할 언어도 없어서 문제다.

 

내 몸이 곧 지구인 신인류의 탄생

지겨운 멸망 서사를, 심지어 일본 것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의문일 수 있다. 하지만 재미는 이제부터다. 소설에서 ‘무메이 세대’는 모종의 진화를 거친 신인류로 그려진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몸 자체가 곧 지구라고 느끼며, 인간으로서의 자의식이 없다는 점이다. “마치 바다가 태풍을 맞이하듯이 아무런 저항 없이 기침 발작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무메이는 스스로 건강을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그런 것을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요시로가 보기에 “무메이는 스스로 불쌍하다고 여기는 기분을 모른다”.

반대로 무메이가 볼 때 증조할아버지 요시로야말로 너무 불쌍한 사람이다. 백 살이 넘어서도 여전히 건강한 채로 조깅을 하고, 증손자를 위해 신선한 먹을거리를 구하러 다니고, 온갖 집안일을 하면서 잠시도 쉬지 않으니까 말이다. “왜 쉬지 않고 일하느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눈물이 멈추지 않기 때문”인 것까지 무메이는 알고 있다.

저 불쌍한 구인류와 달리 이 신인류는 자신의 가슴 안에 지구가 있다고 믿는다. 세계 지도를 보고 자기 내장을 촬영한 엑스레이 사진이라고 느끼기까지 한다.

이 책의 제목 ‘헌등사’(절에서 신령이나 부처에게 등을 바치는 사람)는 무메이가 결국 15세의 나이까지 살아남아 머나먼 국제의학연구소로 떠나는 것, 자신의 존재로 세상을 밝히려 하는 것에 대한 비유이다. 이 신성한 헌등사의 역할을 무메이 세대가 맡은 것 역시, 그들이 지구 그 자체로서 살아가는 신인류이기 때문이다.

이들 덕에 요시로와 같은 노인마저도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각오를 다진다. 지난날 자식과 손자에게 재산이든 지혜든 물려주려고 했던 오만한 세월을 반성하고,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일, 즉 증손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에 집중한다. “100년이 넘는 동안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의심할 용기를” 갖고 “사실 자신은 ‘노인’이 아니라, 백 살이라는 경계선을 넘은 시점부터 마침내 걷기 시작한 신인류라고 생각하며” 분발한다.

 

“‘미안합니다.’는 사과할 때 쓰는 말이야, 옛날에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데 이 말을 쓰기도 했지만. 너희는 나쁜 짓을 하지 않았으니 사과하면 안 된다.”

“하지만 폐 끼치고 있잖아요.”

“‘폐’는 이제 죽은 말이야. 잘 기억하렴. 옛날에 문명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는 쓸모 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을 구분했지. 너희는 그런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는 안 된다.”

 

소설 속 교사가 어린이들에게 강조하는 이 새로운 ‘문명 시대’에서 구시대의 망령들, 이를테면 혈연주의나 성별 이분법은 더 이상 값어치가 없다. 부모 없는 아이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더 이상 ‘고아’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으며, ‘독립 아동’이라는 말이 새로 생겼다. 게다가 아이들은 “자연의 책략”에 의해 모두 어느 순간 성별이 바뀐다.

 

“배 속의 아이가 여자임을 알면 중절하는 문화권에서는 균형을 잃은 자연이 사납게 노하여 여러 가지 속임수를 쓰기 시작했다. 태어났을 때의 성별이 계속 유지되지 않고, 누구나 인생에서 반드시 한 번 혹은 두 번은 성별을 전환하는 책략이 나타난 것이다.”

 

전혀 이렇지 않았던 세상에서 살다가 신인류를 만나게 된 요시로도 실은 진화를 거듭하는 중이다. 요시로의 자식이 자식을 포기하고, 요시로의 자식의 자식도 자식을 포기하는 바람에 결국은 요시로가 무메이를 거두게 된 걸 보면 알 수 있듯, 요시로와 무메이의 관계는 단지 혈연으로 인한 유대가 아니다. 요시로는 무메이가 신생아일 때 미니어처 같은 무메이의 손을 잡고 “둘이 함께 힘내 보자, 동료여”라고 중얼거린다. 그리고 무메이가 자신과 피가 섞인 친증손자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도 그냥 웃어버린다.

 

“누구도 유전자의 냄새를 맡을 수 없다. 하지만 무메이가 늘 발산하는, 유아의 달콤한 냄새를 요시로는 분명히 맡을 수 있다. 그것이 가장 분명한 메시지다. 만약 무메이의 어머니도 아버지도 이 냄새에 취할 수 없다면, 대자연이 직접 요시로를 무메이의 양육자로 선택했다고 믿어도 좋지 않겠는가.”

 

지구 그 자체인 대자연의 아이를, 대자연에게서 직접 넘겨받아 기르게 된 요시로. 그리고 성장할 수 없는 세계에서 기어코 성장해 ‘헌등사’가 되는 무메이의 이야기. 천편일률적인 멸망 서사가 지겹다면 한 번쯤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