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군대를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은 ‘군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비롯되었다.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 ‘군인’이라는 말은 항상 목에 걸린 생선 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죽도록 아프지도 생명을 위협하지도 않지만 계속 이물감을 느끼게 하는 무언가. 빼내지 않으면 소화될 수 없는 무언가. 내가 원해서 입은 군복이 아니었지만, 원하지 않았다는 말로 전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늘 낯설었다. 그래서 나에겐 탈영병이나 병역거부자들이 ‘왜 도망쳤는가’ 만큼이나, 전쟁에 나가서 다치거나 죽은 이들이 ‘왜 도망치지 않았는가’도 의문이었다. 다들 나 같은 마음일 거라고, 적어도 인간이라면 전쟁은 누구에게나 낯설고 두려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군인: 영웅과 희생자, 괴물들의 세계사』는 제목만 보고 별 계획 없이 펼친 것이었다. 목차가 꽤 재밌는데, 장과 절의 제목이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되어 있다. 볼프 슈나이더는 고대부터 현대를 아우르는 전쟁사와 전투사, 여러 인물의 어록과 문학 작품 안에서 드러나는 군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원시 부족의 전사부터 용병, 게릴라, 그리고 징집병에 이르기까지 그는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어떤 무기로 싸웠는가’, ‘무엇을 위해 죽었는가’, ‘무엇으로 강요받고 속았는가’, ‘어떻게 죽었는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더 넓게는 전쟁과 평화라는 인류사의 오래된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
전쟁에 담기는 마음들
슈나이더의 책에서 눈에 두드러지는 부분은 마음속 깊이 전쟁에 찬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전쟁과 폭력은 누군가에겐 일상을 파괴당하는 경험이지만, 누군가에겐 답답하고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날 기회이기도 했다.
골로 만은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정리했다. 〈1914년 8월 초의 유럽은 한 마디로 환호의 도가니였다. 곳곳이 전쟁의 도가니였다. 곳곳이 전쟁의 기쁨과 광분, 환성으로 떠나갈 듯했다. ……런던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흥겹게 몰려다니며 전쟁을 외쳤다. ……전쟁은 짧고 멋질 뿐 아니라 해방의 성격을 띤 흥분된 모험이 될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또한 신이 모두와 함께할 것이고, 승리할 거라고 자신했다.〉(225)
모험을 향한 흥분. 당시 사람들은 1차 세계대전이 그렇게 비극적인 전쟁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남성으로서, 애국자로서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망과 새로운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설렘 속에서 사람들은 전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전쟁의 참상을 알았다고 해서 곧바로 전쟁을 멈추자는 결심으로 이어지진 않았을 것이다.
전쟁은 때때로 자기 고통을 세상에 투사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책에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2007년 아카기 토모히로라는 사람은 아사히신문에 「’마루야마 마사오’를 후려치고 싶다… 31세 프리터. 희망은, 전쟁」1)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전후 일본은 오랜 평화 끝에 이어진 경제 불황에 맞닥뜨렸고, 그 속에서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프리터(‘알바노동자’)인 자신의 고통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전후 민주주의의 대표적 지식인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뺨을 때릴 수 있는, 모든 국민들이 다 같이 전쟁을 겪는 ‘괴로운 평등’을 원했다. 진심으로 전쟁을 바라는 것은 아니고 절박함을 드러내기 위한 수사였지만, 이 지극한 냉소는 ‘평화’가 누구에게나 같진 않음을 보여주기도 했다. 슈나이더의 책에도 비슷한 ‘호소’가 등장한다.
2차 대전을 다룬 최고의 소설 가운데 하나인 게르트 가이저Gerd Gaiser의 『죽어 가는 사냥감』에서 전투기 조종사 벨가스트 대위는 이렇게 소리친다. 「평화? 평화가 뭔데? 순위와 승진, 저지된 야망, 거짓말, 백화점, 중개업, 건강한 섭생 같은 것이 판치는 게 평화 아냐? 자기가 더 잘살려고 남을 끌어내리고…… 증오와 신경과민으로 헐떡거리고…… 그런 일상의 지하실에는 사람들에 의해 감금되었지만 언제든 올라오려고 안달하는 야수들이 있어.」(287)
전쟁은 모두에게 잔혹한 일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삶의 공허함과 괴로움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지루한 일상을 뒤엎는 모험, 혹은 나만 고통받을 수 없다는 울분 속에서 말이다. 그것은 전쟁에서 이익을 보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환상과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가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 지루하고 힘든 일상에 매몰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다만 이 마음들이 증오와 폭력에 담길 때,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졌다.
영웅, 희생자, 괴물, 그리고 겁쟁이
어떤 전쟁 영화는 군인과 국가의 영광을 이야기하지만, 어떤 영화는 미화 없이 전쟁의 참상을 직시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런 영화를 보면서 평화와 반전을 꿈꾸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전쟁의 잔인함을 곱씹으며 인간이 지금껏 반복해 왔고 앞으로도 반복할 비극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볼프 슈나이더는 후자에 가까웠다.
그는 독일에서 보수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고 책 전반에서도 (적어도 평화주의에 대해선)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그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거나 기꺼이 신을 위해 순교하는 영웅들, 전쟁에 억지로 끌려간 노예나 포로와 같은 희생자들, 그리고 살육을 즐기는 괴물의 모습으로 군인을 조명한다. 슈나이더는 군인이라는 존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어 했기 때문에, 빛나는 영웅이나 억울한 피해자만으로 묘사하진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슈나이더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1943년에 18세의 나이로 독일국방군에 징집되어 서부 전선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포로로 잡혀 미국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했다. 슈나이더는 포로수용소에 있으면서 ‘군인’이라는 존재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숙고했다고 썼다. 그가 전쟁에서, 포로수용소에서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모른다. 스스로 그렇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의 회고 속에는 두려움과 복종 사이에 선 ‘겁쟁이’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이 책에서 슈나이더가 유일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구절은 이것이다.
실제로 필자를 포함해 많은 독일 군인들은 야전 헌병들에게 잡혀 근처 나무에 매달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싸웠다. 1945년 2월부터는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어쨌든 호라티우스의 생각처럼 실제로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달콤하고 명예롭기 때문에 싸운 군인은 극히 드물었다. (368)
때로는 죽음보다 더 큰 공포(동료와 가족의 눈, 명예, 탈영자라는 낙인)가 사람들을 전쟁으로 내몰았다. ‘겁쟁이’라는 딱지는 불명예였다. 그가 ‘용기’에 대해 논하기 위해 굳이 한 장을 할애한 데에는, ’용기’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의미를 추구하는 마음들은 때때로 전쟁으로 이어지지만, 전쟁에서 의미를 찾기도 전에 연루되어 버린 징집병들에게 ‘용기’는 너무 먼 얘기였다.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냉소
슈나이더는 대부분의 군인은 겁쟁이였다는 것을, 그리고 전쟁은 우리 정신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전쟁이 인간성을 얼마나 쉽게 파괴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가 전쟁에 찬성하는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앞으로의 전쟁에는 군인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 전쟁이 더 첨단화되고 무인 전투기, 핵미사일, 자살 폭탄 테러와 유격대, 그리고 컴퓨터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이버 전쟁은 ‘군인’이 따로 없어도 가능하거나 군대만으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뜻 보면 변화한 현실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쟁에 군인이 필요하지 않기를 바라는 슈나이더의 희망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쟁은 여전히 군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가자 전쟁,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쟁 속에서 ‘군인’은 계속 생산되고 있다. 오히려 세계는 어떻게 더 많은 군인을 만들어낼지 골몰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사실 자체가 슈나이더를 깊은 고뇌에 빠트린다. 이 세상에서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다. 자원이 제한되어 있고 인간이 그걸 차지하려고 각축하는 이상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설령 이 세상에 군인이 없어진다고 해도, 전쟁 자체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새뮤얼 헌팅턴 같은 정치학자들은 클라우제비츠(19세기 프로이센의 군사학자)를 빌어, 전쟁이 철저하게 정치의 수단으로써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폭력을 관리할 장교단의 전문성과 이성이 있다면 전쟁이 효과적으로 통제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그런 전문 직업군도 평화에 기여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평화주의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역사책을 열심히 뒤져도 평화 운동에 의해 종식되거나 저지된 전쟁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483)
이것은 ‘현실적’ 인식인가? 적어도 그는 군(軍)/사람(人)을 분리하고 싶어 하지만 분리할 수 없다는 딜레마에 깊게 천착했고,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지독한 냉소와 자포자기일 뿐이었다. 차라리 테러로 죽는 사람보다 매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많다는 ‘통계적 진실’에 위안을 얻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말이다.
이 냉소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것은 나에게도 중대한 질문이었다. 이 세상에 전쟁이 없기를 바라지만, 그리고 군대도 군인도 없기를 바라지만 ‘현실적으로 군대의 폐지도 항구적인 평화도 기대할 수 없다’는 어떤 현실론이 고개를 들 때면 혼란스러워졌다. 전쟁과 폭력은 필요악이라는 생각에서 멈추면 우리는 그저 ‘세상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냉소만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거기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전쟁에 대한 현실적 인식은 전쟁과 군인됨을 본성으로 남겨두지 않고 그 너머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서 더 잘 발견되는 것 같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폭력과 평화에 대한 물음을 조금 멀리 가져가다 보면 주디스 버틀러와 같은 학자들이 떠오른다. 버틀러는 『비폭력의 힘』에서 인간의 폭력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폭력성을 전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하지만, 버틀러는 그것을 우리 공동의 삶과 ‘감당할 수 없는 의존’에서 타자를 발견하고 지켜내기 위한 연대로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전쟁과 폭력에 담기는 마음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 있다면, 그 마음들을 부정하기보다 다른 그릇에 담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마음을 어떤 그릇에 담아야 할까. 극우적 언설과 폭력, 내전의 깃발이 넘실거리는 한국 사회에서, 전쟁과 절멸을 반복해 왔던 역사를 마주하며 그저 슈나이더의 ‘냉소’에서 멈춰설 수는 없는 것이다.

<군인-영웅과 희생자, 괴물들의 세계사> 표지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