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원(참여연대 시민참여팀 활동가)

 

 

식물을 기르고 있다

사무실 인근으로 찾아온 친구가 나에게 식물을 선물했다. 키우기 쉽다는 스킨답서스도 말려버린 나인데. 그런 나에게 식물을 선물한,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용감한 친구는 나에게 “식물을 책상에 두고 일해봐,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분무기로 물도 주고, 잎을 만지면 한결 나아질 거야.”라고 말해줬다. 뾰족한 연두색 잎들이 길게 늘어진 솜사탕 고사리는 예뻤고, 친구의 마음이 고마웠지만 한편으로 부담도 됐다. 풍성하고 보들보들한 잎을 가진 이 존재를 내가 어떻게 돌볼 수 있나. 아침에 눈을 떠 몸을 일으키고 밤에 잠 한숨 자는 것도 버겁던 당시였기에 식물은 곧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것 같았다.

두려움은 나만의 몫이 아니었던걸까. 식물과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이 매일매일 식물을 들여다봐 줬다. 분무기는 레버를 세게 누르면 뿌- 뿌- 하는 괴이한 소리를 냈는데 리듬에 맞춰 촉촉해진 잎들을 손으로 쓸어 올리면 마음이 든든해졌다.(다시 모니터 앞에 앉아 과업을 헤쳐나갈 힘이 생겼달까.) 식물은 며칠만 돌봐주지 않아도 잎이 금세 누렇게 변해버렸다. 바스러질 것 같이 마른 누런 잎들을 잘라내고 흙에 물을 흠뻑 주었다. 분무기로 잎들을 적시고 화분 밑에 물을 채워두는 게 일과가 될 무렵에는 이 돌봄이 취미인지, 나를 살리려는 행위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식물은 처음 모습보다 풍성함이 줄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나도 예전만큼의 활력과 의지는 없지만 살아있다. 침대에서 벗어나 외출을 시작했고 더 이상 아무 때나 엉엉 울지 않았으며 다시 여행이 가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내 스스로를 해치지 않게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틈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마음은 더 괜찮아졌다. 나를 아낌없이 챙겨주고 걱정해 준 이들 덕분에.

새 부서에 둥지를 튼 지 한 달째, 평화 운동을 부업 삼은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직 서툴지만 나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작은 숨골이 생긴 것 같다. 이제는 법 개정을 논의하고, 행정기관에 서명을 전달하는 등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는 노력보다 어떻게 하면 시민들에게 우리의 메시지를 낯설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시민들이 평화를 말하고 요구한다면

구글에 “시민들이 전쟁을 믿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고 검색하자 AI가 아래와 같이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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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전쟁을 일으킬 때 시민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군인들이 총을 들지 않고 명령에 저항한다면 정말 전쟁은 일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12.3비상계엄의 실패 원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이 가운데 명령을 받은 군인들의 소극적 저항이 부각됐지만, 국회에 모인 시민들이(두려움 속에서도) 계엄령을 적극적으로 믿지 않은 채 대항했던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평화학자 마이켄 율 쇠렌센은『전쟁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세상이 실제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세상은 변할 수 있다”고 썼다. 물론 상상만 한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상상을 구현할 방법, 계획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우리가 행동해야 변한다. 그렇지만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다면 변화는 시작조차 할 수 없다. 달라질 수 있다는 상상, 그것은 변화의 출발점이다. 

시민들이 트랙터를 탈취하는 경찰에 맞서고, 우리의 힘으로 선출 권력인 대통령을 파면시킬 수 있다 믿으며 광장에 나온 것처럼 다양한 시민들이 평화를 요구한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 만일 트랙터가 아닌 탱크 한 대가 도로에 멈춰 섰다면. 시민들이 전장에서 사람과 마을을 파괴하던 탱크가 도심에 진입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면. 미사일, 전투기와 같은 무기가 즐비한 시가행진에 반대하며 “전쟁 준비를 중단하라” 요구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폭력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평화적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기 위해 행동한다면. 이 세상에 작동하는 권력의 축은 분명 움직일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팔레스타인 집단학살이 계속되고, 전 세계가 앞다퉈 군비 경쟁에 몰두하며 군사적 긴장은 고조되고 있다. 국내 상황은 어떠한가. 최근 한 유력 대통령 후보는 국산 무기가 분쟁과 전쟁이 벌어지는 국가에 수출되는 사실을 배제한 채 무기 산업을 적극 지원하고 육성하겠다고 약속했다. 혹자들은 무기 산업을 통한 경제 성장에 동의하며 무기 수출 중단과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평화 단체들의 입장을 허무맹랑하다고 폄하할 것이다. 나아가 활동가를 향해 “당신과 당신 가족이 공격당해도 평화를 말할 거냐는” 비난 섞인 질문을 던지기도 할 테다.

비관적인 말을 늘어놓는 당신에게. 평화는 평화가 가능하다는 마음이 모여 실현될 수 있다. 세상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실천하고 요구하는 만큼 나아지는 법이니까. 시민들이 정부에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요구할 때 강한 군사력을 갖춘 국가가 시민을 보호해 줄 거라는 환상은 가뿐히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전쟁을 멈추는 일이다. 그만큼 중요한 건 국가 간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고, 대화와 협상 같은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전략을 채택하는 것이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양가적 마음이 드는 이 시기. 시민들이 평화에 대해서 더 많이 상상할 수 있도록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잇는 일이 내 부업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