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소연(연극창작자)

 

스스로 행성의 ‘잔류 인구’가 된 여성 노인

오필리아. 평생 동안 남편과 자식들을 돌봐오고, 가족과 공동체와 ‘컴퍼니’를 위해 일해 온 그는 ‘전문 교육’을 받지 못한, 이제는 ‘생산성’에서조차 멀어진 여성 노인이다. 그가 사는 곳은 한 행성의 ‘콜로니’. 콜로니는 거대자본들 중 하나인 컴퍼니가 지구를 소개(疏開)하며 사람들을 이주시켜 타 행성에 만든 정착지다. 이주된 사람들은 스스로 마을을 꾸리고, 거주공동체를 만들었다. 콜로니 #3245.12는 오래 전 죽은 남편과 함께 이주한 오필리아가 평생 살아온 곳이다. 컴퍼니는 어느 날 주민들에게, 30일 후 다른 행성으로 콜로니를 이주하게 되었음을 통보한다. 이 과정에서 오필리아가 여성으로서 평생 해온 노동의 가치는 컴퍼니에게 인정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늙었다는 이유로 이주에 추가 비용이 부과된다. 그리고 그 날, 오필리아는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아들과 며느리, 주민들과 컴퍼니 직원들을 피해, 이주 셔틀을 타지 않고 남은 오필리아는 그렇게 ‘잔류 인구’가 된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혼자가 된 오필리아는 가부장적 사회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자유를 누린다. 마음껏 정원을 돌보고, 무언가를 만들고 표현하고, 옷을 마음대로 입거나 입지 않고, 자신의 방식으로 공식 로그에 ‘콜로니’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그런 그의 앞에, 한번도 정착 인류와 마주친 적이 없는 생명체들, <종족>이 나타난다. 오필리아는 처음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그 이후에는 그들의 왕성한 호기심에 성가셔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고 그들의 아기들의 둥지수호자가 된다. 둥지수호자, 아기가 배울 수 있도록 돕고 지켜주는 자는 <종족>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자로, 다른 종족, 그러니까 인간과의 협상에 있어서도 모든 권한을 갖는다.

그 이후, ‘실패하고 버려진 콜로니’에서 유기체의 신호를 발견하고 행성에 착륙한 인간들은, 이 낯선 <종족>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접근하여 연구하고 분석하고자 한다. 나아가 그들에게 지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자신들의 법과 질서를 통해 지배하려 한다. 다른 집단에게 지적, 정치적 능력과 힘이 없다면 지배하려 들고, 그런 힘이 있다면 적으로 만들어온 인류의 역사를 상기하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른 인간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비인간 종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작품 속 세계에서 <종족>과의 만남은 비인간 존재들과의 역사상 첫 번째 평화로운 관계맺음이었을 것이다. 오필리아는 폭력이 수반되는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아닌 새로운 관계맺기의 가능성을 연 중재자가 되었다. 백발에 맨발을 고수하는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명망높은”(411) 외교관직을 맡게 되고, <종족>과 인간들 사이에서 여생을 마친다.

 

돌보는 자, 지키는 자, 협상하는 자

엘리자베스 문의 소설 『잔류 인구』의 주인공, 오필리아는 낯선 <종족>이 자신에게서 인간의 언어와 물건의 사용법을 배우는 것을 보며, 아이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과정을 떠올린다. 그는 <종족>이 인간의 것,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도록 돕는다. 그것이 인류에게 위험한 일이 아닐지, 혹은 <종족>에게 위험한 일이 아닐지 두려워하지만, 결국 오필리아는 “무엇을 무엇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지에 관한 고민은 그만하”기로 한다. 그들이 “안전하게 기술을 이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그들이 기술을 이용하지 못하게 막을 방법”은 없다(344)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오필리아를 대리자로 한 협상 테이블에서, <종족>의 협상조건은, 인간들이 자신들과 자신의 아이들이 지식에 접근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이었다. 정보의 통제는 권력의 편중과 함께 있다.

“좋은 둥지수호자는, 파란 망토는 설명했다. 새끼들이 모든 것에 관해 최대한 많이 배우기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기를, —열광하기를— 바란다. 나쁜 둥지수호자는 새끼들이 계속 같은 것에 만족하게 만들어 그들이 안온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 그들은 나쁜 둥지수호자다. 너와 다르다. 또한 그들은 너를 제대로 존중하지 않는다. 파란 망토는 전자와 후자가 똑같이 나쁘다는 느낌이 들게 말했다.” – 368

오필리아는 자식들이 자신에게 이것저것 질문했을 때 화가 났던 순간들과, <종족>의 호기심 때문에 화가 났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는 “그런 식으로 자기 자신도 윽박지르며 살아왔”(368)음을 알게 된다.

“이 동네 출신 여자애는 우쭐해져서는 안 된다, 오필리아의 아버지는 말했었다. 자긍심의 끝에는 지옥살이가 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다. 길게 자란 줄기는 칼을 부른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 347

많은 여성들이 그러하듯, 오필리아는 언제나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침묵할 것, 나서지 말 것을 요구받았다. 처음에는 타인의 목소리로, 나중에는 스스로의 목소리로 자신을 검열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둥지수호자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한다. 누군가를 돌보는 일은 그에게 평생 동안 부여된 임무였으나, 그 일의 가치는 늘 폄하되었다. 혼자가 된 오필리아는 타인을 돌보는 노동에서 마침내 벗어났으나, 그의 앞에 <종족>과 그 아기들이 나타났다. 그들과의 관계 안에서 오필리아는 또다시 돌보는 자의 위치가 된다. 급기야 <종족>은 그를 둥지수호자로 추대하는데, 여기서 둥지수호자의 역할인 ‘돌보는 일’은 ‘지키는 일’과 다름없다. <종족>에게 둥지수호자는 그에 합당한 정치적 권리는 물론이고 공동체를 대표한 대외 협상의 권리를 갖는 자이다. 다른 집단과 어떻게 마주하고 협상할 것인가에 있어, 어린이와 같은 보호받아야 할 취약한 존재들의 안전과 권리를 우선시한다면, 적대하는 관계가 아닌 평화에 기반한 관계가 필요할 것이다. 누군가를 돌보는 자의 윤리를 지키는 자의 윤리라 한다면, 그것은 평화 협상의 원칙과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존재’와 접촉하고 관계맺는, 실재하는 몸

오필리아에게 <종족>이 “흉악한 외계인”(117)에서 “개별적인 존재”(215)가 된 것은, 당연하지만, 몸의 마주침을 통해서였다. 서로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을 넘어서는 일, 낯선 존재와의 만남은 접촉을 통해 이루어진다. 상대의 ‘말’을 보고 듣는 일, 표정을 읽는 일… 그러니까 언어와 비언어로 소통하는 일, 더 나아가 서로의 피부를 만지는 일 들이 그러하다. <종족>에게 냉장고의 기능에 대해 알려주며 오필리아가 손가락으로 건넨 냉동실의 성에를 <종족>의 일원이 혀로 맛보는 장면의 묘사는, 몸들의 접촉, 그 실재성에 대해 보여준다.

“갑자기 손가락에 그것의 혀가 닿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 메마르고 거칠한 느낌에 움찔하며 숨을 헉 뱉고 얼른 손을 거뒀다. 그것은 눈을 끔벅였고, 역시 숨을 살짝 뱉으며 물러났다. 그의 손에 그 따뜻한 숨이 닿았다.” – 193

노동하는 몸, 가꾸고 수확하는 몸, 돌보는 몸, 만들고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몸을 가진 사람, 그 몸으로 세상을 만나는 사람. 오필리아가 그러한 것처럼, 우리는 제각기 단 하나뿐인 몸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이고,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존재들 역시 그러하다. 낯선 존재와 부딪히는 자기 몸의 감각을, 두렵지만 신뢰하며 나아가는 일, 거기서 오는 위험을 감수하는 일은, 타자와의 마주침에서 더 나아간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반드시 수반되는 일이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 대해 적대하고 공격하게 되는 것은, 그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를 정말로 알게 되는 것은 작품 속 언어학자 ‘빌롱’의 방식처럼 프로그래밍 시뮬레이션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필리아의 방식처럼 몸의 마주침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렇게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종족>과 관계맺으며 그들을 알게 된 오필리아는, <종족>을 대하는 인간들의 방식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마치 <종족>이 자신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들 앞에서 거침없이 말을 주고받는 인간들의 무례함은, 오필리아가 자신이 속한 종이자 집단인 인간을 상대화하도록 만든다. 오필리아는 인간들이 “그러는 편이 신중하다고 판단하면 반드시 그(<종족>의) 아기들을 죽일 것임을 알았고, 그걸 아는 스스로가 싫었다.” <종족>과의 만남 이후의 오필리아, 그리고 다시 인류를 마주하게 된 오필리아는, 자신의 존재를 상대화하며 ‘인간 종’으로 인식하게 되고, 종을 넘어선 관계에 대해 인지하는 존재가 된다.

 

함께 살기의 통증을 받아들인 ‘잔류 인구’

정상성을 강요하며 자신에게 이러쿵저러쿵하는 세상과 사람들에 지쳐 너무나 간절하게 혼자가 되고자 했던, 홀로 있음의 고요함을 사랑한 여성 노인 오필리아는 결국 혼자가 되는 데 실패했다. 그렇지만 “시도 때도 없이 선을 넘는 인간들”과의 관계에서와 다르게, 혼자이면서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교제”(253)를, 혼자에서 다시 <종족>과 함께가 되면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는 외계의 존재들이 (종으로서의 ‘인간’과 다른 의미에서의) ‘사람’임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그가 너무 늙고 너무 멍청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 하지만 이들은 외계인이잖아. 오래된 목소리가 주장했다. 아니. 이들은 사람이야. 아기와 아이와 아기를 돌보는 할머니가 있는 사람들이야. 게다가 난 이 초롱초롱한 눈 속에 담긴 열의를, 갈고리손톱이 난 이 작은 손안의 열망을 저버릴 수 없어.” – 372

누구도 자신을 “중요한 이유로 높이 평가할 리가 없”다는(355), 자신에게 깊이 박힌 믿음에도 불구하고, 오필리아는 그가 <종족>과 관계맺은 바로 그 방식으로 인하여 <종족>에게서 깊이 존중받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억압과 자유에 대한 경험, 돌보는 자의 감각과 윤리, 노동하고 마주치며 관계맺는 몸의 감각을 통해 “통증은 아무도 죽이지 못”하며 사람들을 죽이는 것은 “전쟁”(390)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스스로 혼자가 되기를 결정하고 선택한 여성 노인은, 함께 살기의 통증을 받아들이고 기어이 세상의 평화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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