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선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 실천을 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

 

2025년 5월 30일, MADEX 저항행동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고향이 울산이라 가까운 부산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어릴 적부터 아빠가 해병대에서 우수 장병으로 선발돼 탱크를 타고 행진하던 사진을 보며 자란 나에게는 아직도 어딘가 남아 있는 ‘군사주의적 정서’를 스스로 살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장래희망을 늘 ‘군인’이나 ‘체육교사’라고 적곤 했는데, 그때의 마음을 돌이켜 보면, 남자들이 해내는 것이라 여겨졌던 것들을 나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던 열망이 컸던 것 같다. 강함, 리더십 같은 단어들은 늘 멋져 보였고, 그것이 남성성과 결합된 이미지로 주어졌던 사회에서 나는 그 기준에 나 자신을 맞추며 살아오기도 했다. 그런 내 과거의 마음이 오롯이 떠오른 공간이 바로 MADEX 전시장 안이었다.

 

전쟁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것은 대형 전광판이었다. 그것은 무기체계와 방산기술을 뽐내고 있었고, 그 아래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군 관계자들과 기업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전시된 전투함의 사거리, 해외 수출 가능성, 공동개발의 이점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고, 각 부스마다 ‘미래의 전장’, ‘차세대 국방기술’, ‘글로벌 시장 확대’ 같은 문구가 붙어 있었다. 이곳은 명백히 무기를 기술적 성과이자 국가 경쟁력으로 소비하도록 기획된 공간이었다. 무기는 더 이상 죽임의 도구가 아니라, 경제 성장의 기회이자 수출 산업의 자랑으로 전시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전쟁은 현실이 아니라 ‘상품 설명서’에 가까운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화려한 기술과 자본의 무대 한편,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던 공간은 다름 아닌 군 패치 부스였다. 군복이나 가방에 붙일 수 있는 문양, 부대 마크, 병사 개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다양한 패치들이 전시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고르며 사진을 찍고, 자신의 군복무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무기 자체보다 사람과 기억, 이야기, 감정에 대한 관심이 더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졌다. ‘죽이는 기술’이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의 흔적에 더 많은 이들이 마음을 두고 있었다. 전쟁은 여전히 ‘명예’와 ‘희생’이라는 말로 포장되고 있었지만, 그 포장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과 감정을 돌아보는 시간은 없이, 한껏 미화된 전시물 사이에서 전쟁이 ‘존경’이나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덧칠되고 있었다.

 

 “전쟁은 싫지만 어떨 수 없다”는 체념을 넘어서

이에 대한 답을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었다. MADEX 전시장을 살펴본 이후 전시장 바로 앞인 센텀시티역 1번 출구 앞에서 <전쟁장사 중단하라>는 피켓을 들고 집회를 진행했다. 그 모습을 본 한 중년 남성이 “전쟁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나”라고 두 번이나 소리쳤다. 그는 분명 전쟁을 반기지 않는다고 했지만, 동시에 우리의 외침에 화를 내고 있었다. ‘전쟁을 좋아하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정서, 그 안에 자리한 무기력함과 체념,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원래 이런 것’이라는 묵인. 아마도 그것이 지금 한국 사회에 넓게 퍼져 있는 ‘전쟁은 나쁘지만 필요한 것’이라는 모순된 태도의 한 단면일 것이다.

그 장면은 나에게도 그대로 연결되었다. 나 역시 여성도 남성처럼 멋있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다는 마음을 품고 자랐지만, 그 ‘멋있음’이라는 기준이 결국 남성적인 강함, 군사적 질서, 위계적 리더십과 같은 가치들에 근거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의 열망 속에는 남성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 ‘남성적인 것을 멋있다고 여기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고 싶다’는 생존의 전략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사회는 방위산업을 ‘기술 혁신’, ‘수출 성장’, ‘국가 안보’라는 말들로 포장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죽음의 가능성, 누군가의 일상과 생명을 희생시켜야 유지되는 질서가 감춰져 있다.

이 전시 공간을 둘러보며 나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우리는 총과 전함, 탱크와 드론을 자랑하는 방식으로 ‘안전’을 말하는가. 무기를 개발하고 수출해야 우리 사회가 강해지는 것이라 믿는 감각은 어떻게 길러지는가. ‘죽이지 않기 위해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 강함을 말하는 이들이 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총보다 피켓이 더 위험하게 여겨지는 사회

나는 학생인권과 관련한 활동을 하게 되면서, 어린 시절부터 마음속에 품어왔던 장래희망을 자연스럽게 접게 되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강한 사람보다는, 옳다고 믿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고, 질서를 따르기보다는 질문할 수 있는 삶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은 고등학생 시절 교장 선생님이 내게 했던 말이었다. “너는 정치인 총알받이야.” 나는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내가 놓인 위치, 내가 하고 있는 말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너무도 명확히 보여주는 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MADEX 전시장 앞에서 1인 시위를 할 때도 비슷한 장면을 마주했다. 함께 피켓을 들고 있던 참여자에게 한 시민이 다가와 “이런 방식은 너무 과격하고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손에 쥔 피켓에는 그저 ‘전쟁장사 중단하라’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을 뿐인데도, 그 모습이 누군가에겐 ‘불편’하고 ‘도발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나는 그 모습에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쉽게 ‘조용히 말하라’고, ‘너무 티 내지 말라’고 요구하는지를 다시금 느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기를 들고 전쟁에 몸을 던지는 것은 ‘애국심’으로 포장된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용기 있고 숭고한 행동으로 여겨지지만, MADEX 전시장 앞에서 피켓 하나 들고 서 있는 일은 관람객을 불편하게 만들고 분위기를 해치는 ‘과격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무엇이 진짜 과격한 것인지, 누가 진짜 위험을 만드는 주체인지는 질문되지 않는다. 이 사회는 폭력을 저지르는 쪽보다, 폭력에 대해 말하는 쪽을 더 두려워하고 통제하려 한다. 총을 드는 손보다 피켓을 드는 손이 더 눈에 띄고, 누군가의 일상을 파괴하는 체계보다 그 체계에 균열을 내려는 말들이 더 ‘불편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멈춰야 할 것은 전쟁만이 아니다

한편,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조차 “아이들을 위해 전쟁을 멈춰야 한다”고 말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쪽도 어린이들에게 “첨단 기술의 발전”을 보여주기 위해 MADEX에 데리고 온다. 전쟁은 단지 ‘아이들을 위해서만’ 중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고, 살아 있는 존재들을 도구로 만들며, 삶을 분리하고 분열시키는 폭력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에게 평화를 헤치기에 멈춰야 한다. 무기를 전시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누구의 꿈’인지 되묻고 싶었다.

우리가 멈춰야 하는 건 전쟁만이 아니다. 전쟁을 ‘당연한 일’로 만들고, ‘어쩔 수 없다’는 말로 정당화하며, 질문하는 사람의 입을 막는 이 사회의 질서에 맞서야 한다. 누구도 죽지 않아도 되는 세상, 누구도 침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향해, 우리는 계속 질문하며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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