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어린(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

 

 

병역거부를 고민하기 시작했던 건 한국의 병역거부 운동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금기에 도전(김환태 감독)>을 본 후부터였다. “나도 저들처럼 군대에 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나는 처음 만나게 된 병역거부자들 앞에서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군대에 가지 않겠다는 선택이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사실 군대에 가는 것도 가지 않는 것도 둘 다 상상이 잘 안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이런 고민을 해야 하지? 머리가 아팠다. 별로 군대를 내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후로 나는 군대에 대해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파서 줄곧 외면하기 시작했다. 군대에 언제 갈 거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언제나 ‘고민 중’이라고 대답했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얼른 병역거부에 대한 책도 읽고 고민도 해보고 해야겠다 다짐했다. 그때쯤 가족들은 조금씩 내게 도대체 군대에 언제 갈 거냐고 물어보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시선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군대를 미루는 일이 도통 이해가 안 되는 거였다. 이해받지 못한다는 서러움에 눈물 흘린 날들이 지나갔다. 덮어두고 언제까지고 미룰 수 없다는 것, 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군대에 가는 것도, 가지 않는 것도 내게는 큰 부담으로 느껴졌다.

나만 그런 걸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군대에 가는 걸까? 왜 주변 친구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도,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궁금한 마음에 하루는 병역거부에 대해 자주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에게 ‘언제부터 너가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는지’ 물어보았더니 그는 한 번도 실감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덧붙이며 그는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을 믿었던 시기에는 ‘군대는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이라 생각했지만, 자신의 남성성과 불화하기 시작한 후로는 그런 생각이 사라졌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불화’라는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지금까지 내 목소리를 일부러 무시하고 있었구나.

 

어쩔 수 없다는 말에 지고 싶지 않아

이런저런 불화의 감각들을 떠올려보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육식이었다. 나는 19살 때 공장식 축산 시스템 속에서 수없이 많은 동물이 평생을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맞닥뜨리고 오랫동안 괴로워했다. 내 의도와 선택과는 상관없이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가해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면 많은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지 않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동물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어쩔 수 없지 않냐’는 체념의 언어를 받아들일 순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육식을 중단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나의 채식이 그들의 죽음을 멈출 수 없다는 회의감이 덮쳐왔고, 지금은 더 이상 강박적으로 모든 동물성 식품을 거부하진 않고 있다. 종종 나에게 묻곤 한다. 그런데도 계속 육식을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아마 이런 행동이 실제로 죽음을 멈출 수 있다는 바람이기보다는, 스스로 떳떳하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고집에 가까웠다.

나는 기후운동을 하며 여러 지역의 사람들을 종종 만나곤 하는데, 어제는 울진에서 탈핵 운동을 하는 친구를 만나고 왔다. 그는 원전에서 일하는 병역거부자이면서 울진 녹색평론 읽기 모임에 다니는 녹색당원이기도 하다. 그날 대화를 나누며 그는 수차례 ‘종속’이라는 단어를 내뱉었다. 지역사회의 원전 의존도가 너무 높아서 원전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를 아무리 해도 “그래도 원전 때문에 먹고 사는 거 아니냐”는 말에 부딪힌다는 무력감의 표현이었다. 자주 듣던 이야기였다. 지역 경제가 사는 게 우선이니 동물 학살 축제도, 섬을 깎아 짓는 공항 건설도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들. 그 뒤에는 ‘산에 들어가 살아라’는 이야기가 꼭 붙어 나온다.

2025.05.15. '서울~삼척 탈탈탈 순례'에 참여한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 깃발과 몸자보에 '탈핵', '탈석탄', '탈송전탑'이라고 적혀있다.

2025.05.15. ‘서울~삼척 탈탈탈 순례’에 참여한 청년기후긴급행동 활동가들. 깃발과 몸자보에 ‘탈핵’, ‘탈석탄’, ‘탈송전탑’이라고 적혀있다.

군대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도 실은 비슷한 게 아닐지 생각해본다. 군대가 아무리 전쟁에 동원되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돌아와도, 부패한 권력의 명령으로 시민들을 구타하고 학살하는 데 앞장서도, 그래도 ‘대한민국 남성으로서’ 군대를 다녀오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 이야기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 군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꺼내면 불순분자로 낙인찍힐 거라는 공포를 느낀다. 나도 군대에 안 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더니 엄마에게 ‘미친놈’이라 욕을 먹었다. 아마 이런 압박감이 그동안 내가 군대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던 이유였으리라. 여기에도 꼭 ‘이민 가라’와 같은 말들이 붙어 나온다.

사실 이 모든 이야기에 날을 세우고 고민하는 것이 피로할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감각하는 세상을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틀렸다고 하나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 세상의 여러 폭력을 볼 때면 내가 그 아픔들로부터 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어쩌면 아픔에 응답한다는 건, 특별히 대단한 정치적 신념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사소한 폭력을 거부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거부는 자신의 남성성과 ‘불화’했다는 친구의 말처럼, 결국 자신의 목소리와 감각에 솔직해지는 일, 자기 자신에게 책임을 다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니, 병역거부가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닐 수도 있구나 싶어 조금씩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체복무라는 길을 선택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역거부라는 방향에 동의하는 것과 실제로 그 일을 내 삶으로 통과하는 것은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마침 올해 병역거부의 날(5월 15일)에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활동가 모임 ‘한줌단’에서 토크쇼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곧바로 신청서를 작성했다. 작년에 열렸던 ‘대체복무 고구마쇼’에 가지 못해 아쉬운 마음에 이번에는 꼭 참여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차였다.

한줌단이라는 이름은 병역거부자 중에서도 대체복무제도를 경험한 이들이 ‘아직 한 줌도 안 되는 형편이라 앞으로는 최소한 한 줌이 되고 싶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하지만 수가 적다고 연대가 약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대체복무라는 제도를 경유하는 과정에서 끈끈히 뭉치며 대체복무제도의 개선을 위해 자신의 이야기를 꾸준히 전하고 있었다.

 

행사에

온라인으로 진행한 이날 행사에는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 이야기가 궁금한 수십명이 참여했다.


이날 패널로 참여해서 경험을 나눠주신 분들은 모두 3년간의 대체복무를 마친 분들로 각자 ‘최초’ 타이틀을 하나씩 가지고 계셨다. 시우 님은 특정 종교 대상자가 아닌 병역거부자 중 최초로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수환 님은 대체역 심사에서 대체역 편입 신청이 인용된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닌 첫 사례, 마지막으로 길완 님은 대체역 복무 중 법무부 상대로 대체역 복무관리매뉴얼 공개를 주장한 행정소송 승소, 엄청난(?) 이력들이다. 그리고 현재 대체역으로 복무 중인 건희 님께서 사회를 맡으셨다.

세 분께서는 대체역 심사 과정에서부터 3년의 대체복무 기간 동안 있었던 여러 에피소드들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눠주셨는데, 아무래도 대다수가 여호와의 증인 신자였던 교정시설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에 대한 씁쓸한 경험들이 주로 기억이 난다. 특히 성소수자에 대해 배타적인 여호와의 증인 요원들 사이에서 있었던 일상에서의 차별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나는 그들 사이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고민해보기도 했다. 내가 교정시설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살게 될까를 중심에 두고서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의 미래를 상상하게 되었달까. 혼자라는 감각에 외롭거나 서러운 순간들도 없지 않을 것 같았다.
사실 3년간 낯선 사람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시우 님께서는 다른 대원들에게 다가가고자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공부도 하고 대화도 나누고 그랬지만 결국 거리가 영 좁혀지진 않았다고 하셨다. 길완 님과 수환 님께서도 다른 증인들에게 화를 낸 적도 여러 번 있다고 하셨다. 생활 공간이 좁다 보니 생기는 여러 마찰부터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발언들까지, 웃으면서 이야기하셨지만 그 당시에는 당혹스러웠을 에피소드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숨 쉴 구멍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길완 님께서는 은근히 그 안에서 책 읽을 시간이 많았다고, 읽고 싶었던 책을 3년 동안 원 없이 읽었다고 하셨다. 여담이지만 이 이야기를 학교 교수님과의 대학원 상담 시간에 꺼내니 교수님께서 “대학원생이 군대를 가면 그동안 못 읽은 책들이 마중을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며 나더러 꼭 대학원을 마치고 대체복무를 하면 좋겠다는 조언도 하셨다. 그 안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지 어느 정도 내 시간을 갖는 게 보장된다는 사실만으로 마음 한구석이 조금은 편해졌다. 대체복무 업무를 하며 합숙 복무가 필요하다는 건 아직 도저히 이해가 안 되지만, 할 수 있는 만큼 몸부림을 치면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그 시간 속으로 데려가야겠다는 각오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시우 님은 대체복무 기간 동안 행정, 보건위생, 전산 등 다양한 업무를 했지만 그중에서도 급식 업무가 특히 기억이 난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함께 일한 조리사 분들과의 관계 덕분이었다. 그분들과의 노동과 대화를 통해 팍팍한 와중 조금이나마 생기를 느낄 수 있었다는 거였다. 3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체복무요원이 되어 하게 될 노동이 너무 가치 없게 느껴지면 어쩌지 걱정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설령 가치없게 느껴지면 어떤가, 무의미해 보이는 일들 사이에서도 의미를 찾으려 애를 써보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의미있지 않을까.

모두의 말을 들으면서 대체복무를 선택한다는 것은 이런 거구나 같은 상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누군가는(시우) 그 속에서의 모든 일상을 꼼꼼히 기록하면서 자신 이후에 대체복무에 참여할 이들을 위한 질문 보따리 선물을 준비했다. 누군가는(길완) 대체복무 매뉴얼을 공개하라고 행정소송을 제기하는 등 대체복무 현장에서도 강건한 군대식 위계질서에 대드는 까칠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누군가는(수환) 부조리에 저항하면서도 대체복무요원 대표를 맡으며 더 나은 일상을 구축하기 위해 협력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어쩌면 나는 그들의 말을 들으며 대체복무를 마주할 용기를 얻으려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들이 나눠준 과거의 경험들이 나에게는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마냥 따라 웃을 수만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용기나 확신이 없음에도 계속 이들과 연결되고 싶어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대체복무를 결심하기 위한 용기가 아닌, 대체복무라는 시간을 통과해낼 수 있도록 필요한 용기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선택의 영역이 아니었다. 내가 선택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군대를 거부하고 있었다.

 

행사 후기

행사가 끝난 뒤 남긴 후기

 

더 많은 물음표를 함께 만들어가기

다큐멘터리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에서 나는 군대에 ‘어차피 가야 한다’는 목소리에 ‘과연 그럴까?’라며 딴지를 거는 지난 20여 년 간의 질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질문들은 계속 이어져 현재 병역거부는 대체복무라는 형태로 최소한의 제도적 인정을 받게 되었지만, 여전히 대체복무 제도는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이다. 그때도 지금도 한 줌의 질문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으며, 아마 절대 끝이 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로 나는 이 물음표가 정말 좋다. 세상의 목소리와 자신의 목소리가 부딪힐 때, 그 파열음을 몸 안에 가둬두지 않고 밖으로 드러내며 질문을 나눠준 이들 덕분에 나도 내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무엇을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지, 어디에서 내가 편안함을 느끼는지, 내 목소리에 솔직해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려준 이들에게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이 질문의 이어달리기에 함께하고 싶다. 이 이어달리기는 아마 끝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나는 영원히 외롭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물음표가 나의 물음표가 된 것처럼, 나의 물음표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반가운 물음표가 되는 그런 방식의 삶을 나는 살아가고 싶다. 이토록 풍요로운 삶이라니, 그러니 내가 군대를 거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토록 유혹적인 병역거부라니. 앞으로 나에게 닥칠 일을 너무 낭만적으로 생각하나 걱정도 되지만, 살면서 한 번쯤 이 정도는 미쳐봐야 하는 것 아닐까.

나는 다시 군대를 내 일로 생각하지 않았던 예전의 나를 떠올려본다. 만약 그때 내 앞에 군대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어땠을까? 장애인의 탈시설을 돕고, 고령화된 농어촌에서 노인 분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하고, 탈가정 청소년과 성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쉼터에서 일하거나, 축산업에서 벗어난 동물들을 돌보거나 산불을 막고 숲을 가꾸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 아니라 우리가 보람을 느끼고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막 20대에 접어든 청년들이 군복무 대신 이런 일들을 선택할 수 있는 미래라면 어떨까? 이후에 이 길을 걸을 누군가에게는 나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주어질 수 있다면 어떨까?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데에 있어 단단한 신념이나 확고한 양심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함께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었다. 적어도 나는 토크쇼에서 한줌단이 경험을 나눠준 대체복무가 나 혼자만의 선택이 아닌 것 같아 든든했고,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길 때 도움을 구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위안도 받을 수 있었다. 내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는 것, 내 안의 불화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는 것, 거기에서부터 다른 세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 한 줌의 이야기들 덕분에, 나는 그 세계에 동참할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이제는 나의 소심한 목소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조그마한 또 하나의 용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