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화(출판노동자)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데이비드 루리

내가 유난히 끌리는 이야기 유형이랄까, 그런 게 있다. 나는 그걸 ‘추락’이라고 부른다.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바닥으로 자기 몸을 던지고 마는 추락에서부터, 남부럽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아주 쓸데없는 것을 계기로 속절없이 망가져버리는 추락까지, 그 모든 ‘추락’들에 흥분하는 편이다. 왜 그러는 건지 잘 몰랐는데, 존 쿳시의 대표작 『추락』을 읽고 나니 조금 알 것도 같다.
사실 이 소설의 원제는 ‘Disgrace’, 즉 ‘망신’이나 ‘수치’에 가깝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면서 작가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데이비드 루리 교수가 당한 첫 ‘망신’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보자. 출발은 이렇다. 문학을 가르치는 점잖은 오십 대 남자 교수가 ‘망신’을 당한다. 슬프게도 이때 ‘망신’에 들어갈 가짓수는 몇 개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 또 비교적 드라마틱한 망신거리를 골라보자면, 그렇다, 제자와의 성추문. 어느 비 오는 날에 ‘우연히’ 앞에서 걸어가던 멜라니라는 학생에게 욕망을 느끼고,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이 소설의 첫 문장이 이렇다)해온 사람답게 적극적으로 대시해서 결국 목적을 이룬 대가다. 소문이 퍼지면서 대학 내 위원회에 ‘성희롱’으로 신고가 들어가고, 그는 자기변호뿐만 아니라 자기반성과 사과, 그냥 사과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

“(…) 그것이 당신의 진실한 감정을 반영하는 것입니까?”
그는 고개를 젓는다.
“나는 그 말을 당신에게 했소. 이제 당신은 그 이상을 원하고 있소. 당신은 나한테 그 말의 성실성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소. 그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오. 그것은 법의 소관 밖이오. 나는 할 만큼 했소. 처음으로 돌아가서 규칙대로 합시다. 나는 유죄를 인정하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말이오.”

정황상으로 보면 그는 강제로 관계를 가졌던 것이 아니다. 아니지, 나도 모른다. 강제였을 수도 있다.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합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또는 합의를 했더라도 교수라는 권좌에 있는 자가 학생과 ‘너무 사적인’ 관계를 맺은 것이 범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논쟁거리들은 루리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는 그저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그가 욕망을 느꼈다는 것만은 하늘땅이 뒤집어진다고 해도 사실이며, 그의 내밀한 욕망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급기야 재판 같은 자리에 끌려나온 순간, 이미 ‘수치’는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돌이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루리로서는 너무 밝은 조명 아래 해부당한 자기의 욕망을 놓고 더 왈가왈부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 당사자 멜라니를 제외한 이 하이에나들한테 그의 ‘진정성’이라는 고기 찌꺼기를 던져줄 마음이,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에 그는 너무 똑똑하고, 무엇보다 늙었다.
이렇게 그는 최초의 ‘추락’을 한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철학적 말장난이나 한 대가로 교수직을 빼앗기고, 자신의 도시를 떠나 딸이 살고 있는 시골 농장으로 도망치듯 떠난다.
아, 이런 건 별로 재미가 없다. 오십 대 지식인 남성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인 양 치기 어리게 시작을 하더니, 삼 분의 일쯤 되는 지점에서 꼬리를 말고 내빼는 셈이다. 내가 아무리 추락 이야기를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너무 싱거운 추락이지 않은가? 인생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사소한 계기도 아니며(서른 살 연하 제자를 학교 앞에서 대놓고 꼬시다니, 누가 보더라도 추락이 내재되어 있는 짓이다), 무엇보다 추락하는 주인공의 충격과 몸부림이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잘못 고른 것일까? 이것은 그저 노교수의 성추문, 다시 말해 시시하고 저속한 추락 이야기들 중 하나인 걸까? 존 쿳시의 작품을 많이 읽지는 못했어도, 그가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일지언정 시시한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인내심을 발휘해 이 ‘추락’을 조금 더 지켜보자.
루리의 딸 루시는 “코뮌, 즉 가죽제품과 햇볕에 말린 도기를 그레이엄스타운에 내다팔고, 옥수수밭 이랑에 대마를 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시작해 자작농지에 남아 있으며, 이곳을 사랑하고 제대로 농사를 짓고 싶어 한다. 그녀는 (아마도) 레즈비언이고, 동물 보호를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실천하고 있다. 즉, “도시 지식층인 그와 그녀의 어머니가 시대에 역행하는 억세고 젊은 개척자를 낳”은 것이다.
루리는 딸과 함께 이곳의 낯선 생활방식에 적응해나간다. 날마다 몸을 써 일을 하고, 루시가 소개한 동물보호소에 나가서 인도적인 안락사 일을 돕기도 한다. 이것은 자의이지만, 다른 길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자신이 추락할 대로 추락했고, 이 낯설고 불편한 곳이 끝에 다다른 ‘바닥’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고.
그는 그의 딸이 어울려 사는 ‘흑인’ 이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다른 문화권”이고, “동물복지에 관계된 사람들이 특이한 종류의 기독교인들 같아 보인다”. 아버지의 반응을 본 딸은 말한다.

“(…) 그 사람들이 저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베브와 빌 쇼와 같은 친구들을 좋지 않게 생각하시는 거죠.”
“루시, 그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에요. 그들은 나를 더 높은 차원의 삶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 이유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유일한 삶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동물들과 공유하는 거예요. (…)”

이 소설에서, 그리고 존 쿳시의 다른 여러 소설들에서도 ‘동물의 삶’은 주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던져진다. 루리는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욕구를 주체하지 못해서(사실 그는 이전에 얼마든지 욕구를 참을 수 있었으므로, 이번엔 ‘안 한’ 것에 가깝다) 추락해놓고 왜 때아닌 동물 타령이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이 부분에 좀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부녀는 ‘차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은 없다고 말하는 딸. 그것은 즉 삶에는 ‘높이’가 없다는 말이다. 아버지도 큰 맥락에서는 거기에 동의하는 듯 보인다. 동물의 삶 또한 우리보다 ‘낮은’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른 차원’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자기가 옮겨온 이 ‘다른 차원’에 대해서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그는 ‘추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도 그렇게 느끼겠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차원을 옮겨온 것이다. 루시의 말대로 삶에 ‘높고 낮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체 ‘망신’이나 ‘수치’란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내 삶이 나보다 ‘낮은’ 사람들에 의해 모욕당하고 내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는 것은 애초에 가능한 일일까?
이제 우리는 단순하고 명확해 보였던 이 추락, 굴러떨어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아야만 하게 됐다. 하지만 속단하지 말고, 역시 좀 더 지켜보자.
그가 죽어가는 동물들의 마지막을 돌보며, 전혀 상상해보지 못했던 그 일을 직접 하면서 다른 차원을 겪고 있을 때, 그와 그의 딸에게 무시무시한 사고가 일어난다. 루시의 농장에 삼인조 강도가 침입한 것이다. 이들은 루리를 화장실에 가둬 태워 죽이려고 시도하고, 그동안에 루시를 돌아가며 강간한다. 바닥이라고 여겼던 곳에서 또다시 만난 바닥, 아니 바닥도 없는 허공, 이 절대적인 절망과 수치를 루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당시 이 지역은 이렇게나 치안이 불안한 곳이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딸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녀에게는 이 땅이 삶이고, 자기 자신이고, 그 끔찍한 사고와 범죄자들조차도 그 일부이기 때문이다. 짐작하겠지만, 루리는 미칠 노릇이다. 눈물을 들키는 것과 상관없이 바위처럼 꿋꿋한 딸은 이렇게 말한다.

“우선, 아버지는 그날 저한테 일어났던 일을 이해하지 못하세요. 저를 걱정해주시는 건 고마워요. 그런데 아버지는 그걸 이해한다고 생각하시지만, 궁극적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세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죠.”

루리가 보기에 딸은 짐승보다 못한 세 남자에게 강간을 당했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딸은 아버지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강간을 당할 때 아버지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강간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면 아버지가 애초에 남자라서? 흑인들과 더불어 살지 않는 백인 교수라서? 루리에게는 사실 이 모든 것이 수치이고, 끝없는 추락이다. 제자 멜라니, 불같이 욕망했지만 끝내 이해하지 못했던 그 타자와의 접합으로 이렇게 나락에 떨어졌는데, 그보다 더 끔찍한 타자들이 그를 나락이라고도 할 수 없는 곳으로 자꾸 떠미는 것이다. 생전처음 당하는 ‘폭력’ 그 자체인 강간범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어떤 의미에서 루리에게 강간범들보다 더 지독한 타자는 사랑하는 딸 루시다. 그리고 루시가 속해 있는, 강간범들 또한 속해 있는 그 ‘문화권’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사실상 아래로의 추락은 존재하지 않으며,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이 있을 뿐이라고, 한가한 소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쓸데없이 성욕이 왕성했던 우리 노교수님은 이제 어쩌면 좋은가?
이게 끝이 아니다. 제발 그만하면 좋겠다 싶을 때까지도, 이 소설의 ‘추락’은 끝나지 않는다. 스포일은 이쯤에서 멈추고.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삶의 층위, 또한 존재의 층위에 대해 정말로 빡세게 고민하게 한다는 것이다. 엄청난 질문을 던지며 혼란스러운 독자의 머리채를 끌고 다니는 것이 이 작가의 특기인 것 같다. 여성과 남성, 젊은이와 늙은이, 도시와 농촌, 백인과 흑인, 서구와 아프리카, 영어와 아프리칸스 어, 인간과 동물… 이 모든 경계에 충실하며 안전하게 살고 있던 인간이 어느 날 갑자기 타자(다른 차원) 앞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진다. 그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자기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폭발한다. 우리의 루리 교수는 자기라는 사람을 자신감 넘치게 정의하며(첫 문장을 기억해보라)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추락을 거듭할수록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자기가 대체 뭔지 알다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자기도 타자라는 지옥과 다를 것이 없다. 그는 더 이상 기댈 데가 없다.

“그는 수술대 위에 몸을 뻗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본다. 메스가 번쩍인다. 그의 몸은 목에서 사타구니까지 개봉된다. (…) 이런 게 모두 뭐지? 의사가 투덜거린다. 그는 쓸개집을 쿡쿡 찔러본다. 이게 뭐지? 그는 그것을 잘라 던져버린다. 그는 심장을 쿡쿡 찔러본다. 이게 뭐지?”

자기 심장에 대해서 ‘이게 뭐지?’라고 낯설어하는 고통 속에서도, 동시에 그는 “수치를 나의 존재 상황으로 받아들이려고” 하고 있다. 타자가 가져다준 다른 차원, 그 지옥 같은 수치심을 그는 끌어안으려고 한다. 그것이 그를 더 ‘풍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멜라니에 의해, 토우스 리버에서의 그 여자에 의해, 로잘린과 베브 쇼와 소라야에 의해, 그들 모두에 의해, 풍부해졌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서도, 실패에 의해서도, 풍부해졌다. 그의 가슴에 피는 한 송이 꽃처럼, 그의 가슴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넘친다.”

꽃? 꽃이라니? 그렇다고, 가슴에 꽃 한 송이 피우겠답시고 교수직에서 기꺼이 쫓겨나고 기꺼이 타 죽을 뻔하고 기꺼이 강간당할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건 우리 교수님도, 작가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묻는 것이다. 당신은 추락하지 않고 살 수 있는지? 수치도 한번 느끼지 못하고, 풍부해진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자신의 차원에서 자기 자신으로서 안전하게 죽을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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