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용석(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인터뷰이: 김진숙(노동자)

전쟁없는세상은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을 시작하며 한국산 시위진압무기를 직접 경험한 노동운동가 김진숙, 인권활동가 박래군, 평화활동가 박석진을 인터뷰했습니다. 첫번째로 김진숙 지도위원님의 인터뷰를 공유합니다.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에 많은 관심과 지지, 연대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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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자를 구원했습니다. 김주익이 김진숙을 살렸습니다.”

김주익 열사 묘역 앞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이하 존칭 생략)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덤덤한 말투였지만 가늘게 떨렸다. 솥의 발을 닮았대서 솥발산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곳에 부산 경남지역의 노동 열사들이 모셔져 있었다. 산재를 입고 민주노조 활동을 하다가 실종된 뒤 시신으로 발견된 정경식, 유서 탈취를 대비해 왼팔에 “내 이름은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다”는 유서를 쓰고 투신한 미싱노동자 권미경, 방위사업체 군복무 중 해고당하고 이후 복직투쟁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수원, 전교조 조합원으로 구속 중 암이 발병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사망한 교육노동자 신용길, 김진숙의 동기이자 기타도 잘 치고 노래도 잘해서 모두 좋아했던 한진중공업 초대 민주노조위원장 박창수, 김진숙보다 먼저 85호 크레인에 올라 싸우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주익, 나와 동년배인 한진중공업 최강서, 역시 나와 또래이자 무노조 삼성에서 노조 만들다 죽음으로 내몰린 염호석, 김주익의 친구로 김주익의 죽음에 누구보다 큰 미안함을 느끼고 친구 곁으로로 떠난 곽재규.

햇볕이 타들어가는 솔밭산 공원묘지에서 김진숙은 노동해방을 위해 싸우다 떠난 옛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렀고, 그들의 삶에 숨결을 불어넣었다. 아들의 죽음을 배신하고 멋대로 사측과 합의한 뒤 합의금을 강원랜드에서 며칠 만에 탕진한 아비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죽음을 기억하며 자신도 소방관 노조를 만든 열사의 아들 이야기, 남겨진 아이들에게 휠리스 운동화를 아빠 대신 사준 지역의 활동가 이야기까지. 가장 평범한 이들의 일상적인 이야기가 가장 슬픈 이야기가 되어버린 까닭에는 바로 정권의 노동자 탄압, 그리고 그 도구가 된 경찰의 폭력이 있었다. 대단한 걸 요구한 건 아니었다.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는 노동 3권. 노동조합을 결성할 권리를 요구하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짧게는 불과 10여 년 전, 길어봤자 30년 전의 이야기다.

 

권미경

여성 노동 열사 권미경의 묘비. 김진숙 지도위원은 솥발산 공원묘지 곳곳의 노동열사들의 묘를 방문해 그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투쟁에 대해 들려주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세월 동안 한국 사회는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여전하다는 것은 그대로지만 방식은 달라졌다. 더 교묘해졌다. 그러면서 한국 경찰은 더 이상 노동자들에게 최루탄을 쓰지 않는다. 더 이상 최루탄에 목숨을 잃거나 최루탄 냄새에 눈물 콧물을 흘릴 일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아니 사실 여전히 누군가는 최루탄과 물대포에 목숨을 잃는다. 그 현장이 우리 눈앞에 없고, 목숨을 잃는 이들이 한국인이 아닐 뿐. 한국산 시위진압무기가 수출된 곳에서 최루탄에, 물대포에, 전기충격장봉에 쓰러지고 더러는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 한국은 여전히 최루탄을 생산하는 나라고, 더는 국내에서 사용하지 않는 최루탄을 외국으로 수출한다. 수입국 중 많은 수는 독재정부가 들어선 국가 혹은 자국민을 폭력으로 탄압하는 권위주의 국가다. 최루탄뿐만 아니라 물대포 등 다양한 시위진압무기를 수출하고 있다. 정부는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시민 안전을 위협하는 시위진압무기 수출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인 활동가, 동시에 가장 활발하게 젊은 세대와 교류하며 노동운동뿐만 아니라 평화운동, 기후운동, 성소수자 운동 등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무수한 사회운동들과 연루되는 것을 기꺼이 자청하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부산에서 만나 경찰폭력과 경찰무기, 그리고 시위진압 무기 수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민주노조 운동과 경찰의 폭력

“처음 경찰을 접했던 게 1986년 해고되고 나서였어요. 출근 투쟁을 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제 영도경찰서에 끌려가서, 매일 영도 경찰서에서 두드려 맞았어요. 강력계를 먼저 갔거든. 강력계는 깡패 잡는 부서인데, “저 년은 독종이다” 그러니까 걔네들 말로 “기를 빼야 한다” 이러면서 때렸어요.”

젊은 노동운동가 김진숙에게 가해진 경찰폭력은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신체, 주먹과 발이었다. 사람의 몸은 때로는 주인의 의지와 용도에 따라, 혹은 상황에 따라 강력한 무기가 된다. 혼자 고립되어 있는 경찰서, 혹은 대공분실의 온통 빨갛고 전부가 노란 방 안에서는 사람의 주먹과 발길질로도 타인의 몸과 마음을 망가뜨릴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쉽게 망가지기도 하면서 반대로 어떠한 폭력으로도 부술 수 없기도 하다. 작년에 작고한 지식인 홍세화가 <저항하는 평화> 추천사에서 “이념으로 억압할 수는 있어도 억지로 갖게 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인간의 양심을 표현한 것처럼, 경찰의 원초적인 폭력도 김진숙과 그의 동지들의 민주노조를 향한 열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 사람은 노득현인데 부산대 약대 몇 학번이다. 지하 조직 서클 만들어서 노동자들 의식화하고 있다. 너는 몇 번이나 만났냐. “나는 모른다” 대답을 할 때마다 맞아요. 계속 맞다 보니 맞는 게 현실감이 없었어요. 엎드린 채로 맞아서 뭘로 맞았는지도 몰라요. 항암 하면서 필라테스를 하게 됐는데 비포 애프터 사진 찍으려는데 “진숙 회원님 이게 무슨 흉터예요” 이러더라고. 그래서 보니까 등에 쭉쭉쭉. 그때 맞아서 터진 게, 벌어진 상처들이 흉터로 이렇게 찍찍찍찍 남아있어요.”

김진숙과 민주노조를 염원하는 한진의 노동자들은 경찰의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국 사회 전체가 레드컴플레스가 심할 때였다. 킬링필드의 역사적 상처를 겪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게 당시 1980년대 한진 노동자들도 조심스러웠던 모양이다.

 

영도 언덕에서 내려다본 한진 조선소의 풍경.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날 한진 노동자들이 정말 잘 싸운다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탄압하던 시절부터 이제는 손배가압류로 돈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그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투쟁을 이어가는 동료들에 대한 애전과 존경심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영도 언덕에서 내려다본 한진 조선소의 풍경. 김진숙 지도위원은 이날 한진 노동자들이 정말 잘 싸운다는 말을 여러차례 했다. 최루탄과 곤봉으로 탄압하던 시절부터 이제는 손배가압류로 돈으로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세상이 되었는데 그 세월 속에서도 꿋꿋하게 투쟁을 이어가는 동료들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이 묻어나는 말투였다.


“아까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차에서 들은 김오키의 노래)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에서, 캄보디아 노동자가 영원무역에서 총 맞아 죽은 이야기가 나오잖아요.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그러고 나서 투쟁이 사그라든단 말이지. 나는 캄보디아에 아이들을 만나러 해마다 가는데, 올해에도 8월에 갈 건데, 너무 답답할 때가 있는 거야. 훈센이라는 총리가 34년을 집권하고 왕위를 아들한테 물려주고 자기는 상원 의장을 한단 말이지. 완전히 나라를 그냥 가족들이 가족 회사로 운영하는 건지. 근데 이거에 대해 대중적인 저항감이 없어요. 나는 그게 킬링필드를 겪은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느껴요. 이 사람들이 SNS도 하고 아이돌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데 정치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해.”

그렇지만 그런 두려움도 민주노조를 향한 노동자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김진숙은 대의원에 출마해서 압도적인 1위로 당선이 되었다. 불붙은 민주노조를 향한 열망은 6월 항쟁 때도 계속되었다. 789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고 난 뒤 부산에만 노동조합이 400개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각성한 노동자들,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을 향해 경찰은 최루탄을 쏴댔다.

“저는 학생들이 되게 똑똑한 줄 알았어요. 노태우랑 전두환이랑 똑같은 놈이다. 쟤네들끼리 제비 뽑기 해서 그다음에 노태우가 대통령 해먹기도 약속이 되어 있다, 6월 항쟁 광장에서 너무너무 이야기를 많이 했거든요. 근데 노태우가 629선언했다고 학생들은 안 나오더라고. 노동자들만 남은 거죠. 10월 말, 9월 말쯤엔가 처음으로 노동자라는 이름을 걸고 부산대학교에서 집회를 했어요. 부산대학교가 좋은 게 뭐냐 하면, 정문에서 학교 쪽으로 비스듬히 언덕이에요. 경찰들이 최루탄을 쏘면 이쪽으로 오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다 맞아요. 그때는 선봉대들이 있었잖아요. 지랄탄이 날아오면 그걸 쫓아가서 밟아요. 그래가지고 그걸 다시 던졌어요. 난 그거 참 신기했다니까”

당시 경찰이 쓴 최루탄은 너무 독해도 너무 독했다. 너무 독해 수출도 못한다는 이야기가 떠돌 정도였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8개월 된 조카를 보살펴야 했는데, 독한 최루탄 때문에 아이가 맨날 감기에 걸려있었다. 김진숙은 참다못해 최루탄 공장에 항의하러 찾아간 적도 있었다.

“최루탄을 웬만큼 맞아야 말이지. 집에서도 최루탄 냄새가 났으니까. 아기도 매일 재채기하고, 감기가 떨어지지를 않고. 간접적으로 계속 맡으니까. 최루탄 너무 많이 쏘고 너무 많이 괴롭고 하여튼 너무 힘들었어요. 최루탄 만들던 삼영화학 공장이 양산 무슨 공단이었는데 기억이 안 나요. 그때 제대로 하려면(싸우려면) 많이 갔겠지. 왜 그렇게 둘이 갔는지 모르겠어. 우리 진짜 최루탄 때문에 못살겠다. 니들 잔업 좀 하지 말아라, 이거 하러 갔는데 아무도 만나지도 못하고 왔어요.

부산에도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부산지부가 있었는데 거기 어머니들이 전경들한테 “니들도 우리 아들이다”이러면서 최루탄 총구에다 장미꽃을 꼽아주면서 막아놨지.”

최루탄은 이제 한국에서는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경찰이 최루탄을 쓰지 않으면서 시위 현장도 많이 달라졌다. 이제는 비폭력 집회로 대통령을 두 명이나 탄핵시킬 만큼 한국의 시위 문화는 많이 달라졌다. 이는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이 새삼 중요하다는 방증이다. 아울러 시위 현장에서 일어나는 폭력의 책임이 누구에게 가장 크게 있는지 또한 말해준다.

다만 대규모 시위의 문화는 달라졌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유독 경찰의 폭력이 가혹하다. 쌍용자동차 옥쇄 파업 당시 쌍차 조합원들을 향한 경찰의 폭력, 윤석열 정부 당시 건설노조를 향한 경찰의 폭력만 봐도 알 수 있다. 왜 유독 경찰 폭력이 노동자들에게 가혹할까?

“노동자들이 정권에게 직접적인 압력이 되니까.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움직이고 계급적으로 각성한다는 거는 체제의 직접적인 압력이 되니까, 위협이 되니까 그런 게 있죠.”

 

세계로 향하는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이제 한국은 시민들에게 최루탄을 쏘진 않지만 최루탄을 비롯한 시위진압무기를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국가다. 한국산 최루탄을 수입한 34개국 가운데 89%에 해당하는 31개국이 독재국가 혹은 권위주의 정권이 집권한 나라다. 이 나라들에서 수출한 시위진압 무기는 시민들을 탄압하는 데 쓰이고 오남용 되면서 시민들의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있다. 지난 10여 년 간 최소 10개국에서 80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국산 시위진압무기로 목숨을 잃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해 어떤 책임을 느껴야 할까?

“아까 캄보디아 영원무역 노동자들 이야기했잖아요. 저는 결연 맺은 아이가 있어요. 콩다니라는 아이인데 걔를 7살에 만났어요. 지금은 28살이 됐지. 그 뒤에 이제 낌리라는 아이를 다시 만나서 얘는 대학생이 됐어요. 프놈펜 대학생이 되었는데 아주 신났어요. 저는 영원무역에서 노동자들이 시위하다 총 맞아 죽는 일이 일어났을 때 콩다니 생각이 제일 먼저 났어요. 그러니까 이 아이들의 꿈은 한국에 와서 일하는 거야. 아니면 한국 기업에서 일하는 거예요. 한국이라면 얘네들한테는 굉장히 이상향인 거예요. 우리가 옛날에 미국에 대해 그런 마음이 있었듯이. 나는 BTS를 작년에 캄보디아 가서 그 애들이 막 텔레비전 틀어주면서 춤추는 거 보고 처음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만든 (시위진압용) 무기들이 그들의 꿈을 짓밟는, 목숨을 짓밟는 무기로 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어요.”

나는 비록 전쟁없는세상에서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을 하고 있지만, 그 무기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노동자 김진숙에게 듣고자 했던 이야기는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에 대해 우리가 느껴야 할, 노동자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우리의 책임에 대한 것이었는데, 김진숙 지도위원은 나의 예상을 벗어나 자신이 결연을 맺고 있는 캄보디아 아이들, 청년들 이야기를 했다. 한국산 시위진압 무기가 누구를 겨누고 있는지 추상적으로 개념적으로 정보화된 지식으로 알고 있는 나와는 다르게, 구체적인 얼굴과 이름을 떠올리며 그이들에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김진숙 지도위원을 보는 순간, 사람들이 왜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과 글, 행동에 끌리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제께인가 그저께인가 트위터 보니까 이스라엘에서, (전투기가) 돌아오다가 폭탄이 남아서 가자지구에 쏘고 왔다며. 진짜… 한화나 풍산이나 그런 걸 만드는 기업이라는 거를 사람들이 잘 모르잖아. ”

한국산 시위진압무기가 향한 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연대의 감각. 이것은 계급의식의 발로이기도하고 또 한 편으로는 국경을 넘어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동반된 구체적인 사랑과 관심이 가진 힘이다. 콩다니와 낌리를 아는 사람 김진숙이기 때문에 한국 땅에서 멀리 떨어진 팔레스타인의 아픔도 느낄 수 있고,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학살하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파는 한국 무기기업들에 대한 비판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김진숙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

“나는 강화가 고향이잖아요. 거기는 접경(지역)이거든 진짜로. 그러니까 북한이 보여요. 귀순하는 사람들도 강화로 되게 많이 오거든. 우리 어렸을 때 그런 훈련을 많이 했어요. 모의 간첩 훈련 이런 거 매주 토요일마다. 이번 주 간첩은 뒷주머니에 신문을 꽂고 그다음 주 간첩은 흰 모자를 쓰고, 그걸 이제 찾아내는 거. 강화는 궐기대회도 엄청 심하게 했거든.”

김진숙 지도위원이 살아온 반공의 시대에는 민주노조 운동을 하는 사람들 또한 군사주의가 강했고 페미니즘의 페자도 몰랐다고 한다. 투쟁가도 없던 시절엔 집회에선 응당 군가를 불렀고, 자신들이 만든 군함이며 장갑차, 각종 무기들이 어디서 어떻게 쓰이는지도 크게 관심 갖지 않았다 한다.

이제 한국은 무기로 자국 시민들을 탄압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나라에서, 무기 팔아 다른 나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그 나라 시민들을 죽고 다치게 하며 돈 버는 나라로 바뀌었다. 청년 여성노동자였던 김진숙은 동지들을 솥발산에 묻고 그 모진 세월을 민주노조를 만들기 위해 싸워오면서 머리칼 허연 지도위원이 되었다. 퀴어퍼레이드에 참석하고,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페미니스트가 대통령이 되고, 성소수자가 총리가 되고,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경찰청장이 되고, 알바 노동자가 노동부 장관이 되고, 사고 피해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이 되고, 전장연(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 복지부 장관이 되고, 전농이 농림부 장관이 되고,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워왔던 이들이 평화부 장관이 되는 게 민주주의고 진짜 대의정치”라고 이야기한다.

 

깡깡이 마을

배 겉면에 붙은 녹을 떼어낼 때 나는 소리에서 이름이 유래한 깡깡이 마을에서 배 수리하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위원. 철망 너머가 배를 수리하는 곳인데, 우리가 방문한 날이 일요일이라 안타깝게도 작업 장면을 볼 수는 없었다.


김진숙은 이번 윤석열 탄핵 집회에서 만난 젊은 여성 청년들에게 솥발산에 누운 당시의 청년 노동자들의 꿈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삼았다고 이야기했다. 솥발산에서, 영도에서 노동운동의 죽음과 삶의 현장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이야기, 전해야 하는 이야기,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야기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한국 기업에서 일하다 투쟁하다 죽은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이야기와 여전히 한국을 좋아하는 콩다니와 낌리의 이야기, 바레인에서 민주화운동에 나섰다가 최루탄을 맞고 죽은 소년 알리 자와드 알 셰이크의 이야기, 그리고 그 나라에 시위진압무기를 만들어서 파는 한국 정부와 무기기업들의 이야기. 나는, 우리는 이 이야기를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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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없는세상은 2025년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을 새롭게 시작합니다.  50명의 정기후원인 함께해준다면 우리는 변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전쟁없는세상은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입국가 시민들의 피해사례를 수집하며 한국산 무기 남용 실패를 모니터링 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분쟁 중인 국가나 독재국가에 시위진압무기를 수출하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제정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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