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이: 박석진(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인터뷰어: 열쭝(전쟁없는세상 후원회원)
전쟁없는세상은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을 시작하며 한국산 시위진압무기를 직접 경험한 노동운동가 김진숙, 인권활동가 박래군, 평화활동가 박석진을 인터뷰했습니다. 두 번째로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활동가 박래군 님의 인터뷰를 공유합니다.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에 많은 관심과 지지, 연대와 후원 부탁드립니다.
한국산 시위진압무기 수출 저지 캠페인 후원 하기(클릭)
12.3 비상계엄의 그날 밤, 사람들은 80년대의 장면을 떠올렸다. 이를테면 거리의 풍경. 최루탄 연기를 헤치고 골목으로 내달리는 시민들, 달려들어 곤봉으로 내리치며 발길질을 하는 경찰들. 혹은 광장의 모습. 물대포에 쓰러지고 최루탄에 피 흘리는 사람들. 설마, 그 악몽 같은 시대가 다시 오는 걸까.
계엄은 성공하지 못했고, 내란을 끝장내기 위해서 국회 앞에서 광화문에서 집회가 이어졌다. 광장의 시민들은 혹한을 견뎌야 했지만, 경찰의 폭력진압을 두려워하진 않았다. 경찰무기가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시대는 적어도 아직은 한국의 현실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이웃나라 시민들에겐 이러한 악몽이 생생한 현실이다. 이들을 가로막는 경찰들의 손에는 한국산 무기가 있다.
태국·스리랑카·인도네시아 등의 시위 현장에서는 ‘메이드 인 코리아’ 무기가 활약하고 있다. 2010년 이후 한국산 경찰무기 사용으로 최소 10개국에서 적어도 80명 이상이 죽음에 이르렀다. 특히 정부가 한국산 무기산업, 소위 ‘K-방산’에 힘을 쏟으면서 경찰무기 수출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다. 경찰무기는 여러 나라의 민주주의를 짓누르면서 외화를 벌어들여 한국의 GDP를 높이는 중이다. 전쟁없는세상이 ‘한국산 경찰무기 감시 및 수출 저지 캠페인’에 나선 이유다.
올해 본격적인 캠페인에 들어가면서, 전쟁없는세상은 연속 인터뷰를 진행한다. 경찰무기가 어떤 고통과 억압을 만드는지 생생하게 지켜보았던, 그리고 이에 용감하게 맞섰던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경찰무기가 수출되어선 안 되는 이유’를 밝히는 증언이다. 이번에 만난 사람은 경찰무기의 폭력성이 최고조에 달했던 1990년대 초에 전경으로 복무했던 박석진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그는 시위대를 제대로 공격하지 않는 ‘무능한 전경’이었고, 1991년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양심선언을 했다. 박석진의 이야기는 경찰무기가 시민들 뿐만 아니라 그걸 휘두르는 경찰들에게도 커다란 고통과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1991년 당시 전투경찰로 복무하셨죠.
정확히는 1990년 6월 14일에 입대했어요. 6주간 군사훈련을 마치고 전경으로 차출돼 2주간 충주 경찰학교에서 다시 훈련을 했죠. 자대 배치는 서울의 1기동대로 받았고요. 사실 저는 ‘남자라면 군대에 가야지’, 그런 생각을 하던 사람이에요. 해병대나 특공대로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그런데 군대에서 겪은 일이 인생을 어렵게 만든 거죠 (웃음)
당시엔 어떤 무기가 있었나요? 직접 무기를 쓰기도 했나요?
전경들도 각자 역할이 달랐어요. 최루탄의 경우 고참 전경들은 ‘사과탄’을 던지기도 했고요, ‘깡통탄’을 발사하는 KP조는 사수와 부사수가 2인 1조로 움직였고요. 페퍼포그는 중대 차원에서 직업 경찰들이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전경 대다수는 진압조였어요. 방패와 곤봉을 들고 대열 맨 앞에 서는 거죠. 저도 진압조였고요. 어쩌다 한 번쯤 KP조도 결합했고 백골단으로도 몇 번 차출됐는데, 주로는 진압을 했어요. 진압조도 2인 1조인데, 쫄병이 제일 앞에 서요. 돌이나 화염병을 맞기 쉬운, 더 위험한 위치에 있는 거죠.
진압할 때 저는 주로 방패로 방어만 했어요. 어떤 전경은 방패를 공격무기로 쓰기도 했지만, 그렇게는 하지 않았고요. 제가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몇 번 집회에 참여하긴 했지만,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군대에 갔기 때문에 경험이 많지 않았죠. 하지만 시위대의 주장이 맞다는 판단이 있었어요. ‘그들을 진압하는 게 옳지 않다. 제대로 된 명령이 아니다’ 그렇게 봤죠. 진정한 분노의 대상은 시위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부대원들과 그런 얘기를 하긴 어렵잖아요. 입을 다물어야 했어요.
무기 사용에 대한 인권지침 같은 것도 혹시 있었나요?
있긴 있었는데, 지침을 준수하도록 따로 교육하지는 않았어요.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돌 던질 때 밑으로 깔아서 던져”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 당시 경찰이 던진 돌에 학생들이 많이 다쳤는데, 돌을 높이 던지면 사진에 찍히잖아요. 그러니까, 시위대에 돌을 던지는 게 문제라는 건 그때도 알았지만 암암리에 묵인되는 분위기였던 거죠.
그런 시절에도 시위대에게 무기를 쓰지 않았네요. 군대에서 무기를 쓰라고 명령을 받는 입장이고, 또 무기를 들면 자신도 몰랐던 폭력성이 드러나는 경우도 종종 있잖아요. 때로는 격렬한 분위기에 휩쓸려 무기를 쓰는 상황도 생길 테고요.
실제로 필요 이상의, 자의적인 폭력성을 발휘하는 동료도 종종 있었어요. 주로 고참급인데, 방패 뒤에서 곤봉으로 내리치거나 사과탄을 던지기도 하고요. 곤봉에 만족하지 못하고 쇠파이프에 전기테이프를 감아서 쓰기도 해요. 정말 적극적인 경우는 미리 사과탄을 깨고 안에 있는 최루가루를 모아서 비닐봉지에 담아요. 시위대가 근접했을 때 가루를 손에 쥐고 얼굴에 문지르는 거죠. (엄청 번거로운 일인데) 참 정성이에요. (웃음)
가두투쟁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이 돼요. 동료들은 시위대를 방패로 찍거나 곤봉으로 때려서 체포하기도 했죠. 그걸 못하는 저는 무능한 전경이었고요. (웃음) 반대로 경찰들이 다치기도 해요. 저도 돌을 맞아서 좀 다친 적이 있어요. 그럴 때면 부대원들은 굉장한 분노를 표출해요. “죽여버릴 거야” 그런 반응이에요. 저는… 그 상황 자체가 고통스럽고 슬펐어요.
방패로 막기만 하고 제대로 공격을 안 하면 나중에 혼나는 거 아닌가요?
예. 많이 혼났어요. 처음 진압 나갔던 때가 기억나는데요.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로 연좌농성이 벌어졌어요. 전경 2명이 시위대 1명을 끌어내는 ‘101호작전’을 미리 훈련했는데, 실전에서는 차마 할머니 팔을 잡아끌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아무 짓도 안 하고 가만있으니까 나중에 두들겨 맞았죠. 저랑 같은 조였던 고참도 같이 맞고. 그 고참한테는 미안했죠. 내가 맞는 거야, 뭐 그때는 엄청 맞던 시절이라서. 그래서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했어요. 돌을 잘 막아서 ‘소대장 방어조’로 뽑히기도 했고요. 보통은 돌을 앞으로 쳐내는데, 소대장 방어조는 각도 조절을 잘해서 옆으로 튕겨 보내야 해요. 소대장이 대열 뒤에 있으니까 앞으로 쳐내면 경찰들이 맞거든요. 실력이 있어야 방어조로 뽑혔어요,
그래도 부대에서 저를 그렇게 문제삼지는 않았어요. 전경들은 세 부류였던 것 같아요.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사람도 있고 또 나 같은 애들이 있는데, 둘 다 소수예요. 대다수는 그냥 군 생활이니까 하는 거죠. 튀지 않을 정도로만. 저랑 같이 맞은 고참도 “누구는 하고 싶어서 (진압)하냐”고 하더라고요.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시위대와 전경으로 마주쳤다는 당시 일화를 많이 들었어요.
예, 저도 그런 적이 많아요. 제가 다니던 학교로도 진압을 나갔으니까요. 차마 친구들을 아는 척하진 못했어요. 진압복을 입고 방독면까지 썼으니까, 친구들은 제가 전경으로 온 걸 모르죠. 또 언젠가 다른 학교에서는 중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그때는 서로 알아봤어요. 그날 저녁에 좀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가장 아팠던 기억은, 우리 학교로 진압을 나갔는데 마침 소대장이 제가 그 학교 다니는 걸 알았거든요. “넌 들어가서 차를 지켜”라고 시키더라고요. 차에 있던 쫄병이랑 교대를 했어요. 그런데 그날 학생들이 기습작전으로 치고 나오면서 우리 소대가 공격을 받았어요. 학생들이 화염병을 집중적으로 던졌는데 그 친구가 맞은 거예요. 쫄병이라 아직 서툴기도 했고요. 그런데 불을 바로 못 꺼서 워커랑 발이 붙어버리고 결국 다리를 못 쓰게 됐어요. 부대로 못 돌아오고 바로 입원했다가 의가사제대를 했죠. 그 친구 이름이 아직 기억나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하는 생각에 죄책감이 많이 들었어요.

2024년 9월 25일, 무기박람회 저항행동 출범 기자회견에 참여 중인 박석진 활동가(가장 왼쪽)
그렇게 힘들게 군 생활을 하다가 결국 1991년에 강경대 열사의 죽음을 계기로 ‘양심선언’을 하셨죠.
제대로 된 군인의 역할을 기대하고 갔는데 상부의 명령이 부당하다고 느껴서 양심선언을 한 거죠.
당시 노태우 정부는 시위에 대해 강경진압 방침을 내렸어요. 그전까지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방식이었는데 1991년 3~4월부터는 전원 검거 위주로 바뀐 거예요. 또 3월에 대학들이 개학하면서 시위도 많이 격화됐어요. 경찰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길에서 잔 적도 많아요. 그러다 보니 시위대에 대한 분노가 축적되는 상황이었죠. 경찰이 점점 더 폭력적으로 진압하니까 학생들의 저항도 점점 강해지고. 강경대를 죽인 부대를 저도 알아요. 같이 작전을 많이 했거든요. 그때쯤 일들은 날짜도 기억하는데요. 4월 18일에 경희대에 진압을 나갔다가 중대원들이 고립되어서 엄청 깨지고 20여명이 입원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한 놈만 잡혀라’ 그렇게 전경들 눈이 돌았죠. 그러다가 4월 26일에 일이 터진 거예요.
오랫동안 고통이 쌓였고 또 엄청난 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양심선언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겠어요. 그 시절에, 게다가 군인 신분으로 그렇게 나서는 건 더 두려운 일이잖아요.
살기 위해서 내린 결정이었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실제로 자살할 생각도 있었거든요. 화장실에서 자해하려고 한 적도 있어요.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어려웠으니까요. 혼자서 많이 외롭기도 했고요. ‘여기 계속 있으면 나를 해하겠다’ 생각하던 차에 사건이 벌어졌어요. ‘아, 이제 경찰이(우리가) 정말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구나’ 싶었죠.
1991년 5월 4일에 당시 강경대 대책위가 있던 연세대에서 양심선언을 했고요. 그 뒤로는 2년 2개월 수배 생활을 했어요. 원래는 바로 부대에 복귀하려고 했는데, 주변에서 말리더라고요. 지금 들어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당시엔 군 의문사도 많을 때였거든요. 나중에 8개월 감옥에 갔고, 나와서는 남은 기간 재복무를 했어요. 그 사이에 제가 있는 중대는 이미 해체됐으니까, 전경으로 복귀한 건 아니고 김포 공항경찰대 소속으로 경계근무를 서다가 제대했어요.
양심선언 이후에는 시위대의 한 사람으로 경찰무기를 마주했겠네요.
양심선언 며칠 뒤에 제가 강경대 열사 노제에서 추도사를 하게 됐어요. 양심선언한 전경의 추도사니까 의미가 있잖아요. 그게 40만 명이 운집한 집회라서, 거기 경찰이 들어와서 절 잡아갈 수도 없을 테고요. 그날 전경이 길목마다 막고 있는데, 3~4일 전까지 내가 있던 위치에 선 전경을 보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어요.

1991년 5월 18일, 강경대 열사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하고 있는 박석진(당시 22살) 일경. 사진: 본인 제공.
시간을 많이 건너뛰어 현재 한국의 무기수출 문제로 넘어갈게요. 경찰무기 수출에 대해서는 처음 알았을 때는 언제였나요?
바레인에 최루탄을 수출해서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이 그에 대응했던 2014년이죠. 소식을 듣고 저는 물대포가 겹쳐보였어요. 우리는 그걸 ‘워터캐논’이라고 불렀어요. 이스라엘에서 도입된 무기였는데, 1991년 처음 현장에 투입했고 마침 그 작전을 우리 부대가 했어요. 시위대 입장에서는 이게 크기도 어마어마하고 수압이 너무 세니까 혼비백산했죠.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그런데 우리가 이제는 다른 나라 시위대에게 새로운 무기를 공급하는 거예요.
저는 그때 상황들이 여전히 뚜렷하거든요. 페퍼포그가 수백 개의 지랄탄을 쏘고 사람들이 도망가고 고통스러워하고. 저도 고통을 겪었죠. 방독면을 쓰지만 전경도 최루탄 연기를 맡아요. 한국은 그런 과정을 아프게 겪은 사회잖아요. 그렇게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진전시킨 나라고요. 그런데 한국은 이제 쓰지 않는 경찰무기를 수출하면, 그 나라에서 고통을 반복하는 거예요. 그런 무기를 파는 건 도의적으로 문제가 크죠.
활동하고 계신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는 ‘군대를 인권과 민주주의, 평화를 위한 군대로 변화시키기 위해 감시와 비판을 하고 긍정적인 부분은 견인하는 활동’을 하는 단체죠. 경찰 또한 군대만큼이나 시민의 민주적 통제가 필요한 집단입니다. 그런데 경찰무기 수출은 시민의 통제는커녕 정부에서조차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시민이 군대를 감시해야 할 이유는, 군대를 그냥 두면 12.3 비상계엄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나기 때문이죠. 여전히 군대는 우리 사회의 성역으로 남아있고 이를 감시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지만, 그래도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경찰무기를 감시하고 통제해야 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생각해요. 비인도적 무기를 팔아서 돈을 버는 나라라면, 그 과정에서 이윤이 좀 생긴다고 해도 저는 ‘내가 좋은 나라에서 산다’고 느낄 수 없을 것 같아요. 우리는 이 공동체에 함께 사니까, 더 성숙하고 멋있는 사회를 만들어야죠.
한국산 시위진압무기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외국의 시민들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고 한국산 경찰무기의 문제점을 처음 접했을 시민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려요.
한국산 시위진압무기가 수출되는 외국의 시민들에겐 그저 죄송한 마음이죠. 이윤을 목적으로 해서 무기를 파는 거고, 그 때문에 그 나라 시민들이 고통을 받는 거니까. 한국 사회에서 시위진압무기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국 공동체에 사는 한 사람으로서 책임감도 느끼고 많이 죄송합니다.
시민들에게는 우리 경험을 되돌아보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시위진압무기는 권위주의적 정부의 탄압도구였죠. 시민의 목소리를 막고 민주주의를 파괴했어요. 우리의 역사를 생각하면서 시위진압무기가 어떤 의미일지 다시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