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작업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지면 습관적으로 SNS를 켠다. 알고리즘은 아주 가끔 새로운 것을 알려주지만, 대부분은 소음덩어리다. 페이스북은 광고로 가득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공개 계정이나 스레드의 게시물을 보라고 들이민다. 유튜브도 마찬가지다. 마음 놓고 웃을 시간도 부족한데, SNS는 자꾸 분노를 부추긴다. 버스에서,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학교에서, 노인이, 장애인이, 애들이, 중국인이…. 나 때는, 우리 때는, 요즘 세상은, 요즘 애들은…. 가십과 소음들은 자연스럽게 ‘화’를 불러일으킨다. 누군가는 이렇게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저런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아야 해.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해야 해. 추방해 버려야 해.
많은 사회과학의 이론적 고전들은 전쟁이 어떻게 세계사의 향방을 결정했는지, 국가는 무엇이고 권력은 무엇인지, 지배와 폭력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논의해 왔다. 이제는 아주 깊은 곳에서 작동하는 감정, 혹은 ‘정동’이라고 불리는 분야까지 확장되었다. 어떤 학살과 추방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감정을 건드리고 증폭시키는 데서 시작한다. ‘평화학’은 어떨까? 정주진의 『평화학』(2022, 철수와영희)에는 머리말부터 “평화학은 평화를 연구하지 않는다”라고 적혀 있다. “평화학은 일반의 이해와는 다르게 평화 자체에 대한 연구와 주장을 학문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럼 ‘평화’를 연구할 수는 없는 걸까? 『비바레리뇽 고원』의 저자 매기 팩슨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현대의 사회과학 연구는 평화보다 폭력에 관한 내용이 훨씬 많다. 평화를 다뤘다고 하는 현대의 실증 연구는 사실상 대부분 갈등에 관한 것이다. 갈등을 해결하고 그 흔적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법이나, 갈등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프로그램 같은 것들. 전반적으로 이 문헌들은 수백만 명의 고통과 비탄을 가리키는 한에서만 평화를 다룬다.
(…)
나는 묻기 시작했다. 평화는 왜 그렇게 연구하기 어려울까? 아니면 반대로, 폭력은 왜 그렇게 연구하기 쉬울까? (17-18)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
『비바레리뇽 고원』은 매기 팩슨이 ‘평화’를 연구하기 위해 프랑스에 있는 어떤 고원에 방문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고원은 오래전부터 개신교도라고 박해를 받으면서도 외지인들을 보호해 왔다. 16세기 프랑스 종교전쟁 때는 개신교도를, 프랑스혁명과 공포정치 하에서는 가톨릭 신부들을 보호했고, 산업혁명 시기의 도시, 알제리 전쟁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엔 유대인과 여러 난민, 정치적 부랑자들을 보호했다(67쪽).
‘세베놀 스쿨’과 여러 보호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망명 신청자 환영 센터 CADA가 존재한다. 폭력을 피해 낯선 땅에 당도한 사람을 꾸준히 보호해 온 이곳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 매기 팩슨에게도, 그가 쓴 글을 읽는 나도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평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폭력이 아니라, 무엇이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지 알 수 있을까?
사회학을 공부하는 나에게 ‘무엇이 가능한가’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가’와 같다. 이곳과 저곳은 무엇이 다른가? 인종, 민족, 국적, 종교, 젠더, 계급, 가족, 제도, 경제, 정치집단, 군사력, 정부 형태 등 수많은 비교 목록이 작성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이 안에서 어떤 행동을 취하는지 관찰한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할 때만 해도 나는 이러한 비교 목록, 비바레리뇽 고원의 독특한 제도와 정치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사회과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저자는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시작한다.
그러면,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할까요?
이것이 바로 모든 사회과학이 던지는 질문의 토대라고 할 수 있어요. (135)
이 질문은 책 전체를 관통한다. 고원의 자연환경이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거나, 혹은 기독교의 교리가 선함을 행하게 했을 것이라는 가정들은 의미가 없다. 왜 고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난민을 보호하고, 길잃은 아이들을 거둬들여 키웠을까? 마을에 낯선 이들이 돌아다니고, 또 그 도망자들을 쫓아 경찰과 군인이 들쑤시고 다녀도 왜 그들은 박해받는 자들을 돕기를 주저하지 않았을까? 내가 ‘이곳과 저곳은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을 먼저 떠올렸다면, 팩슨은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안한다.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
비바레리뇽 고원은 천국이나 지상 낙원이 아니다. 외부와 단절된 세계도 아니다. 지리적으로 조금 외딴 곳에 있는 프랑스의 한 지역일 뿐이다. 이곳 사람들은 남을 돕는 것을 습관적으로 실천한다. 하지만 낯선 이들이 계속 당도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예측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가 누구인가? 이 사람은 누구일까? 이 사람은 이곳에 ‘어울리는’ 사람일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바레리뇽 고원에 몸을 숨길 수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피란뿐만 아니라 징집을 피해 도망친 남성들도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고원의 비폭력 철학이나 선함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치 점령기 당시 비시 경찰이 고원을 습격해 사람들을 잡아갔다. 누군가는 복수심에 불탔고, 어떤 무리는 고원으로 와 한 카페에 있던 경찰서장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리고 초월적일 만큼은 아니었어도 탁월하게 비폭력을 실천했던 르 샹봉과 고원의 명성도 함께 쓰러졌다.”(285)
또 팩슨이 고원에 도착하기 몇 달 전에는 세베놀 스쿨의 한 남학생이 같은 학교 여학생을 잔혹하게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살인은 고원이 아니더라도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것이 고원을 이해하는 데 큰 중요성을 차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팩슨은 “힘든 시기의 모순을 무시하지 않고, 살인 같은 것들을 무시하지 않고, 내 작업에서 너무나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고”(275) 호소했다. 모두를 받아들인다는 것. 그가 누구인지 묻지 않는다는 것. 그건 항상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팩슨의 혼란 섞인 호소에 고원의 교사인 상드린이 한 말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게 아쾨유accueil(수용)예요.” 상드린이 말한다. “알겠어요? 그게 바로 사람을 수용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예요. 누군가가 문간에 나타나고 그 사람을 집 안에 들이면 가끔은 나쁜 일도 일어나요. 원래 그런 거예요.”
“그러니,” 상드린이 잠시 멈췄다가 말한다. “믿음을 가져야 해요.”
상드린은 이제 말이 없다. 나도 말이 없다. 상드린이 다시 난롯불에 담뱃재를 턴다. 불길이 상드린의 안경에 반사된다.
“하지만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상드린이 거실의 어두컴컴한 한쪽 끝을 가리킨다. 마치 그곳이 어둠의 존재로 가득할지 모를 문턱의 건너편인 것처럼. “결국에는 올바른 일이 벌어지리라는 믿음이 필요해요. 상황이 마땅하게 흘러가리라는 믿음이요.”(275, 강조는 인용자)
상드린의 말은 ‘환대’의 의미를 정확하게 짚어낸다. 우리는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두려으므로 우리는 그의 행적을 조사하고 정신을 검사하고 생각을 검증하고 싶어 한다. 그 대신 상황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만약 올바른 일이 벌어지지 않고, 상황이 마땅하게 흘러가지 않는다면? 그러한 믿음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치가 득세하던 시절처럼 오히려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는다면? 경찰이 고원을 습격해 아이들을 사랑해 마지않던 다니엘 트로크메와 청년들을 체포한다면? 그래서 그들이 수용소를 전전하며 고통을 받는다면? 팩슨은 그 낙관적 믿음으로 충분한지 고민하며, 소설가 알베르 카뮈가 고원에 머물렀던 사실을 상기한다. 도시가 폐쇄되고 여러 인간군상이 펼쳐지는 전염병의 현장에서 “카뮈는 소설 『페스트』에서 상황이 마땅히 흘러가기를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숙달된 체념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체념 뒤에는 겸손이, 그 겸손 뒤에는 굴욕이 있다고 말했다.”(298)
그렇다면 무엇이 선을 행하게 만드는가?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다니엘 트로크메의 시점에서, 현재는 자신의 시점에서 계속 교차해가며 이야기한다. 다니엘은 엘리트 가정에서 자랐지만, 전쟁으로 치닫는 유럽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매다가 구조 및 보호 활동을 도와달라는 사촌의 편지를 받고 비바레리뇽 고원으로 떠났다. 트로크메는 동료와 함께 그곳에 ‘세베놀 스쿨’이라는 학교를 세웠다. 이 학교는 비폭력과 환대, “고통받는 사람들을 수용하고, 이들을 평화라는 대의에 끌어들이고, 적조차 신이 만든 피조물임을 가르”(125)쳤다. 트로크메는 고원에서 아이들을 보호하고 가르치며 그들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독일군에게 붙잡혀 수용소로 끌려갔을 때도 아이들에 대한 걱정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아이들이 어떤 모습이든 말이다. “밤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문 뒤에 누가, 또는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했음에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문을 열어주었다. (…) 비록 그 사랑이 언젠가 한 학생이 입학해 다른 학생을 죽일 수 있다는 뜻일지라도.”(510)
이 책의 제목처럼 팩슨은 ‘선함의 뿌리’를 ‘사랑’에서 찾는다. 단지 상황이 잘 흘러가기를 기도하기보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이제 팩슨이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를 책 전체에 걸쳐서 반복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누가’는 신원을 묻지 않는다. 단지 ‘누구와 무엇을 하는가’라는 행동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인종도, 민족도, 국가도, 종교도 없다. 단지 한 사람이 문을 두드릴 뿐이다.
저는 유대인이 아니라 한 소년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연약한 유대인이 아니라 연약한 소년을, 보호가 필요한 소년을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약간 건방지긴 하지만 정직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우 전복적인 설명이기도 했다. 심문이 이뤄지는 그 명백한 진실의 순간에, 우리는 인종이나 국가나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할 줄 아는 다니엘의 영혼이 있었다. (293)
결함 있고 거칠거칠한 평화
사실 선함의 뿌리에 ‘사랑’이 있다고 말하는 건 조금 진부한 느낌도 있다. 거의 모든 종교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그런 종교들이 때로는 전쟁의 선봉에 나선다는 것도 사실이다. 왜 이 가르침은 쉽게 실현되지 못할까? 누군가는 전쟁과 폭력, 증오가 인간과 집단의 본성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평화는 전쟁 사이의 막간을 의미할 뿐인가? 아니면 영원히 손에 잡히지 않는 공상 속 세상일 뿐인가?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신성함’이 집단의 주기적인 의례 안에서 강화되고 수정되며 생겨난다고 보았다. 원시 종교 속에서 발견된 ‘신성함’은 현대 사회의 근본에 자리 잡았고,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원화되면서 차이가 증대되어도 우리가 사람이라는 하나의 사실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매개할 것이라고 보았다. 종종 뒤르켐을 인용하는 팩슨은 이러한 뒤르켐의 통찰을 염두에 두고 있다. 비바레리뇽 고원이 그 자체로 신성한 공동체인 것이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자를 가리지 않고 도우려는 실천들, “주먹을 계속 되받아치는 것으로는 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면, 그러나 세상을 바로잡고 싶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아이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이라고 대답하는 것,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박대하지 않는 ‘습관’들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비바레리뇽 고원은 박물관에 박제된 전설 속의 공동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곳이다. 복수를 위해 총격이 일어나고 누군가가 다른 이를 살해해도, 거기서 정말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겠는 와중에도 계속되는 것이다. 팩슨은 평화를 이렇게 이해해 보자고 제안한다.
먼저 평화를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으로, 시작이나 끝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펼쳐지는 것으로, 높은 하늘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땅과 상호작용 속에 있는 것으로, 완벽한 것이 아니라 결함 있고 거칠거칠한 것으로 말이다. (20)
이전에 썼던 글에서는 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냉소’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러나 평화가 단지 이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펼쳐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이 화를 부추기는 소음들, ‘우리’의 안전을 위해 ‘저들’을 선별하고 추방하자는 말들, 타인을 증오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하지만 거기서 평화가 끝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사랑’은 우리가 남을 신뢰하고 아끼는 마음일 수도 있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문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내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고, 나를 불쾌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문을 열어주는 것, 도망쳐온 사람이 이 공동체에서, 사회에서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있는 것. 그가 사랑받고 사랑할 가능성을 주는 것. 그것이 사랑, ‘환대’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알려면,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