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선 (폭력에 반대하며 비건 실천을 하고 있는 청소년인권활동가)
2025년 평화캠프의 주제는 “그날, 우리가 계엄을 막지 못했다면”이었다. 첫날 우리는 피디수첩 영상을 보며 계엄 하의 대한민국을 상상해보았다.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웃음이 터지기도 했지만,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허술함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저항과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한 웃음이었다. 동시에, 그 웃음 뒤에는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위기와 두려움이 겹쳐 있었다.
활동을 하다 보면 우리의 이야기와 경험에만 집중하게 되기 쉽다. 그런데 이번 캠프에서는 ‘쿠데타 분석하기’시간을 통해, 쿠데타 세력의 목표와 전략을 짚어보는 연습을 했다. 단순히 시민의 입장에서 대응만 상상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잡으려는 세력이 무엇을 노리는지를 분석하니, 우리의 대응 방식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은, 실제 역사 속 쿠데타가 반드시 성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약 400건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한 것은 절반에도 못 미쳤다. 실패의 이유는 다양했다. 군 내부의 균열, 국제 사회의 압력, 무엇보다도 시민사회의 저항이 있었다. 앞으로도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시민의 힘과 국제적 감시망이 강화되면서, 쿠데타가 더 자주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품게 되었다.
본격적인 롤플레이에 앞서 우리는 신속한 의사결정 훈련을 진행했다. “대규모 집회를 기획했는데, 군대를 동원해 해산한다는 첩보를 2시간 전에 입수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시나리오가 주어졌다. 제한된 시간 안에 전략을 세워야 했던 우리는 각기 다른 답을 내놓았다. 어떤 참여자들은 예정대로 집회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참여자들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집회를 아예 취소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흥미로웠던 점은, “시민들의 안전이 우선이다”라는 공통된 원칙은 공유하면서도 구체적인 판단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안전을 위해 집회를 멈추어야 한다고 말했고, 또 다른 이는 안전을 지키려면 오히려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같은 가치를 두고도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음을 몸소 경험한 순간이었다.
이후 이어진 하이라이트는 쿠데타 상황 롤플레이였다. 참가자들은 네 가지 역할로 나누어졌다. 강경한 변화 추진 세력, 이에 저항하는 강경한 민주주의 수호세력, 상황을 관망하는 일반인들, 그리고 위기에 처한 현 정부 세력. 각자의 역할을 맡아 대화를 주고받으며 상황을 풀어가는 과정은 마치 실제와도 같았다. 누군가는 시민들을 거리로 모으려 했고, 누군가는 체제 유지와 협박을 시도했다. 또 누군가는 망설이며 관망하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선택해야 했다. 그 긴장과 갈등 속에서 “시민저항”이라는 말이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현실적인 선택지로 다가왔다.
무엇보다도, 이 롤플레이는 단순히 같은 상황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각 팀에게 주어진 브리핑 종이가 달랐다. 동일한 현재 상황 속에서도 각자가 가진 자원, 제약 조건, 승리 조건, 전략 방향이 조금씩 달랐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른 해석과 선택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팀원들 사이에서 “우리가 가진 조건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팀과 협상하거나 설득을 시도하게 되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상황에서 누구를 설득할 것인지, 어떤 언어로 접근해야 할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나의 주장을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조건과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설득이 가능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저항’은 고립된 개인의 결단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조율하며 함께 전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몸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배웠다. 저항은 특별한 순간의 용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두려움을 다루는 평소의 연습, 서로에 대한 신뢰, 그리고 비폭력적 대응을 실제로 시뮬레이션해보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쿠데타라는 거대한 위기 앞에서도 시민들이 움직일 수 있는 힘은 바로 그런 준비된 연습과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을, 이번 롤플레이가 보여주었다.

쿠데타 롤플레잉 게임 상황판
캠프를 마치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내 앞에 실제로 닥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이번 경험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게 만들었다. 결국, 쿠데타를 막는 힘은 시민 개개인의 결단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이 모여 신뢰와 연대의 망을 이루어야 비로소 현실적 힘으로 발휘된다. 이번 평화캠프는 그 가능성을 직접 체험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이번 캠프가 이렇게 밀도 깊고도 안전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참여자들의 민감함 덕분이기도 했고, 캠프를 준비한 이들이 미리 마련한 생활 규칙 정하기, 홈그룹 활동과 같은 장치들 덕분이기도 했다. 이런 장치들은 우리가 서로를 더 세심히 살피고, 안심할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었다. 활동이 끝나고 서로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시간에는 다들 나에게 돌봄과 다정함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해주었다. 작은 메모 하나, 짧은 문장이 주는 따뜻함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비폭력의 힘은 거창한 구호나 드라마틱한 순간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것은 일상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 태도, 누군가의 마음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는 감수성, 서로를 돌보며 지켜내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번 평화캠프는 나에게 “비폭력은 이상이 아니라 생활 방식”이라는 사실을 다시 새겨주었다. 앞으로 내가 마주할 크고 작은 갈등 속에서도, 이 감각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