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스페인 워게임 디자이너 하비에르 로메로가 올해 발표한 2인 전략급 워게임 <보스니아 전쟁 Bosnian War: 1992-1995>이 문제의 게임이다. 전쟁에서 ‘부수적 피해’를 묘사하는 수준을 넘어, 전술로서 전쟁범죄를 허용하는 보드게임은 처음인 듯하다.
“이 게임에서 적 민간인은 부수적 피해의 희생자가 아니라 표적이 되므로, 마을과 도시를 정복하고 인종청소를 자행하는 것이 게임의 핵심 요소입니다.”
– 규칙서, 1.0 소개
유닛이 이동 및 전투 후 진격을 통해 다른 민족 집단의 다수 인구가 거주하는 헥스에 진입하면 ‘인종청소’를 수행할 수 있다. 이 경우 일정 이동점수(MP)를 소모하거나 주사위 굴림에 성공하면, 해당 헥스에 인종청소 마커를 배치하고, 대상 민족 집단의 난민 수준이 증가한다. 이는 적 보급원 차단 등의 효과가 있고, 난민 수준은 나토 개입과 게임의 조기 종료 및 최종 승점 계산에 영향을 미친다.
이는 1차 대전 배경의 보드게임 <패스 오브 글로리 Paths of Glory>에 ‘벨기에 학살(Rape of Belgium)’이 연합국 이벤트 카드로 등장한 것과 전혀 다른 맥락이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하면서 민간인을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운 것은 전쟁의 남은 기간 동안 독일군을 ‘훈족’으로 악마화한 연합국 프로파간다의 단초를 제공했다. 반면 <보스니아 전쟁>은 전쟁범죄를 합리적 전술로 재현한다.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인구가 표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플레이어들이 그 사실을 직면하길 바랍니다. 인구가 표적이 된 이유는 수세기에 걸친 비이성적인 ‘고대의 증오’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위자들의 합리적 결정의 결과였으며, 또한 여러 평화 계획이 국가를 민족별로 분할하는 것을 상정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더 큰 몫을 차지하기 위해 가능한 한 ‘인종적으로 순수한’ 영토를 확보하는 것이 합리적이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도착적이라 해도, 인종청소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었습니다.”
– 하비에르 로메로, 작가 인터뷰 (The Players’ Aid)

보드게임 <보스니아 전쟁> 표지
사례1: 게임이 폭력이 될 때 – 인종청소
<보스니아 전쟁>을 아래의 의미에서 단순히 ‘폭력적인 게임’이 아니라 그 자체로 정서적·문화적 폭력으로 볼 수 있을까?
“게임이 그 자체로 혐오표현이자 폭력인 경우도 있다. … 이 글에서 말하는 ‘폭력적인 게임’은 <인종청소>처럼 표현물로서 그 자체가 현실에서 정서적·문화적 폭력을 행사하는 게임이 아니라, 단지 매체로서 폭력을 묘사하거나 플레이어로 하여금 가상의 폭력 행위를 수행하게 하는 게임을 말한다. 이 두 범주가 칼 같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전자는 혐오표현처럼 사회적·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이나 소수자를 표적으로 삼는다고 거칠게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 쥬, 평화주의자는 게임에서 총을 쏠 수 있는가 (GG Vol. 25)
<인종청소 Etnic Cleansing>는 미국의 극우단체 국민동맹(National Alliance)이 2002년에 발매한 비디오게임이다. 이 FPS(1인칭 슈팅게임)에서 플레이어는 네오나치 스킨헤드나 KKK 단원이 되어 흑인, 유대인, 라틴 아메리카인을 학살해야 한다.
<보스니아 전쟁>은 노골적인 조롱과 혐오 선동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게임은 아니라는 점에서 <인종청소>와는 맥락이 다르다. 그럼에도 “사회적·역사적으로 억압받아 온 집단이나 소수자를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위 기준에 정확히 부합한다. 더구나 아직 생존자들이 살아 있는 상처가 아물지 않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다.

비디오게임 <인종청소> 플레이 영상 캡처
사례 2: 전쟁 속 민간인의 시선 – 디스 워 오브 마인
보스니아 전쟁을 언급하자니 보드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This War of Mine>과 동명의 원작 비디오게임을 빼놓을 수 없다. 이 게임은 가상의 동유럽 국가 그라츠나비아의 도시 포고렌을 배경으로 하는데, 그 모티브가 보스니아 전쟁의 사라예보 포위전이다.
이 게임이 다른 게임들과 차별화되는 점은 플레이어가 군인이 아닌 민간인의 입장에서 전쟁 속에 내던져진다는 점이다. 게임에 대한 자세한 설명 대신 사라예보 포위전 생존자의 후기 일부를 옮긴다.
“나는 종종 “전쟁 당시 삶이 어땠나요?”라는 질문을 받는다. 여기에 말로 답하는 것으로는 진실을 전달할 수 없다. 이제부터 나는 그 질문을 받으면, 자리에 앉아 물어본 사람과 이 게임을 한두 라운드 플레이할 것이다. … 이렇게 마치겠다. 만약 당신이 전쟁과 살인이 재밌을 것 같다고 혹은 재밌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디스 워 오브 마인>을 해보라. 물론 게임은 재밌겠지만, 동시에 전쟁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게 될 것이다.”
– 야센코 파쉬츠(쥬 옮김), 디스 워 오브 마인 – 사라예보 포위전 생존자의 후기 (전쟁없는세상 블로그)
이 점에서 <보스니아 전쟁>과 <디스 워 오브 마인>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다. 하나는 같은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군인의 입장에서 직접 수행하는 게임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인의 입장에서 이겨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두 게임의 대비는 역사 내지 전쟁의 재현에서 무엇을 누구의 시점으로 보여줄 것인가가 어떤 차이를 낳는지 보여준다.

보드게임 <디스 워 오브 마인> 게임판
사례 3: 식민 지배와 인종주의 – 푸에르토리코와 조선
한편 전쟁과는 다른 인종주의적 폭력의 사례로 <푸에르토리코 Puerto Rico>가 있다. 이 게임의 유명한 ‘노예’ 토큰 논란을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스페인의 푸에르토리코 식민 지배를 주제로 하며, 플레이어로 하여금 식민 지배자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게 한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이것도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정서적·문화적 폭력일까? 와 닿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예시는 어떨까?
“여러분은 20세기 초의 일본인 지주이다. 여러분과 경쟁자들은 기회의 땅 조선으로 앞 다투어 건너가 불하받은 토지에 쌀과 대마, 면화, 인삼을 재배한다. 수확된 쌀과 가공된 삼베, 면직물, 한약은 다시 선적하여 내국으로 수출한다. 보다 원활한 생산과 유통을 위해 여러분은 조선에 시장과 창고, 관청, 학교, 항구, 수공업 공장을 건설한다. 총독과 다양한 역할들의 특권을 활용해 수탈과 개발로 가장 많은 부와 명성을 얻은 사람이 승리한다.”
– 쥬, 푸에르토리코와 조선 (전쟁없는세상 41호)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조선을 식민 지배하는 게임이 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런 논쟁 속에서 <푸에르토리코>는 결국 20주년을 맞아 스페인으로부터 해방된 푸에르토리코를 배경으로 <푸에르토리코 1897>이라는 새로운 제목으로 재판되었다.
전쟁이나 식민 지배 같은 민감한 주제를 게임이 다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일 것이다. “그저 게임일 뿐”이라는 말로 모든 맥락을 지워버리는 태도야말로 경계해야 한다. 중요한 건 불편한 현실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것이다.

보드게임 <푸에르토리코> (출처: meeplemountain)
사례 4: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 홀로코스트 열차
현실의 살인과 전쟁은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하지만, 게임에서 살인과 전쟁은 대개 사회적으로 용인된다. 실제 살인과 가상 살인이 다르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게임에서 가상 인종청소와 가상 노예 무역을 허용해야 할까? 나아가 게임에서 가상 소아 성폭력을 허용해야 할까?
Luck(2009)는 게임에서 ‘가상 살인’과 ‘가상 소아성애’를 구분하는 몇 가지 윤리적 논증을 시도한 바 있다. 사회적 용인도, 현실에 미치는 영향, 플레이의 목적, 피해 집단의 특정성, 어린이의 특별한 지위 등을 검토했지만, 그중 무엇도 명쾌한 논거는 아니라고 봤다. 우리는 대체 어디에 ‘선’을 그어야 할까? 나치 홀로코스트는 게임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미국 게임 디자이너 브렌다 로메로가 2009년에 만든 실험적 보드게임 <열차 Train>에서 플레이어는 알 수 없는 목적지로 승객을 수송한다. 게임의 마지막에 그 목적지가 나치 강제 수용소로 드러나면서, 플레이어는 자신이 홀로코스트에 공모했음을 깨닫는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홀로코스트 공모의 감각을 직면하게 하려는 분명한 의도를 갖고 있다. 어쩌면 <보스니아 전쟁>의 윤리적 스펙트럼은 <열차>와 <인종청소>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할 것이다.

보드게임 <열차> (출처: wired)
결론 – 달리는 열차 위에 중립은 없다
<보스니아 전쟁>에서 ‘인종청소’는 단순한 보상 메커니즘은 아니다. 이를 실행하려면 행동력을 소모하거나 주사위 굴림에 성공해야 하며, 병력 손실이나 무력 개입 가능성 같은 불이익도 뒤따른다. 즉, 인종청소가 반드시 이익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승점 계산과 승리 조건이 인종청소를 통한 영토 확보와 난민 발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문제적이다. 이는 전쟁범죄가 전략적으로 유효한 선택지라는 인식을 심어 줄 위험이 있다.
또한 게임은 군대와 가해자의 시점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 학살과 성폭력 피해자, 강제 이주자 같은 개인 수준의 고통과 목소리는 배제되어 있다. 이 작품이 생존자, 유족, 역사학자, 활동가 등 당사자와 전문가의 검토를 거쳤다는 언급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부재는 트라우마를 되풀이하거나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역사를 재현하는 순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누구의 입장에서 서술할지를 선택한다. <보스니아 전쟁>은 그 선택의 결과로 불편한 질문을 남긴다. 이 게임은 잔혹한 현실을 직시하려는 시도일까, 아니면 전쟁범죄를 전술로 합리화하는 문화적 군사주의의 단면일까?
분명한 것은 게임 디자인의 선택에 중립은 없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집단학살 같은 전쟁범죄가 횡행하는 시대에, 전쟁범죄를 플레이 가능한 선택지로 만드는 순간 작가는 모종의 선언을 한 셈이다. 그리고 게임은 언제나 플레이와 비평을 통해 완성되는 끝나지 않은 창작물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이 게임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쟁을 기억하고 평화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윤리적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