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란 (비건퀴어에코페미니스트)
올해 2월, 나는 제주도 강정마을에서의 약 3년간의 생활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이다. 서울의 대학원생이 된 내 일상은 강정마을의 인간띠잇기와 강아지 산책, 약간의 유급 노동 정도가 일상의 전부였던 제주의 삶에서 송두리째 바뀌었다. 바닷내와 바람 소리가 가득하던 제주와 달리 서울은 경적과 온갖 소음으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큰 회색빛 도시였다. 길거리에 나서는 것부터가 체력을 앗아가는 일이었다. 일상도 서울의 거리만큼이나 번잡스러웠다. 온갖 어려운 이론과 토론이 고농축된 수업과 과제(논문 읽기와 글쓰기)가 이어지고, 장학금을 벌기 위해 학과 조교 업무를 맡는 동시에, 영어 과외와 프리랜서 에디터로 생활비도 벌게 되었다. 공부와 노동으로 충분히 바빴지만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취미인 독서, 폴댄스, 그리고 애인이나 친구와 나들이도 이어 나갔다. 정신없는 생활을 이어가면서 몸은 자꾸만 위급 신호를 보내왔다. 구내염은 물론이고 감기 몸살, 공황 장애가 빈번히 찾아왔다. 첫 대학원 학기와 서울 생활에 적응하느라 더 애를 쓴 봄과 여름에는 수액까지 종종 맞아야 할 정도였다. 골골거리는 몸과 모든 것이 벅차게 느껴지는 마음,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내 몸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쉬어야 했다.

차 한 잔과 잔잔하고 달콤한 휴식
하지만 나는 ‘쉬는 법’을 모른다. 정확히는 ‘잘’ 쉬는 법을 알지 못한다. 생산성 중독이랄까. 약간의 여유가 생겨도 가만히 있질 못한다. 수년째 투두리스트 앱 ‘투두메이트’를 애용하고 있는 나는 과장해서 말하면 투두리스트의 체크박스를 채우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투두리스트에 집착한다. 하루에 수십 번 앱에 들락날락하고, 해야 할 일이 남아있는지 재차 확인한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므로, 느긋하게 한숨 돌릴 순 없다. 계속 나아가야 한다. 재깍재깍 흘러가는 시계에 맞춰 나의 몸-마음을 훈련하고 통제한다. 누군가는 계획적이고, 성실한 나를 부러워하곤 한다. 나도 이런 내 성향에 자부심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피곤함에 무거운 어깨와 언제나 무언가에 쫓기는 듯 불안함에 울렁거리는 심장을 새삼스레 감각할 때, 그 어떤 이보다 내가 자신을 채찍질하고, 갉아먹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그제야 비명에 가까운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 풀썩 드러눕는다. 멍때리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 싶은 바람도 몇 초 가지 못하고 이내 스마트폰을 들어 연예인 가십거리가 가득한 유튜브 쇼츠와 릴스를 주구장창 넋 놓고 보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투두리스트가 강박적으로 떠오르고, 나는 전혀 쉰 것 같지 않은 찌뿌둥함으로 다시 자리에 앉는다. 사라지지 않는 피로와 헛헛한 마음. 어지러운 마음에 질문이 맴돈다. 도대체 어떻게 쉬어야 할까?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휴식이 곧 낙오와 실패를 뜻하고, 쉬는 것도 자기 계발의 일종으로, 생산적이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사회에서 우리는 어떻게 쉴 수 있을까?
“몸은 해방의 장소다.
자본주의의 것이 아니다.
몸을 사랑하자.
몸을 쉬게 하자.
몸을 보듬자.”
진정 나를 위한 쉼이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며 달려온 나는 홀린 듯이 책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미국의 흑인 여성 예술가이자 신학자인 트리샤 허시(Tricia Hersey)의 『휴식은 저항이다』(장상미 역, 갈라파고스, 2024). 표지를 넘기자마자 나온 위의 문장들에 울컥했다. 나처럼 지금 이 문장들을 읽고 가슴에 뭔가 울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잠시 멈추어야 한다. 낮잠을 자야 한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뱉어야 한다. 답답하고 억눌린 교실과 시험공부에서 벗어나고 싶은 학생, 투잡, 쓰리잡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자, 업무가 쌓인 사무실에서 끈덕진 피로와 가슴 통증을 느끼는 직장인까지. 우리는 모두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아니, 휴식을 취해야 한다.
트리샤 허시는 자신을 ‘낮잠 사역단’의 ‘낮잠의 주교’라 칭한다. 가난한 흑인 여성으로서 그는 유급 노동과 공부, 가사 노동과 양육을 해내느라 쉴 새 없이 일해왔다. 어느 날, 그는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이러한 ‘과로 문화’를 추동하며, 스스로를 혹사함으로써 그에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를 탈진시키는 이 문화에 대항하여, 허시는 2017년부터 집단 낮잠 체험을 열기 시작했고, 피로에 찌든 많은 이들이 낮잠이라는 ‘영적 수행’에 참여했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처럼 돌아가는 일상에서 잠시 피신하여 자기 몸을 편히 누이기. 스스로에게 ‘이대로도 충분하다’고 속삭이고 토닥여주기. 천천히 숨을 쉬며 몸-마음의 상태에 귀 기울이기. 이러한 행동, 즉 ‘휴식’은 허시에게 “자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를 뒤흔들고 밀쳐내는 하나의 저항”(30)으로서 유효하다. 따라서 휴식의 필요성은 개인 차원을 넘어서며, “급진적인 공동체 돌봄”(34)의 가치도 지니고 있다.
허시에게 휴식은 “목숨이 달려 있다는 듯이 쉬어야”(81) 하는 것이다. ‘도망노예’의 후손으로서 그에게 이 말은 문자 그대로다. 흑인 노예 제도가 있었던 과거 미국에서 노예가 된 사람들은 뙤약볕 아래에서 하루에 스무 시간씩 잔혹하고 착취적인 플랜테이션 노동에 시달렸다. 존엄성을 짓밟는 극심한 과로에 내몰리던 흑인들 중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이들이 있었다. 이들은 생존을 위해, 노예제에 저항하고 항거하기 위해 도망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노예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 백인 우월주의와 플랜테이션은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여전히 건재하여, 우리를 철저하게 착취하고 있다. 흑인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몸을 단지 수익을 창출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소진시키고 있다.

강원도 인제의 자연에 온전히 머무르는 중이다.
도망노예의 증언에서 허시는 “나는 그저 폭력적인 체제 속에서 자신을 혹사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음”(83)을 깨닫는다. 그에게 과로 문화는 곧 폭력이다. 우리가 과거 백인우월주의와 식민주의를 제대로 청산하고 성찰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우리(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다고 하더라도)는 스스로조차도 억압하고, 그럼으로써 타인, 나아가 공동체의 해방을 위협하는 데 기여한다. 그의 말대로, “소진되고 쫓기고 지친 상태로 어떻게 해방된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한 일이다.”(149) 그는 우리에게 도망노예가 되자고, 다시는 노예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자고 외친다. 미국의 흑인 여성으로서 그는 휴식으로써 자신이 보고 싶은 세상을 구축하고자 한다. 폭력적인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해방을 실현하기 위해 기꺼이 휴식한다.
자, 이제 휴식의 정치적 의미는 잘 알겠다. 그렇다면 내가 처음에 던진 질문, 구체적인 쉼의 방법은 무엇일까? 허시가 제안하는 휴식은 웰니스 산업이 보여주는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돈이 많고,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를 팽창시키는 소셜미디어에 접속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휴식의 힘을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대중교통에서 잠시 눈을 감고 차분히 호흡하는 것에도 평화의 에너지가 깃들어있다. 아래 이미지에 있는 목록과 같이 그가 그리는 휴식의 모양은 단순하지만,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정될 만큼 효과적이다. 역동적이면서도 고요하고 아름답다. 자본의 에너지와는 정반대다. 그렇게 휴식은 우리가 세상과 온전히 연결되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고 구축할 힘을 회복시킨다. 북돋아 준다.

(출처: 알라딘 책 소개)
휴식은 지금 해야 할 일을 당장 다 때려치우고 어디론가 도망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물론 상황에 따라서 그것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보다는 상상하는 것이다. 자유롭게 길을 누비는 것이다. 해방을 향한 방향은 잃지 않으면서 계속 방황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도 나의 일상은 이전과 같이 이어질 것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도, 지친 날도 있을 테다. 숏폼을 틀어놓고 도파민에 몸을 내맡기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생산성이 곧 나의 가치를 증명해 주지 않음을 마음에 새긴다. 부족해 보여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고 나를 보듬는다. 스스로를 보채지 않고, 부담스러운 일은 거절한다. 아직 어렵지만 버스와 지하철에서 잠깐 눈을 감곤 한다. 공들여 호흡한다. 감사 일기를 쓰고, 자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친구들과 만날 때는 그들의 존재에 오롯이 집중하는 진한 시간을 만든다.
이런 작은 실천들 속에서 터득한다. 휴식은 사랑을 품고 있구나. 사랑을 향하고 있구나. 나를 사랑하는 법을 익히고, 함께 지내는 애인, 친구, 가족, 동료를 고유한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 위한 수행이구나. 억압적인 체제에 절망적으로 지친 이들과 연대하기 위한 사랑의 힘을 기르는 실천이구나. 결국 온 세상 사람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사랑을 보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구나. “몸을 그저 이용하고 소유할 도구로만 여기는 곳에서 자신과 타인을 향하는 급진적인 사랑”(150)으로서의 휴식. 그러니 우리는 당당히, 충분히 쉬어도 된다. 쉬자. 그냥 있자. 이 글을 읽는 이에게, 평온하면서도 뜨거운 사랑이 담긴 휴식을 선물하고 싶다.
추신. 이 책과 함께 제니 오델(Jenny Odell)의 책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법』(김하현 역, 필로우, 2023)도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