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우(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시중에는 군대 경험을 다룬 책들이 많다. 2000년 이후만 세어도 100여 권이 넘는다. 대부분 군복무가 자기 인생에 얼마나 빛나는 순간이었는지, 그 경험이 자신을 어떻게 긍정적으로 변화시켰는지, 보람찬 군 생활을 보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조언하는 내용이다. 병사, 장교 할 것 없이 모두 군대와 군 생활을 칭송했다. 어떤 특수부대 출신 군인은 <설움많은 평화시대 군인>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책머리의 제목을 보자. “전투도 못해 본 군인이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전쟁을 안다는 것
“나 역시 전쟁을 모른다. 어쨌든 전쟁을 직접 겪어보진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을 두려워할 만큼 충분히 ‘약해져 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과 다르다. 나는 불가역적으로 망가져버린 내 신체기관을 더는 학대하지 않기 위해 전쟁에 반대한다. 그저 남은 청각세포들의 안녕을 도모할 수만 있다면 다소의 굴종—’그들’이 질색해 마지않는—이라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맞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세속적인 이유로 평화를 ‘욕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평화는 ‘가짜’인가?
아니, 나는 고통을 두려워할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최고의 심리적 방어기제라고 믿기에 이 책을 쓰는 것이다.”(20)
최우현은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에서 이렇게 쓴다. 저자는 ‘평화시대’의 군인이다. 포병장교로 근무하며 청각이 손상되었다. 어쩌면 단순한 ‘산재’, ‘직업병’일 수도 있다. 저자는 평시 훈련만 해봐서 전쟁을 모르는 것일까? 저자는 몸이 내지르는 비명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매일 따라다니는 이명 속에서 저자는 피투성이가 되고 부서지기 쉬운 몸들을 발견한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평화의 발’에서, 살인에 주저하며 차마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전장의 군인들로부터, 자살 공격을 강요당한 ‘육탄’들을 자발적인 영웅으로 만드는 ‘전쟁신학’으로부터 ‘전쟁’의 진실을 보려고 노력한다.
평화시대의 군인은 설움을 느낀다. 전쟁을 못 해봐서가 아니라, 주변 세계가 폭력으로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이 책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군대를 바꾼 건 군대가 자기 삶을 바꾼 이들이 아니라 군대가 자기를 찰흙처럼 마음대로 빚어내려는 데에 나름대로 저항하고 부적응한 이들이었다. 전쟁을 아는 이는 ‘전쟁을 해본’ 사람들이 아니라, 혹은 전쟁이 필요하다는 선전가들의 입이 아니라, 실제로 전장에서 고통받는 이들이다. 저자는 그런 고통을 두려워 하는 ‘겁쟁이’들을 찾아 나선다.
나는 조금씩 천천히, 전쟁의 이면을 훑어가며 나와 비슷한 신경줄을 가졌던 ‘겁쟁이 군인’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이 겪은 정신적 고통 속에 나의 불안과 공황을 의탁하고 때로는 서로의 혼미를 공유해보기도 하며 위로받고 싶었던 거다.(59)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책 표지 이미지
고통을 번역하기
군인 임성근은 이렇게 말했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
책의 저자는 이런 말이 돌았다고 쓴다. “군인들을 살처분 현장으로 보내라. 그것은 전쟁훈련이다. 전장에서 군인은 살처분보다 더 잔혹한 장면을 목격해야 한다.”(74)
지금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환경에서는 전쟁을 모르는 게 쉽지 않다. 전쟁이 꼭 전쟁기념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침대에 누워 유튜브 쇼츠를 내리 보다가도 갑작스럽게 전쟁 영상을 맞닥뜨리게 된다. 드론이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들이다. 참호에 혼자 남은 군인은 폭탄을 매단 드론을 향해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싶지 않다.
전쟁이 참혹하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고통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군인 임성근이 한 말은 섬뜩하지만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기도 하다. 군대라는 국가 폭력 장치는 그렇게 작동해 왔다. 단지 그 ‘군인’에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굴었을 뿐이다. 꼭 지휘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전쟁 드론 영상의 댓글에서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느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 무장하고 군인들이 국가를 위해 ‘죽어주도록’ 훈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은 거기에 없다. “군인들은 대체 어디에 있나?”(74) 모든 곳에 있으면서, 아무 곳에도 없다.
국가는 전쟁거부자가 아니라 전쟁에서 긍정적 요소를 발견한 귀환병들의 기억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상처를 입은 이들은 희생을 이야기했고 국가는 신성함만을 강조했다. 어쩌면 우리는 전쟁의 ‘공포’를 잘 알고 있지만 전쟁의 감각과 고통은 충분히 말하지도, 듣지도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는 그 고통을 ‘번역’하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인간이 언어를 배우기 전에 내는 소리와 울부짖음”… “이 ‘울부짖음’을 앞에 두고 엎치락뒤치락 직역 또는 의역을 해보면서 타인의 고통을 상상해내는, 나아가 그 상상의 결과물을 자기 몸이 체득하고 있는 통증과 비교해 보면서 연민을 극대화해나가는 여정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고통의 번역’이다.(122, 강조는 저자)
군인은 적에게 고통을 주도록 훈련되고, 또 전쟁은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데’ 온 역량을 집중하는 현상”(126)이다. 그러나 군인은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도록 훈련받지는 못한다. 정갈하게 언어화된 표현이 아니라 비명, 몸부림, 신경증으로만 드러날 뿐이다. 그게 수뇌부에는 얼마나 낯설었는지, 이상 증세를 보이는 군인들은 ‘과학적으로’ 연구되어야 했고 ‘포탄 충격’(shell-shock), ‘전장 히스테리’ 같은 병명들을 붙여야만 비로소 ‘정당한 고통’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겁쟁이’ 군인을 발견한 수뇌부는 그 고통에 감응하기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아쇠를 당길 줄 아는’ 군인을 만드는 데 급급했다. 저자는 그것을 명예로 둔갑하지 않고 겁 많은 양심이 있던 자리를 들여다보려고 한다.
아이스크림이 아닌, 그곳에서 진정으로 녹아내리고 있었을 군인들을 대면하기 위해 나는 오늘도 고통을 번역한다. 흥미진진한 전쟁서사에 시선을 뺏겨버린 나머지 전쟁터 곳곳에 흩뿌려진 ‘울부짖음’을 듣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우리의 예민한 신경계를 자극해볼 시간이다.(127)
총을 쥔 자의 마음
군대에서 사회생활을 배운다고 하지만 전쟁법을 배워본 적은 없다. 싸워서 이기는 군인이 되는 것 제일 중요했다. 한국전쟁에 대해선 귀가 아프도록 듣지만, 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말하지 않는다. 총기에 대한 예의(부단한 총기관리!)는 들었어도 총을 든 자의 윤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도 없다. 전쟁이 났을 때 저기 있는 민간인 무리가 적으로 의심되니 예방적 차원에서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인이 된 이후에도 전시국제법이나 전쟁규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군에서 그에 관한 교육을 받아본 기억 자체가 없다. (…) 그러나 한번쯤은 의심해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지금 우리 군에는 얼마나 많은 호전주의자-군인이 있을까 하고.(169)
무엇을 교육하는가는 군대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천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교육한다고 해서 그동안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군인의 폭력성은 “군인이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을 창출함으로써 마련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번역이 향하는 곳은, 나의 아픔을 표현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아픔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또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러한 고통을 가한 것은 아닌지 되묻는 것에 이른다.
12월 3일의 계엄은 역사에 뿌리내린 광기와 일말의 양심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4월 3일의 제주도에도 민간인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미군정과 군 수뇌부는 이러한 ‘양심’이 적출된 자리에 ‘광기’를 채워 넣”었다. 그날의 광기가 모습을 바꾸어 다시 찾아온 12.3 계엄 당시, 현장에 투입된 군인들은 소극적이지만 명령에 불복종하는(혹은 소극적으로 복종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조금만 상황이 달랐어도 그들도 다른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군인들이 시민들을 맞닥뜨리고 최초로 마주한 것은 ‘군인의 본분은 ◯◯◯이다!’라는 결기보다는, ‘내가 쏠 수 있을까? 쏴야 하나? 쏘라고 하면 어떡하지?’ 주저하며 몸이 굳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나는 총을 든다는 선택이 관성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총을 들기까지의 시간이 길어져야 한다. 그리고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성찰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폭력을 부단히 점검하고 관리하는 것, 마침내 그 심연에 도달했을 때는 무서워서 도망칠 줄 아는 게 군인의 미덕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나의 예민함으로 전쟁에 불복종한다. 전쟁이 터지면 신경증 환자들과 함께 병상에 누워 비명을 지를 것이다. 누군가 나를 겁쟁이라 욕하더라도 기꺼이 감수할 것이다. (304)
‘용기 있는 행동은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오기 위해 정체성과 안정성을 위기에 넣는 것이다.’ 명령에 복종하는 몸이 되는 것은 사소하고 작은 일에서부터 몸과 마음에 ‘습관’이 뿌리내리는 것이다. 불복종은 순간의 결단, 학습된 윤리의 발휘, 생각 없이 우연히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꾸준히 훈련되는 것이기도 하다. ‘겁쟁이’는 아무런 실천도 못하는 불능의 상태가 아니라 두려운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 용기, 다른 것을 더 두려워 하겠다는 실천이다. 군대가 입에 넣어준 말이 아니라 자기 언어로 말하다 보면 우리는 ‘겁쟁이들의 연대’를 상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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