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화(출판노동자)

 

문학이 삶의 답안지라 믿었던 시절이 있다. 그 시절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1권부터 차례로 독파하는 무식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들을 꼽아보면 대충 이렇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포르노그라피아》, 《농담》, 《인간 실격》, 《마담 보바리》… 러시아, 프랑스, 일본 등 국가가 다르고 문학사조도 다르지만 그래도 공통점이라고 할 만한 게 보인다. 이 책들은 주로 (요즘 표현으로) ‘피폐’한 주인공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 까발린다. 이렇게까지 추악한 걸 꼭, 굳이, 제법 귀하게 자란 내가 읽어야 할까? 그런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난 이런 소설들에서만 위로를 얻곤 했다. 문학은 어떻게 살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었나? 이 소설들은 ‘어떻게 살아라’가 아니라 그냥 ‘살아라’라고 강요했다. 인간 다 이따위지만, 너도 마찬가지겠지만, 어쨌거나 살아 있어라.

《이처럼 사소한 것들》(클레어 키건, 홍한별 역, 다산책방, 2023)은 그 작품들과는 정반대의 결을 갖고 있다. 처음부터 ‘모든 인간은 똑같이 소중하다’는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을 인용하며 시작하는 책답게, 남을 도와라, 왜냐면 그래야 하니까, 라고 말하는 듯한 소설이다. 불어난 강물을 거품 섞인 흑맥주에 비유하는 첫 문단처럼 향토적이고 우아한 묘사들이 가득하지만 작가의 메시지만은 단순명확하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 협조하에 가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펄롱을 비롯해 인물은 모두 허구이지만 모티브가 된 사건은 실제 역사라는 얘기다.

펄롱은 석탄, 장작 등 각종 연료를 배달하는 일꾼이다. 아내와 다섯 딸과 함께 시내에 살고 있다.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 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들을 또다시 마주하는” 일상을 살고 있지만, 당장 가족이 먹을 것 걱정 없이 살 정도는 된다.
펄롱은 혼외자로 태어나긴 했지만 지금은 어엿한 자기 가족을 꾸리고 있다는 사실, 하지만 이 모든 평범한 일상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도 있다는 사실, 이 두 사실 간의 괴리와 병존을 잘 알고 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우리라고 부자는 아니지만.” 펄롱이 말했다. “그래도.”

펄롱은 어느 날 배달을 나갔다가, 수녀원에 갇혀 있는 듯한 아이들이 학대당한 정황을 목격한다. 다른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수녀원에서 벌어지는 일을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별 이야기를 다 하고 그중 절반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그런데 몰골이 엉망인 여자아이가 그에게 말을 건 순간 펄롱은 이것이 믿음의 문제 따위가 아니라는 걸 강제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럼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주세요.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할게요.”
“집에 딸 다섯하고 아내가 있는데.”
“저한테는 아무도 없어요. 그냥 물에 빠져 죽고 싶어요. 우리한테 씨발 그것도 못 해줘요?”

이 작품을 오웰상으로 뽑은 이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난 이 대목을 읽는 순간 ‘씨발, 펄롱한테 왜 이래?’라는 마음이 들었다. 겨우 그것도 못 해주냐고? 당연하지!

영화 의 한 장면

이 소설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영화 제작에도 참여한 킬리언 머피가 주인공 ‘펄롱’ 역을 맡았다. 사진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한 장면

이 책의 원제(‘Small Things Like These’)를 보고 처음 떠오른 것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A Small, Good Thing’, 김연수 역)이다. 카버의 소설에서 ‘사소한 일’(Small Things)이란, 자식을 잃은 지극한 슬픔에 빠져 있는 부부에게 ‘갓 구운 빵’을 먹이는 일이다. 이 일은 정말로 사소하면서 어떤 위험도 따르지 않는, 그럼에도 잘하면 누군가의 한순간을 구할 수 있는 엄청난 일이다. 반면에, 클레어 키건의 소설에서 ‘사소한 일’은 국가까지 결탁해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고, 생판 모르는 아이들을 구하고, 아니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모조리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동이다. 그렇기에 작가가 이 이야기에 제목을 이렇게 단 것은 다분히 의도적으로 보인다. 고통받는 이들이 겪고 있는 바로 그 일에 비하면, 어찌 모두 사소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펄롱의 선택, 책의 결말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다만 이 소설을 읽고 나는 사람이 남을 돕는 이유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내 삶이 무너질 위험을 각오하면서 남을 돕는다면 대체 무엇 때문일까? 흔히 이야기되는 이유 중에 이런 게 있다. 내 삶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미래의 나를 돕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남을 돕는다. 이를테면 ‘정상인’인 우리도 언제든 다치거나 늙으면 ‘장애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인 복지는 중요하다는 논리. 이 논리에는 아주 큰 구멍이 있다. 이 논리가 맞다면 약자가 될 가능성이 큰 이들일수록 약자를 돕는 현상이 일반적이어야 한다. 나아가 약자 당사자야말로 약자를 크게 도와야 한다. 한국이든 세계 어디에서든 이런 경향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남을 왜 도울까에 대한 두 번째 이유. 종교적 이유도 있을 수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소설의 세계관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다. 애초에 인권유린이 벌어진 환경이 종교시설인 점, 가톨릭 국가의 비호 또는 방임이 이루어진 점부터 그렇다. 펄롱 역시 종교를 갖고 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양쪽 모두 기도서와 성경을 현관 탁자 위에 올려두고 다음 일요일이나 축일이 올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두”는 환경에서 자랐고 지금도 종교는 현재의 관성을 유지하거나 더 강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수녀원의 더러운 여자아이가 욕을 하건 말건 모른 척하고 배달을 해야 더 ‘종교인’다운 상황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세 번째 이유다. 누군가가 나를 도왔기 때문에 나도 다른 누군가를 돕는다. 너무 뻔한 이유라 김이 샐 수도 있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뻔한 일이 아니다. 구해진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구한다는 것 말이다.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라는 초반부의 문장 그대로, 펄롱의 시작은 누군가를 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다. 남편을 잃고 큰 집에서 혼자 사는 개신교도 여성인 윌슨의 집에서 일하던 열여섯 여자애, 그게 펄롱의 엄마였다. 여자애는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펄롱을 임신했지만 윌슨은 펄롱의 엄마와 펄롱을 내치지 않았다. 그리고 일찍 죽은 펄롱 엄마를 대신해 펄롱을 자기 자식과 별다를 바 없이 키웠다. 윌슨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펄롱의 엄마는 ‘막달레나 세탁소’의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펄롱은 태어날 수 있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이 소설에서 펄롱이 결국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보호막을 뚫고 무엇인가 아주 ‘사소한’ 선택을 하게 된다면, 그건 피 한 방울 안 섞인 천한 출신의 자신을 도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그 이상한 미망인 윌슨의 영향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말을 보고 나서도 궁금함이 아주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럼 윌슨은 누구에게 도움을 받았을까? 윌슨을 도운 사람은 또 누구의 도움을? 사람이 서로를 돕는 것은 신이 그리하라 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진화론에서 말하듯 생존을 위한 본능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남을 도운 최초의 사람은 대체 왜 그랬을까? 이건 신학이나 과학이 범접할 수 없는, 오롯한 인간의 영역이다. 키건을 비롯한 수많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펼쳐 보이고자 하는 그런 세계. 문학이 삶의 답안일 리는 없지만 그래도 그 영역을 파고드는 건 예나 지금이나 문학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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