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욱(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활동가)
‘낯선 집’이라는 제목은 다소 낯설다. 부제를 보면 좀 더 명확해진다. ‘재일·이주·여성의 자리를 엮다.’ 재일조선인 여성으로 한국에서 살고 있는 저자의 위치를 감안한다면 ‘낯선 집’이라는 제목이 그저 낯설지만은 않다. 책은 저자가 쓴 열두 편의 글을 담았다. 모두 각자 완결성을 갖는 글이지만, 각각의 글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재일·이주·여성이라는 키워드 자체가 교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언에서 저자는 ‘낯선 집’이라는 제목에 대한 다층적인 설명을 건넨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이다. “디아스포라에게 집은 종종 불안정과 갈등을 내포한 장소이며, 집 만들기는 그러한 조건 속에서 삶의 기반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다.”(8) 책에서 소개하는 이들은 국민국가라는 배타적인 장소에서 ‘이등 시민’으로서 ‘불안정과 갈등’을 겪음과 동시에 혐오세력의 공격도 마주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살아내고 있음을 ‘삶의 기반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실천’이라고 짚어준 점이 좋았다.
책을 읽으며 가장 고민이 되었던 것은 ‘디아스포라’와 나를 어떻게 결부시킬 것인지였다. ‘대한민국 국민’이자 ‘한국 남성’으로 태어나 단일한 국적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의심해볼 필요조차 없었던 내가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일들이 있구나, 정도로 끝내면 되는 걸까? 그렇다면 계속 의심 없는 삶 속에서, ‘살아내기’보다는 살아지는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나를 흔들어야 타자가 흔들리며, 나를 흔들지 않으면 타자의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1) 디아스포라 관련 글로는 유일하게 읽었던 논문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논문은 고 서경식 선생의 문제의식인 ‘디아스포라라는 보조선’을 언급한다. 국민국가는 국민이라는 단일한 구성원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디아스포라라는 보조선을 그으면 사실은 국민-비국민 관계로 구성되어 있는 국민국가의 본질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비국민’ 없이, 그러니까 특정 존재에 대한 배제 없이 ‘국민’이라는 지위 역시 성립할 수 없다는 뜻으로 읽었다.
국민이라는 위치는 개인의 의도나 속성과는 상관 없이 특정 존재를 경계 밖에 둬야만 성립한다. 가까운 예로는 이주민의 입국과 재류 자격을 둘러싼 수많은 금지와 자기증명을 떠올릴 수 있겠다. 꼭 ‘국외자’가 아니더라도 ‘국민’으로서 국가폭력을 겪은 이들 역시 ‘국민됨’에 대한 흔들림을 겪는다. ‘이게 나라냐’는 외침은 견고해보였던 국가와 국민의 자리가 언제든지 뒤집힐 수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그럼에도 나(일단 아직까지는)와는 달리, 경계 밖에 있는 누군가는 언제나 그 경계를 의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흔들림은 내가 서 있는 위치에 대한 성찰이다. 성찰 없이는 다른 존재의 위치를 볼 수 없다.

<낯선 집> 표지
혐오의 역사성
“이방인은 …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기억된 존재이다.”(토니 모리슨, 『타인의 기원』. 조경희, 『낯선 집』, 97쪽에서 재인용.)
원래부터 ‘이질적인 존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혐오는 역사성을 지닌다. 책에서는 주로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에 기반한 혐오를 다루고 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가해 행위를 부정 혹은 축소하며 제국 일본의 과거를 긍정하는 운동이다. 제국 일본이 패배 이후에도 식민 책임을 피할 수 있었던 이유는 냉전적 질서 아래 미국 주도로 맺어진 한·미·일 3국의 반공 동맹 체제였다. 안보상의 이유로 일본의 식민지배의 책임은 ‘정리’되었다. 문제 제기의 목소리는 안보를 저해하는 것으로 취급돼 침묵당했다.
탈냉전 이후 진영화가 약화되면서 식민 피해에 대한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김학순을 비롯한 일본군 ‘위안부’의 피해 증언이다. 책에서 권혁태를 인용해 짚고 있듯, 이와 같은 문제 제기는 “일본의 ‘전후’와 식민지 피해자들의 ‘희생’이 상호 불가분 관계”(107)임을 드러냈다. 이후 일본 총리의 사과 등의 조치가 이뤄졌지만, 이를 ‘자학사관’이라 칭하며 제국 일본의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이 백래시로 영향력을 키워갔다. 식민지 가해에 대한 비판은 일본 국가에 대한 공격으로 취급되었고, 이후 중국의 부상과 독도 문제 등이 겹치면서 일본은 가해 책임을 회피하며 스스로를 피해자로 위치시켰다. 가해 역사에 대한 책임론을 자국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 해석하에 안보 담론과 혐오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냉전기 식민지배에 대한 문제제기가 ‘안보상의 이유로’ 침묵당했다면, 이후에는 도리어 식민 가해국이 식민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는 재일조선인의 특별영주자격을 특권이라 칭한다. 특별영주자격은 일제 패망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와 함께 하루아침에 국적을 빼앗긴 조선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체류 보장이다. 특권이라고 하기엔 참정권도 보장 받지 못하는 지위다.
저자는 이와 같은 재일 혐오를 두고 “기억과 책임을 전도하는 식민주의적 상상력”(145)이라 칭한다. 이는 식민지배자가 피지배자를 바라보던 방식이 식민지배 이후에도 작동하는 것이다. “한반도 출신자들에 대한 혐오, 증오, 공포는 식민지배,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전후 밀항자들, 암시장에 관한 기억들과 결합하며 축적되었다.”(145)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가 ‘재일특권’이라는, 가해와 피해를 뒤집는 문법’으로 반복되었다. 과정에서 소위 ‘간토대학살’로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사실은 전혀 기억되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듯이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두려움은 누구의 것인가. 누가 누구에게 공포를 말하는가. 그것은 타당한 공포인가.”(146) 이주민들에 대한 혐오 역시 그저 행정적 문제만이 아닌 ‘국민’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춰지면서 역시 안보 문제로 다뤄진다. 짚어야 할 것은 바로 혐오와 역사에 대한 기억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책에서 인용하고 있듯, 주디스 버틀러는 혐오를 “역사적 축적과 반복 속에서 응축되거나 강화된”(131) 것으로, 카롤린 앰케는 “혐오와 증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132)된다고 짚는다.
그렇다면 혐오가 지니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구체적인 타자와 마주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경험, 그리고 혐오발언 피해자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한 상상력과 연민”(146)이다. 그렇다면 타자를 향해 열린 태도 역시 훈련되고 양성될 수 있지 않을까?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 연구가 ‘듣기’를 추구해왔음을 언급하며 “증언은 개별적 경험들에 대한 자기해석의 과정이며, 또 듣는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경험을 구조화하고 자신의 역사를 회복하는 과정”(159)이라고 짚는다. 정말 증언을 들었다면, 증언을 듣는 이는 자신의 역사를 다시 쓸 의무가 있다.
응답의 기로에서
짓밟히기를 거부하고, 짓밟기를 거부하고 싶다. 피해자성에만 사로잡혀 자신의 가해성에 무자각한 해방운동을 부정하고, 중층적 차별구조 속에 놓인 자신이 다시 타인을 짓밟지 않는 해방운동을 모색하고 싶다.(256)
재일조선인 여성 김이사자의 말이다. 재일여성은 가부장제와 민족차별이라는 ‘복합차별’을 겪었다. “민족으로 여성성을 무화하는 재일남성도, 여성으로 민족성을 무화하는 일본여성도 모두 가해자”라는 김이사자의 외침은 ‘민족’이라는 언어로도, ‘여성’이라는 언어로도 온전히 번역될 수 없었던 재일여성의 위치를 보여준다. 이른바 ‘교차성’이다. 여러 정체성의 교차를 짚는 것은 예를 들어 단순히 흑인이고 여성이며 퀴어이고 빈자 같은 식으로 누가 더 차별 받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개개인의 겪는 고통이 그 자체로 고유한 형태를 지녔음을 짚고, 이와 같은 차별을 만들어내면서 동시에 은폐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1990년대 초 ‘위안부’ 문제가 드러난 후 재일여성은 재빠르게 여성넷(종군위안부 문제 우리여성 네트워크)과 생각하는 모임(조선인 종군위안부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해 활동했다. 재일여성이 겪은 가부장제와 민족차별이라는 이중의 차별은 ‘위안부’ 피해에 대해 “나였을 수도 있다”는 감각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또한 재일여성은 이전에도 ‘위안부’ 문제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적극적으로 반응하지 않았음을 반성했다. 자신들이 그저 피해자의 자리에만 있지 않았다는 인식이다. 그렇기에 “짓밟히기를 거부하고, 짓밟기를 거부하고 싶다”란 다짐은 그 성찰의 연장선에 있다. 자신 역시 누군가를 짓밟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권력구조 속 자신의 위치를 거듭 물으며 거부’하는 위치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나를 흔든다’는 의미로 읽힌다.
나의 일상에서 ‘국민’이라는 위치성에 대해 성찰 비슷한 거라도 하게 되는 계기는 결국 평화운동이다. 한국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참혹한 전쟁을 겪었다. 이와 같은 한국 역사는 자국의 가해자성보다는 피해자성에 골몰하게 만들었다. 제주4.3과 여순사건, 그리고 한국전쟁까지 이어졌던 한국 정부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비롯한 가해의 역사는 교육과정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에 대한 기억 역시 여전히 ‘부정’의 대상으로 남아 있으며, 한국 정부 역시 법정에서 가해를 적극 부인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를 가장 깊이 성찰해야 할 당사자인 군인에게조차 가해의 기억을 가르치지 않는다.
나는 이와 같은 대응이 자신의 위치를 뒤흔드는 것들에 대한 대한 참을 수 없음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안과 함께 머물지 않으려는 태도는 결국 흔들림과 불안정을 가져다준다고 가정/기억되는 대상(기억이든 ‘외부인’이든)을 설정하고 공격을 퍼붓는다. 이와 같은 구도에서 어쩌면 ‘안보’의 반대항은 ‘공존’일 것이다. 마지막에 저자가 짚듯, “현실에 필요한 것은 단일한 정체성을 확인하고 주체를 강화하는 일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마주치는 서로 다른 몸, 언어, 기억들 사이의 어긋남을 지우지 않고 그 자체로 공존하는 감각을 잃지 않는 일”이다.
저자는 “타자에 대한 응답책임/응답가능성responsibility”(267)을 통해 ‘연대’가 지닌 근본적인 곤경을 마주하는 일”을 언급한다. 내가 이해한 바로 책임은 그저 가해자의 것만이 아니라, 타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김학순의 증언을 들은 사람은 그 순간부터 응답할 것인지 아닌지의 기로에 서게 된다. 직접 가해를 하지 않았더라도 증언을 들었기에 응답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선인 여성과 일본 여성 사이의 위치는 다르다. ‘증언을 들은 자의 의무’는 결국 자신의 위치를 계속 성찰하며 어떻게 응답할지 골몰하는 일이다.
사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봐도 ‘응답’을 고민하게 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가자에서 학살과 파괴에 사용되는 무기를 만드는 회사들은 이미 수 년 간 한국의 무기박람회에 참여해 무기를 팔고 있다. 아까 언급했던 한국군에 의해 가족을 잃은 베트남전쟁 당시 피해 유족들 역시 지속적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자신이 들은 증언에 대해 함부로 동일시하거나 비약하지 않으면서 이를 확산시켜 더 많은 이들이 응답의 자리에 서도록 만드는 일일 것이다.
마침(!) 한국이 수출한 경찰무기(최루탄이 대표적이다)로 인해 입은 인도네시아에서 경찰무기 감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이 한국에 온다. 한국산 최루탄이 시민에 대한 과잉진압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증언하기 위해서다. 결국 이 글을 마지막까지 읽은 누군가는 응답할 것인지 아닌지의 기로에 서게 될 기회를 얻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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