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의 이익을 위한 불의한 군대에 들어가지 않겠다
2013년 10월 8일, 나는 자본주의 군대가 행하는 불의와 억압에 반대하는 나의 신념에 따라 군대 입영을 거부한다.
지배자들은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기에 처음 등장한 ‘신성한 국방의 의무’라는 포장과 달리, 자본주의에서 군대는 체제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도구로, 부당한 폭력과 학살, 민주주의 탄압의 온상이었다.
자본주의 군대의 만행
열강은 자본주의적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유혈 낭자한 지정학적 쟁투에 몰두해왔다. 약소국을 침략해 민중들을 학살하기도 하고, 세계 대전으로 인류사적 재앙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한반도 역시 끔찍한 전쟁과 분단의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세계 패권을 놓고 다투던 미국과 소련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각 군정을 세웠고, 민중 저항을 억눌렀고, 급기야 한반도의 통제권을 놓고 대리전을 벌였다.
21세기에도 이런 참상은 이어지고 있다.
석유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으로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1백여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지역 패권의 향방을 둘러싼 한중일미의 긴장은 동북아시아에서 심각한 불안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팔레스타인 민중들은 이스라엘의 점령으로 오늘도 고통 받고 있고, 미국과 서방은 아랍 혁명에도 개입하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
지정학적 긴장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 미국은 중동 침략의 실패를 만회하고, 경제 불황으로 인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더 몸이 달았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는 전세계적 군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심지어 미사일 방어 체제까지 완성시키려고 질주하고 있다. 상처받은 야수가 더 위험하다는 말이 꼭 들어맞는 상황이다.
이에 맞서 중국도 천문학적인 군비 증강에 매진하고 있다.
동북아의 바다에서는 연일 한미일 군대와 북중 군대의 군사훈련이 대결하듯 이어지고 있다. 세계는 점점 더 위험해지고 있다.
지금 세계 정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기 십 수년 전, 영국과 독일 등의 긴장이 증폭되던 당시 유럽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쇠퇴하는 1인자와 떠오르는 도전자의 충돌은 더 잔혹하고 야만적일 수 있다.
날이 갈수록 증폭되는 긴장이 예기치 못한 도화선을 만난다면, 우리는 멀지 않은 미래에 인류 역사의 페이지에 마침표를 찍을 새로운 재앙을 맞닥뜨려야 할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군대와 이를 필요로 하는 제국주의 체제가 계속 존재하는 이상 평화롭고 안전한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
아류 제국주의
한국 군대 역시 이러한 불의의 예외가 결코 아니다. 한국 군대도 지배계급의 충실한 도구로서 제국주의 위계 질서의 일부이자, 피비린내 나는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는 ‘악의 축’이다.
물론 한국이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최정상의 제국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식민 통치로 고통 받은 역사를 기억하는 민중들의 가슴 속에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살아 숨쉬고 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이러한 민중들의 정서를 거슬러 자신들의 배를 불리고 열강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군대를 활용해왔다.
베트남에는 수십 개의 ‘한국군증오비’가 있다. 이 비에는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가 기억하리라”고 써 있다. ‘북한놈’들과 같은 ‘빨갱이’들이니 가차없이 적을 죽이라는 상부의 세뇌에 따라, 베트남에 파병된 한국군들은 미군보다 더한 악명을 얻었다. 한편 베트남전 파병 군인들은 당시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 때문에 아직도 후유증으로 고통 받고 있다.
평범한 민중들이 전장에 파견돼 약소국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자신의 생명도 위태롭게 한 대가로, 한국의 기업들은 대재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소말리아와 동티모르와 레바논 등 셀 수 없이 많은 곳에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 나라 지배자들은 미국의 침략에 동참하며 ‘국격’과 ‘국제적 책무’ 운운했으나, 실제로 우리가 얻은 것은 테러 위협과 파병국의 국민이라는 오명뿐이다.
한미일 동맹
무엇보다 한국 지배자들은 한미동맹을 신주단지처럼 모시며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적극 협조할 것을 천명하고 있다. 5월에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는 한미동맹이 ‘글로벌 전략 동맹’임을 선언했다.
중국을 견제하기에 유리한 평택에 미군기지를 짓고, 미사일 방어 체제 구축의 핵심 요충지인 제주도에 해군기지를 지은 것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방향이 추진돼 온 것을 잘 보여준다. 이를 위해 군 당국은 반발하는 주민들을 탄압했고 기지 건설 부지에 위치한 자연유산도 파괴했다.
심지어 일본 군국주의 부활 시도에 은근히 협조하고 있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불인정과 독도 분쟁 등의 문제로 겉으로는 충돌하면서도 뒤에서는 한미일 동맹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며칠 뒤에도 한미일 해상 합동훈련이 진행될 예정이다.
적극적인 군사 전략과 한미일 동맹을 통해 아류 제국주의의 꿈을 키우는 동안 민중들은 더 한층 고통을 강요 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복지 공약을 말 바꾸기 하면서 국방비는 대폭 증액했다. 이를 위해 노동자 증세를 추진하며 서민들의 유리 지갑마저 강탈하려 했다.
이처럼 한국 군대 역시 1%의 이익을 위해 99%의 삶과 평화를 희생시키고 있다. 나는 신념을 꺾지 않은 ‘죄’로 감옥에 갈지언정 지배계급을 위한 불의한 군대에는 입대하고 싶지 않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
물론 이러한 군대의 만행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청년들은 군대에 간다. 어떤 사람들은 군대가 신성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대다수는 군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간다.
병역 거부에 대한 흔한 비판은 ‘그럼 군대에 가는 사람들이 비양심적이냐’는 질문이다. 당연하게도 어쩔 수 없이 군대에 가는 평범한 청년들이 비양심적인 것은 아니다. 그들은 비양심이 아니라 1%의 도구인 군대에 의한 피해자다.
황당한 것은 그렇게 묻는 권력자들 자신의 행태다. 가진 자들은 권력과 인맥을 동원해 갖은 수로 병역을 피해간다. 지난 2월 박근혜 정부의 내각 임명 당시 내정자 17명 중 9명이 ‘병역 기피’ 의혹자였다.
이런 심각한 불평등을 해결하려면 지금 당장 억압적인 징병제를 폐지하고 모병제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데 이 나라는 모병제 도입은커녕 대체복무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의견이 권력과 체제의 입맛에 맞지 않아도, 그가 소신을 지킬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중 하나다. 자유주의 사상가 볼테르는 이에 대해 “나는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렇게 말할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겠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자처하는 대한민국 헌법 19조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국민 전체에게 보장돼야 할 기본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실제 현실은 헌법 조문과는 전혀 다르다.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남아 악명을 떨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드높여 말하는 우파들은 걸핏하면 ‘북풍’을 일으켜 마녀사냥을 펼치곤 한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자들도 집총이나 병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또는 신앙)을 지키려면 감옥에 가야만 하는 현실이다. 이제까지 1만 7천 명의 젊은이가 죄도 없이 끌려가 전과자가 되어야 했다. 지금도 전세계 병역 거부 수감자 중 90% 이상이 한국에 갇혀 있다.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
나 역시 병역을 거부하면 병역법 위반으로 교도소에 수감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교도소에 갇혀야 할 것은 민주주의까지 후퇴시키며 병역 거부자들을 탄압하고, 평범한 청년들을 군대에 보내 고통을 강요하는 이 나라 지배자들이다.
사실 병역을 거부하는 행위 자체에 대한 환상은 없다. 나 개인이 군대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강력한 국가 권력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와 국가기구를 뒤흔들 진정한 힘은 아랍 혁명과 같은 아래로부터 대중 투쟁에서 나온다.
영웅적인 행동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우려는 생각도 없다. 진정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는 것은 소수의 대리 행동이 아니라, 87년 항쟁이나 97년 총파업, 2008년 촛불과 같은 대중 자신의 집단적 투쟁 경험이다.
따라서 내게 더 중요한 것은 병역 거부 그 자체보다 석방된 이후의 삶이다.
나는 탄압에 굴하지 않고 수감생활을 견뎌낼 것이다. 그리고 수감생활이 끝나면 진보적 대중운동의 일부로 복귀해, 모든 억압과 불의를 끝장내고 99%가 통제하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내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2013년 10월 8일 조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