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되어도 좋을 사소한 양심은 없습니다.

 

“군기를 잡아달라” 새로 나간 교회의 성경학교에서 아동부 교사를 하게 되면서 요청받은 역할이었다. 교회에서까지 그 말을 들었을 때 놀랐지만, 새삼 놀라울 건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자랐다. 학교에서 체벌을 받고 수련회에서 기합을 받으며 우리는 원산폭격을 했다. 선배는 후배를 굴렸고, 센 놈은 약한 놈을 팼다. 점수든, 돈이든, 빽이든, 가진 게 있으면 맞지 않는 것은 예외가 아니라 사회의 규칙이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위에서 시키면 뭐든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남자들은 남자들만이 하는 일을 감당하며 억울해하며 알량한 권력을 누렸다. 우리의 생각과 몸은 전사기에 우리가 약한 자를 지키는 것도, 그래서 우월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살기 위해 적을 짓밟고 우리끼린 뭉쳤다. 내 체력은 국력이고 국가는 나를 단속했다. 살아온 곳곳이 군대였고, 삶은 전쟁이었다. 내게 있어 병역거부는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삶 깊숙이 파고든 일상 속 군기와 맞서는 것이었다.

 

전쟁은 낯설지 않았다. 전쟁게임과 전쟁영화를 보면서 전투장면을 상상했다. 상상 속 나는 언제나 약자를 돕는 정의의 편이었는데 여느 소년들처럼 내 위치는 언제나 장군이나 왕이었다. 병사는 사람이 아니라 숫자였다. 역사책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서 듣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이야기에서 우린 언제나 억울했었다. 베트남 참전용사이신 친척어른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배웠을 때 한국군 또한 얼마나 많은 북한 민간인을, 베트남 사람들을 죽였는지는 듣지 못했다. 아우슈비츠를 찾아갔을 땐 학살된 유대인들만 생각하며 히틀러가 얼마나 나빴는지만 생각했다. 병역거부를 몰랐던 그 때 난 똑같은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상한, 반쪽짜리 진실들이다. 군인이 되는 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이 ‘상식’들을 의심해 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그 비극을 만들었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종교와 국가, 민족의 이름으로 총을 들었던 사람들 대다수는 그저 명령을 수행하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영장을 받고 군대에 가는 나의 모습일 수도 있는 것이다.

 

전쟁을 멈추려면

 

일으키는 모든 이들에게 전쟁은 정의로웠다. 하지만 언제나 정의롭다 하는 것보다, 필요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을 파괴했다. 파괴되는 것은 전쟁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삶이었다. 명분은 언제나 있었고 당한 이들의 복수심은 또 다른 전쟁의 동력이 됐다. 권력자들은 보통 사람들의 삶과 증오심을 판돈으로 전쟁놀이를 한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지키는 데만 필요한 것이 무기라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명분이다. 미국의 군수산업이 도처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발주자라는 것은 알려진 상식이다. 석유에 대한 탐욕 또한 전쟁을 만들어낸다. 한국도 전쟁 ‘시장’에 참여한다. 더 많은 무기를 팔아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며 이를 자랑스러워 한다. 무기를 더욱 멋진 것으로 포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무기에 그 많은 돈을 쓰게 만든다. 최첨단 무기, 대규모 군사장비들을 경쟁적으로 갖춰나가면 일어나는 것은 전쟁이고 죽는 것은 사람들이요 살찌는 것은 군수산업이다.

 

대규모의 훈련된 군대도 전쟁을 일어나게 만든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언제나 신속하게 투입될 수 있는 군대는 전쟁이라는 선택권이 쉬워보이게 한다. 방대해진 군대는 그 자체로 이익집단이 된다. 충돌이 없는 군대는 커질 이유가 없다. 군대는 그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갈등을 만들기도 한다. 전쟁에의 필요로 군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필요로 갈등은 유지된다. 남과 북의 지난 역사를 보라. 병사들의 저렴한 목숨값을 주고 받으며 서로의 군대는 덩치를 키워왔다.

 

전쟁은 권력자의 필요와 자본가의 이익, 군대의 필요로만 일어나기는 어렵다.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받아들이게 하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 사회는 구석구석 빈틈없이 군대의 방식으로 구성돼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배어 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언제나 전시상태로 만든다. 일상에 녹아있는 군대의 방식은 대규모의 군대를 지탱하고 대규모의 군대는 또 그 방식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무기가 사람을 죽인다 말하면 그것이 평화를 지킨다고 말하는, 나라를 지키기엔 무기가 너무 많다고 말하면 그것을 더 멋있고 신성하게 포장하는 이들의 머릿속에 군대가 있다. 병역거부를 얘기하면 이단을, 전쟁을 얘기하면 반공과 국가안보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교회에도 군대는 있다. 강정에 기지건설을 밀어붙이는, 군대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람들의 믿음 속에도 군대가 있다. 마을과 자연을 파괴하고, 정치가과 자본가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몰아내는 곳에도 군대는 있다. 집회 현장에서 나를 몰아냈던 방패든 젊은이들 중 몇몇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다고 믿었을까. 군대와 같은 방식으로 설계된 학교에도 군대는 있다. 선생으로부터, 또래 아이들로부터, 사회로부터 폭력과 낙오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이, 맞을까 무섭고 무시받기 두려운 아이들이 먼저 주먹을 날리고 다른 이를 짓밟는다. 물론, 애들한테 무시받기 싫은 선생도 ‘사랑의 매’를 든다. 질서와 예의, 학번이 중요한 대학에도, ‘진짜사나이’가 나오는 티비 속에도, 어디에나 군대는 존재한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도 군대는 있다. 사람들은 정답과 다른 생각을 드러낼 수 없다.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다름은 차별의 잣대로 삼곤 했다. 혼혈인, 여성, 저학력자, 장애인, 성소수자, 청소년 차별당하는 집단의 대부분은 군대에서 배제된 사람들과 겹친다. 신성화된 군대는 사람들의 감정에도 있다. 비판하고 질문하면 논리보다 감정이 앞선다. 군대에서 고생하고 누구보다도 군생활을 억울해 할 군인들은 군대에 대한 비판을 자신들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군대를 가보지 않은 사람들도 군대에 대해 묻는 것을 조심스러워하고 군대에 거부한다 하면 겁부터 낸다.

 

군대가 된 사회에서는 행복하기 어렵다. 폭력과 경쟁을 내면화한 우리는 전쟁에서 그렇듯, 서로가 서로의 적이다. 군대의 방식에 맞지 않는 이들은 도태되고 약한 자들은 낙오된다. 우리는 긴장 속에서 치열하게 산다. 목표는 생존, 동력은 공포다. 살아남게 하기 위해, 경쟁에서 승리하게 하기 위해 부모들은 자식을, 선생들은 학생을 군대로 보낸다. 해병대 캠프에서 누군가 죽어도 계속.

 

착한 군인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착한 군인은 전쟁을 막을 수 없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즉,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정치와 자본, 훈련된 조직이지 인간의 개인적 본성이 아니다. 그러니까 입영을 거부하는 것은 개인적 양심으로서이기도 하지만 전쟁 이전의 정치에 개입하는 반전행위다. 군인 됨을 거부함으로서 적극적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정치행위다. 일상을 전쟁으로, 사회를 군대로 만드는 것에 반대한다. 군사주의에 저항하는 것, 이 또한 군인이 되기를 거부함으로써 할 수 있는 정치행위다. 병역거부는 내가 가진 영장으로 행할 수 있는 최대치의 평화운동이자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우리의 권리를 위한 많은 행동 중 하나다.

 

전쟁이 나도 총을 들지 않겠느냐 묻는다. 나는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할 것이다. 지금 일어나는 일상의 전쟁들에 저항할 것이다. 지금 군복을 입지 않는 것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다.

 

무시되어도 좋을 사소한 양심

 

국제앰네스티라는 인권단체 활동을 하며 어떤 이들이 그들의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았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찾아보면 찾아볼수록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이 부당한 인권침해라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의 ‘양심’은 내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권리는 그저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릇 지켜져야 할 권리들은 인류사회가 나름의 필요로 정해놓은 것들이다. 삶의 공간이 소중하기에 주거권이 있다.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이 묵살되지 않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옹호한다. 군복무에 거부할 수 있는 권리는 전쟁과 학살을 겪은 인류사회가 거대한 폭력의 틈바구니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을 보장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양심을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전쟁을 멈추기 위해 만들어지기도 한 것이다. 그것은 특정한 종교인의 것만도, 특별한 신념을 가진 이의 것만도 아니다. 군복무를 명령받는 내게도, 세상의 모든 폭력에 얼마만큼씩 관련된 사람으로서의 선택을 기다리는 문제다. 즉 그 권리는 내 것이기도 했고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역설적이지만 감옥에 가게 된다는 결과 때문에 더 치열하게 군대에 대해 고민할 수 있었다. 추상적으로, 그저 지켜야 할 권리로서만 배웠던 인권을 들여다보며 그 내용에 공감했고 그것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비극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총을 들지 않는 양심을 가진 사람이 소수이기에 관용을 베풀어 달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 양심은 어느 사회나 일정 비율의 사람들만이 갖고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다. 대화 없는 관용은 양심을 구분하며 서로를 나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돼있던 독일에서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한 후로 군대를 가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복무를 이행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왔다. 특수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많이 태어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독일 사회에서 꾸준히 군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폭력에 대한 고민을 해왔기 때문이다. 동시에 군비경쟁을 통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긴장을 늦추고 결국엔 전쟁을 끝내는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병역을 거부하는 것 또한 내게 보장된 권리임을 배웠기에, 행복하다. 박해 속에서도 서로의 양심을 꾸준히 지켜온 이들 덕분에 그 권리는 내게도 왔기에, 감사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이어나가기 위해서라도 병역거부는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삶이 평화로울 수 있을 권리를 위한 여러 노력의 하나로서 병역거부가 권리가 됐으면 한다. 양심이 부족하니까 그냥 군대에 가라는 권유가 아니라 사소한 양심으로도 군대를 거부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무시돼도 좋을 사소한 양심은 없다.

 

군대가 남자의 일이라면

 

군인에 대한 고민은 내가 가진 남성의 위치를 돌아보게 했다. 군대는 남성에게만 의무로 강요되며, 남성다움을 요구하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공간이다. 군인으로서 요구되는 덕목과 한국사회가 남성에게 요구하는 성격은 거의 같다. 군대로 구성된 사회가 정상남성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기에 한국사회에서 남성으로 키워지는 것, 군인으로 훈련되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이다. 군대는 남성들을 연대시키며 군대에 가지 못하는 자들을 배제한다. 군대생활을 통해 남성들은 지켜주는 존재로서 존경받아야 한다는, 고생하는 과정으로 보상받아야 한다는 경험을 공유한다.

 

강한 남성으로 자랐다. 아마도 나는 좋은 군인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태어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요구받아왔고 또 노력해온 것이기도 하다. 운동을 즐기거나 기계를 만지거나 게임을 하거나 감정을 절제하거나 근육을 키우거나 명령을 내리거나 혹은 듣거나 하는 방식으로써 남성으로, 예비 군인으로 자라났다. 그것이 살아가기에 편하다고 느꼈지만 돌아보면 그것은 다른 이에겐 위협이다. 내게 남성으로서 길러진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 여성으로서 길러진 자들에게 위협이다. 그리고 그 강함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저지를 폭력이, 누군가가 내게서 두려워 할 폭력이 두려워졌다. 그것은 내게 긴장이다.

 

언제부터인가 강한 남성의 자리가 불편해졌다.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성별로, 또 강함과 약함으로 차별한다. 성에 따라 역할을 부여하고 그에 맞춰 키워 낸 후 그에 따라 권력을 나눈다. 나는 그러한 사회가 부당하다고 느낀다. 짜여진 방식이 폭력적이라 생각한다. 남자답기 위해 입혀진 것들, 억압된 것들을 살핀다. 그 위치를, 민감하게 의식하면서 그것들을 풀어내고 싶다. 성차로 나뉜 사람들이 서로 대화하고 이해했으면 한다. 평등해진다는 것은 모두가 똑같으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뉘어진 것을 당연시 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얼마만큼 다르고, 얼마만큼 다르도록 만들어지는지, 서로가 어떤 위치에 서있는지 그 차이를 민감하게 의식해야만 동등함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남성화된 나의 몸과 마음은 한계였고 그것은 내게 너무도 갑갑했다. 너무도 깊게 몸과 마음에 배어 있던 것들을 고쳐 나가기란, 심지어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내게 남성일 것을 요구하는 것을, 나를 더 남성답게 만드는 것을, 나를 남성으로서만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대신에 남성됨을 들여다보고 살피며 해제하려 한다. 군대는 나를 남성으로서만 여기고 전사로서만 훈련시킨다. 또한 그것은 대량으로 남성 전사를 만들어낸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남성성에 기반한 차별을 만들어내고 그 구조를 지탱한다. 나는 이러한 군대의 일원이 되기를 거부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내가 가진 신앙은 삶의 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완벽하진 않겠지만 내가 믿는 신의 뜻을 떠올리며 나름의 윤리적 기준을 세우고 실천하며 예수의 길을 따라 살려한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언제나 떠올린다. 죽어야 할 사람이 있을까. 찌르고 쏘는 훈련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람을 죽이는 전쟁에, 우리들의 삶에 존재하는 전쟁에 나는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 기독교 역사에 희미하게나마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의 길을 걸은 자들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신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의한 전쟁들을 기억한다. 폭력에 대한 고민은 신앙적 고민이었고, 병역거부는 그 실천이다.

 

이것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겠다. 내게 진리는 정해져 있는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민과 기도다. 중요한 것은 질문하는 것이다. 전쟁과 군대에 대해, 사회 곳곳의 폭력에 대해. 일상의 다양한 상황들과 입장들 그 맥락들에서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딱 떨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뒤따라오는 준엄한 질문을 외면하지 않고, 불편하더라도 안고 가는 것이다. 군대에 가기로 결정하든, 군대에 가지 않기로 결정하든, 다양한 맥락에서의 고민을 심연까지 껴안았던 사람은 보다 더 윤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지 않을까. 군대에 가서든, 일상의 순간에서든, 전장의 한복판에서든.

 

지난 몇 년간, 외로웠다. 교회에서 자랐지만 교회에서 고민을 나눌 수 없었다. 교회는 오히려 가장 큰 벽이었다. 평화에 대해 고민하는 병역거부자를 외면하고, 이단의 문제로만 치부했다. 사랑과 평화를 누구보다 많이 말하며, 윤리와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는 게 교회 아닌가. 병역거부에 대해서 얘기만 꺼내면 국가안보와, 반공과,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서 얘기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복무하는 국가가, 그들이 참여하는 전쟁이, 그들을 부리는 군대가 정의로운지, 평화를 위한 최선인지 끊임없이 물어야 하지 않을까.

 

교회 안에도 군대가 불편하고 살인연습이 마음에 걸리고 전쟁이 안타까운 자들이 왜 없을까. 다만 그들은 속으로만 고통스러워하거나 자신이 틀렸다고 자책하며 숨죽인다. 이들은 너무도 나약하거나 삐딱한 혹은 시험 들린 것이었을 테니 더욱 기도하고 순종할 것을 요구받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과 손잡고 싶다. 교회 안에서 군대를 질문하고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병역거부가 또 하나의 신앙적 결단이자 선택으로 존중받고 축복받길 원한다. 전쟁과 폭력을 외면하고 가진 자들의 편에 서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나는 조금씩 교회 다니는 사람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바뀌어 왔다. 하지만 오늘도,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외면할 수 없었던

 

내게 있어 병역거부는 총을 내려놓는 것이 옳으냐 마냐의 윤리적 딜레마만은 아니었다. 찬성하고 지지하는 것과 병역거부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선택하는 내게 책임과 피해가 따르는 일이었고, 그것은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가 있어야 감당할만한 것이었다. 그것은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거리기도 하고 느끼는 것과 변하는 것의 거리이기도 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며 다양한 결의 폭력에 대해서 새삼 느끼게 됐고, 그것들은 내게 중요한 문제가 됐다. 폭력은 총으로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구성된 방식에도 있고 서로의 위치 때문에도 생겨난다.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에서 폭력이 생기기도 한다. 단지, 모르고 살았거나 무시해왔던 것이다.

 

무기산업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은 자본가뿐이 아니다. 한국의 군수기업이 다른 이들의 죽음을 팔아 이익을 얻으면 우리들은 조금씩이나마 그것을 나눈다. 그것은 주식이나 연금처럼 직접적일 수도 있고, 경제 성장이라는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다. 무기 뿐 아니었다. 내가 먹는 고기가, 내가 타는 자가용이, 내가 쓰는 전기가, 누군가를 짓밟고 얻어진다. 그것들은 환경을 파괴하거나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은 어딘가에서 갈등과 전쟁을 일으킨다. 전기를 위해 삶의 터전을 빼앗는 밀양에도, 제철소를 위해 주민들을 내쫓는 인도의 오디샤에도, 석유 때문에 포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라크에도 우리는 연루 되어있다.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구성돼 있는 삶과 일상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구조를 탓하거나 자본주의 체제를 핑계로 묻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스템은 나 같은 개인이 모여서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개인의 책임을 의식하게 되는 순간 삶은 불편해졌다. 나의 행위와 관계된 사람들, 나의 책임이 연루된 비극들을 의식하면 편리나 이익을 위해 외면할 수 없는 것들이 생겼다. 알려고 하지 않는 것, 알고도 변하지 않는 것은 나와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을 방치하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을 딛고 얻은 행복은 달콤할까. 관계를 끊임없이 성찰하는 것, 그래서 삶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전쟁과, 폭력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실천이다.

 

병역거부는 군대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폭력을 줄여가는 실천 중에 하나로 여겨졌다. 그 과정 덕분에 새로운 눈을 얻고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삶이 조금씩 변할 수 있었다. 병역거부를 고민한다는 것은 내게 있어 선물이었다. 병역거부를 결정한다는 것은 어떤 논리적 결론 때문만이 아니라 넓혀온 고민, 그리고 삶의 변화가 쌓여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여전히 내게 버겁고 무겁지만 어떠한 투철한 신념이나 종교를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믿었고, 함께하는 사람들은 내 선택을 가능케 했다.

 

모두의 이름으로, 다만 나의 이름을 빌려

 

‘함께’는 내게 화두였다. 고집이 강하고 독립적으로 자란 나로서는 그것이 힘겨웠다. “빈집”에서의 공동생활은 그래서 내게 배움의 공간이었다. “빈집”은 집이라는 공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닌 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한다. 주인과 손님이 구분되지 않는 곳이다. 질서와 규율이 아니라 리듬이 흐르게 하려 한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식구로 산다. 서로의 생각과 가치를 공유하며 ‘나’와 ‘나의 것’이라는 개념을 버리려는 노력을 한다. 정해져 있는 역할을 따르고 요구하기보다는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고 나름의 욕구를 파악하고 맞춰간다. 함께 사는 사람들, 연결돼 있는 사람들, 그리고 사람이 아닌 모든 관계들을 살피려 한다. 관계에서 생겨나는 폭력을, 서로가 주고받는 영향을 민감하게 보고 소통하고자 한다. 개인주의자로 자라거나 전체주의자로 훈육된 나에게 그것은 쉽지 않았다. 그것은 실로 어려웠다. 우리는 쉽게 개인을 잊거나, 혹은 함께를 벗어났다. 그것은 여전히 숙제지만 내게 공동체는 또 다른 이름의 평화였다. 위계질서로 짜여져 역할만 서로 바꿀 뿐인 군대를, 그리고 개인으로만 향하여 관계의 폭력을 성찰하지 않는 사회를 거부한다.

 

처음 병역거부를 얘기했을 때, 아버지는 1분도 안 돼 성경을 근거로 반대하셨다. 가슴 아팠지만 그것이 평균적인 한국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그 후로 몇 년간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과정은 가족들이 함께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대화하며 서로의 다른 생각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가족들의 삶에서도 의미 있는 고민들이었으면 좋겠다. 나를 이해하려고, 또 군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가족들에게 고맙다. 자식의 결정으로 부모를 탓하는 자들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부모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무례한 어른들의 편견 탓이다. 어찌됐건 결국엔 내 선택으로 인해 얼마간의 마음이 아플 가족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것은 나의 몫으로 남았다.

 

영장은 내게 왔지만 병역과 무관한 사람은 없다. 전쟁과 군대와 평화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는 사람들, 군대가 만들어내는 위계와 삶을 전쟁으로 만들어가는 시스템에 저항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도 거부할 영장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상처를 받은 할아버지도, 남자들처럼 군대에 가지 못해 아쉬워했던 엄마도, 군대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폭력을 떠올리며 고민하는 친구도 군대 문제에 있어서 당사자다. 지금까지의 고민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내 생각과 신념은 주위의 친구들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며 만들어 온 것이다. 병역거부는 내 개인의 양심의 결정만이 아니라 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은 아닐지라도 평화에 대한 신념들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이들이 함께였으면 좋겠다. 영장은 내게 왔지만 거부는 함께 뜻을 모으는 모두의 이름으로 한다.

 

얼마나 많은 고민을 나눠야 너와 나는

 

많은 고민을 해왔음에도 단 한 장의 문서로 그것을 납득시키고 표현할 자신과 실력이 없다. 애초에 내 양심이라는 것은 불분명하고 애매한 것이어서 깔끔하게 정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명쾌한 논리나 공감 가는 느낌으로 전해지며 동의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숱한 책을 읽고, 논리를 점검하고, 사람들과 말을 주고받았지만 대부분의 말들은 내 머릿속에서 증발했고 일부만 내 삶을 변화시켰다. 살아오면서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 것이 아주 어려우며 불가능에 가깝다고 느꼈다. 그것은 서로의 다른 처지와 상황, 생각과 가진 것의 차이를 민감하게 살핀 후에야 가능할 것이다.

 

각자의 옳음은 다르다. 옳다고 믿는 바를 얼마나 현실에 적용시켜나갈지, 그리고 그 옳음을 지키기 위해 얼마만큼을 감수할 수 있는지도 다르다. 어떤 이에게 군대는 더 중요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양보해야 할 일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 군대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일수 있다. 누군가는 군대에 가서 군대를 바꾸라 한다. 난 군대를 바꾸러 군대에 가는 대신 군대를 거부하고 삶을 바꾸겠다. 누군가에게는 거부할 대상이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각자의 삶의 좌표를 조금씩 이동시킬 때 나는 평화가 조금씩 만들어진다고 믿는다.

 

어떤 상황이 와도 총을 들지 않겠냐는 질문은 여전히 내게 유효하다. 무기 뿐 아니라 관계되고 책임 있는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평생 날 따라올 것이다. 군인에겐 그 질문이 허용되지 않는다. 폭력의 순간 그에겐 질문을 던질 권리가 없이 명령만이 존재한다. 나쁜 사람이 군대에 가는 것이 아니라 군대가 사람을 나쁘게 하는 것이다. 폭력의 주체로서 복잡한 맥락과 결들을 파악하고 선택할 여지를 주지 않는 군인이 되는 것은 지난 세월 고민하며 세워온 가치관과 모순된다. 생각하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모순을 줄이며 살아가려 노력하겠다. 군인이라는 모순을 내게 허용하는 것은 나에 대한 배반이다.

 

모든 이들이 너처럼 총을 들지 않는다면, 누가 나라를 지키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모든 이들이 총을 들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묻는 이도 나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모든 이들이 갑자기 총을 들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 하나의 준칙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싶거나, 모든 이의 생각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억지나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전쟁에 이기는 것만이 아니라 전쟁을 끝내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한 명씩 두 명씩 총을 내리고, 자기가 일상 속에서, 관계 사이에서 저지르는 폭력을 가만히 돌아보며 자신의 행위를 고민하는 것은 느리고 지난한 과정이다. 오늘 나는 결정했지만 그에 대한 고민과 책임은 나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의 것으로 여전히 남았다. 완벽하고 분명하지는 않지만, 군대에 가든 안가든, 서로 관계 맺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고민을 쌓아갈 때 전쟁의 위협도, 일상의 위계도 줄어들 것이라 믿는다. 어떤 것이 더 평화로울지 고민하는 그 과정, 즉 평화로 가는 길이 평화다.

 

글을 마치며 상상해 본다. 영장의 명령대로 군인이 된다면. 그래서 내가 휴전선을 지키는 초병이라면, 저 앞의 강을 헤엄쳐 도망하려는 이를 발견하고 수백발의 탄환을 쏘아 죽이라는 명령에 따를 수 있을까. 손에 떨림은 없을까. 고민은 없을까. 수칙에 의해서 수행한 적절한 대응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을까. 내키지 않는다면 그 명령을 거부할 수 있을까. 거부했을 때 벌어질 일들이 두렵지 않을까. 실탄을 발사한 그 초병이 아주 약간이라도 그런 고민을 하고 괴로워했다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 군대 안에서든, 삭막한 사회에서든 어찌 하면 세상이 덜 잔인할까 고민하는 모든 이에게 이 글을 바친다.

 

2013. 11. 18. 모두의 이름으로 다만, 저의 이름을 빌려.

김성민(들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