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원씨는 2014년 9월 16일 입영일날 병역거부의사를 밝혔고
10월 13일날 경찰조사를 받은 후, 2015년 4월 1일 의정부지법에서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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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도, 몸도, 행동도, 태도도 일방적으로 정해진 틀에 맞춰 단속하는 괴이한 풍경. 개인은 사라진 채 틀에 맞춰 규격화된 인간을 생산해내는 학교생활에서부터 (선배, 선임과 같은)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주어만 뒤바뀐 채 삶의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그러진 모습들. 그건 마치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히듯 몸에 받아들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때때로 극심한 알레르기나 거부반응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그 거리감 사이에서 책을 접하고, 묻고, 생각하며 이 옷이 국가주의, 전체주의, 군사주의 등으로 불린다는 걸 알게 됐다.
군대나 군 생활에 대해 적잖은 사람들이 그래왔듯 나 또한 두려움과 마주했다. 당시에는 세세하게 알진 못했지만 무용담으로 전해지는 내용들만으로도 두려움을 주기엔 충분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래도 군대는 가야해’ 라는 말이, ‘대한민국 남자라면‘이란 사족을 붙여 따라오는 것이었다. 궁금증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두 번은 가기 싫지만, 될 수 있으면 안가야 하지만, 이런저런 부조리들을 보거나 겪었지만 그래도 가야한다니 대체 무슨 말인걸까. 군인이 된다는 것, 군사훈련을 받는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결코 아닐 텐데 왜 이렇게 다들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걸까. 마땅히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괜찮은 것인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북한이란 적의 위협이 있어서? 그런 이유라면 누군가 피해를 입고, 희생되는 걸 전제로 작동되는 이 구조가, 이 굴레가 정당해지는 걸까? 궁금증들은 매번 치기어린 생각이나 철없는 생각쯤으로 여겨진 채 내쳐졌고, 내게 남겨진 의문들 앞에서 병역을 이행한다는 생각은 점차 나와 거리가 멀어져갔다. 수년 뒤에 뒤늦게 군의문사 사례들을 접하고는 더더욱. 말도안되는 군사법체계와 관행이란 이름으로 방치되온 미친 짓들을 알고는 더더욱. 이렇게나 야만적인 조직이 어떻게 아직도 유지되고있는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안전보장을 위해 징병된 사람이 내부의 심각한 고름으로 죽어나간다면, 근본적인 문제해결 없이 하는둥 마는둥 넘어가 버린다면, 그렇게 돌고 돈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안보라는 건 무슨 의미이고 무슨 소용인 걸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안전을 보장한다는걸까.
꽤나 오랜 시간을 병역거부를 둘러싼 시선과 질문들, 공격들에 잘못 답하거나 틀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려야했다. 기피와 거부를 둘러싼 시선들은 여전히 무척이나 날카로웠고 경직되어있었다. ‘군대가기싫다‘는 말 따위가 설 자리는 감히 존재조차 할 수 없어보였다. ‘자신들이 보기에 장애나 문제가 있지 않는 이상 대한민국 남자는 전부 군대를 가야만 한다’는 철옹성의 논리 앞에서 잘못 내딛는 순간 한없이 추락할 것만 같은 까마득한 공포를 느껴야만했다. 고민의 연장선에서 내가 받을 처벌 그 자체보다 병역을 둘러싼 시선들이, 임병장윤일병 사건을 비롯해 다시금 수면 위로 드러난 숱한 군 관련 사건사고들에도 큰 변함없이 공고한 그 시선이 더 큰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여전히 사람들은 어떤 정답을, 대안을 내어놓길 요구하고 문제를 말할 자격을 검열하기까지한다. 그런 시선에 무척이나 힘겨워해야했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의문이고 질문이지 어떤 구체적인 대안도, 정답도 아니다. 한 인간이 군인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도 성찰도 보이질않는 사회를,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모난돌 취급받는 사회를 받아들일 수 없을뿐이다. 일방적 지시에 따라 ‘될때까지 굴리며’ 폭력과 위계 앞에서 무릎꿇게 만드는 군대에, 그 논리에 길들여지고 싶지않을뿐이다. 권력과 상황의 압박에선 나 또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전쟁을 막는다는 것, 그건 단순히 군사력의 균형에 내맡겨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긴장의 완화, 평화에 대한 강력한 사회적 여론이 없다면 군사력의 균형과는 무관하게 전쟁은 발생할 수 있다. 최악을 항상 생각해야한다며 최선인냥 전쟁을 우선하여 생각하고있지는않은지, 북한의 위협을 과장되게 선전하여 국방비증액이나 무기구입을 위한 명분에 이용하고있지는않은지, 여론몰이나 악의적 선동에 악용하고있지는않은지, 군사적 힘에 더 집중하며 폭력에 의존하고있는건아닌지, 익숙해진 비정상적인 시각으로 군대를,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건 아닌지 되짚어봐야한다. 우리의 물음은 ‘전쟁나면 어떻게하냐’ 에서 ‘전쟁을 어떻게 줄이고 없앨 수 있냐’ 로 옮겨져야한다. ‘악한 적과 우리’ 의 구도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염려하는 사고방식 아래에서, 전쟁은 예견된 일이 될 수 밖에 없다.
정말 진지하게 되묻고싶다. 얼마나 더 많은 사건사고들이 밝혀져야 하고, 얼마나 더 누가 어떻게 고통 받았는지 알려져야하는건가, 얼마나 더 많은 죽음의 행렬이 이어져야하는건가. 낯선 사람과 24시간 생활을 강요당하는데 잠자는 시간조차 칸막이 하나 없이 개인 사생활을 보장받지 못하고, 약 2년을 국가에 바친다는데 한달에 쥐어주는건 이제서야 십여만원. 각종 교육훈련에서 중시되는 것은 과정이 아닌 결과이며 사병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간부가 넘쳐나는 곳. 병사의 인권은 뒷전인 채 병사관리에만 몰두하고 무늬만 바꿔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이 조직, 이 군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보다 덮어오진 않았는가. 사람은 뒷전인 채 지켜져야만 하는 의무가 뭔지, 그런 의무만 강제하며 만들어진 안보가 무슨 의미고, 무슨 소용인 건지 되물어본 적이 있던가.
66 여년간 공고히 자리 잡은 징병제에 대한 사회전반적 검토를, 징병제 자체에 대한 진중한 물음과 의심의 눈초리를 언제 까지고 덮어두고, 묻어둘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여기는 오만함도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크고 작은 물음들이, 말과 몸짓들이 멈추지않는 이상. 양심없는 것들이 멈추지않고 저마다의 소음을 낼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