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없는세상에게

마지막 밤입니다. 끝에 다다른 이들이 대개 그렇듯 저는 입술을 깨뭅니다(프랑스에서 ‘입술을 깨물다’는 ‘후회하다’라는 뜻의 관용어입니다). 그러나 저는 조은과 같은 마조히스트가 아니라서(한화팬은 다 M이라면서요? 껌이랑 야구는 롯데지. 롯데의 G가 gum이라는거 알고있나요?) 입술을 아푸게 깨물지는 않습니다. 적당히 깨물며, 이와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부채감(침 아닙니다)을 휴지대신 이 페이지로 닦습니다.
편지 보내주신 분들,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게으른 성정 탓에 회신을 못한 때가 많았습니다.
책 넣어주신 분들,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고맙다고 편지를 쓰면 또 넣어달란 뜻으로 번역될까 두려워(물론 이것이 말도 안되는 저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입을 다물었습니다.
영치금과 먹을 것 넣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건 좀 후회막급입니다. 부자 친구를 둘걸.
아, 처음엔 진지했는데 쓰다보니 장난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내 맘 알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을 얼른 아십시오. 거부는 거부한다. 양심적 거부거부.
하하하 웃고있는 여러분. 제가 마냥 반성만 할 줄 알았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김애란은 이렇게 씁니다.

아빠는 한동안 양심수 같은 얼굴로 읍내 구치소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이 시시한 전과범이 수감기간 내 한 일이란, 반성이나 생계 걱정이 아닌 ‘동네에서 한 번도 면회오지 않은 인간들’의 명부를 분노에 떨며 적는 거였다. 아빠는 그 후로 술만 마시면 “내가 다 기억한다!”고 소리치곤 했다.
(기도, 김애란)

양심수란 모름지기 구석에 웅크린 채 ‘동네에서 한 번도 면회오지 않은 인간들’의 명부를 분노에 떨며 적는 사람입니다. 양심의 진정성은 명부의 페이지 번호로 가능합니다. 명부의 끝엔 수학자 페르마의 본을 받아 “나는 한 번도 면회오지 않은 인간들이 더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지면이 모자라 생략한다”고 씁니다. 거기에 “내가 다 기억한다!”고 덧붙이면 화룡정점입니다(용이 정점을 찍었다는 뜻입니다. 제가 용띠거든요.) 하지만 저는 “내가 다 기억한다!” 뒤에 “내가 다 기억한다고!”를 또 씁니다. 저는 몹시 양심수거든요.
또다른 양심수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주고 내가 사슬에 메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왔음이라.
(디모데 후서 1:16,17)

유감스럽게도 저는 저의 오네시보로들에 대한 명부를 갖고있지 않습니다. 걔네들은 얼른 잊는게 좋습니다. 저는 오직 ‘동네에서 한 번도 면회오지 않은 인간들’만을 기억할 것입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내가 다 기억한다!” 외칠 것입니다. 다시 잠들아가 “내가 다 기억한다고!” 외칠 것입니다.

나란 남자의 농담은 언제나 격조있게 찌질하네요. 아, 갖고싶다 이 남자.
어쨌거나 내일 볼 여러분, 보고 싶습니다. 내일 못볼 여러분도 조만간 보고싶어요. 그리고 감옥에 있는 우리 양심수들, 명부 그만 쓰세요. 명부에 등재된 사람들 대신 제가 여러분 모두에게 매일 서신쓰고 달마다 면회 가겠습니다. 영치금도 넣고 음식도 넣고 책도 보내겠습니다. 믿기 어렵다고요? 딱 하루만 저를 믿어보세요. 이틀째부턴 못믿을테니까요. 하하, 하하하, 하하하하하.

2015. 5. 21.
내일이면 자유인, 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