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병역거부자 오경택입니다.

 

제가 3월 12일에 수감되었으니 이곳에 온 지도 벌써 한달이 넘었네요. 막막하고 두렵던 수감생활이었으나 많은 분들의 염려와 도움으로 잘 해쳐나가고 있습니다. 이 글을 빌어 저를 지지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교도소 생활은 코로나19로 인해 하루 수차례의 체온 측정과 종일 마스크 착용 외에도 많은 부분이 달라졌어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저는 혼거실인 신입방이 아닌 격리사동의 독거실에서 2주간 격리생활을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은 운동 시간도, 온수 샤워도 없었습니다. 대신 주 1회 큰 물통에 온수를 배급받아 씻을 수 있었는데, 대야에 물 받아 씻던 어릴 적이 떠올라 괜시리 웃음이 났어요.

 

격리가 끝나고는 본방이라 불리는 혼거실로 가는 줄 알았는데, 옆 사동의 독거실로 이동해 다시 2주를 보냈습니다. 아마도 등급심사 대기와 준 격리조치를 겸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어요. 그 전의 2주와 다른 건 하루 30분의 야외운동시간인데, 오랜만에 온몸에 햇빛을 받으며 눈을 감으니 이곳이 감옥인 걸 아주 잠깐 잊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S2 등급을 부여받고 혼거실로 옮겨왔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관용부 출역을 신청했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무난히 처리될 듯합니다.

 

수감된 직후에는 연락 한 번 없다가 갑작스레 저를 집어넣은 검사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울화가 치밀었어요. 그러다 사흘쯤 지나니 속세에 미련(?)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다 지난 일 이제와 무슨 소용이냐 싶더라구요. 우선은 잘 적응해서 무탈히 생활하는 게 먼저니까요.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수감 일주일쯤부터 미얀마 시민들의 투쟁이 매일같이 뉴스에 보도되었어요. 그러고 또 며칠 지나니 군부에게 희생된 시민의 수가 수백을 넘겼고, 이에 대항해 시민들이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군부의 쿠데타로 시작해 시민들의 죽음과 무장까지. 현재의 미얀마 상황은 80년 광주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제 재판 담당 검사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518 당시 광주에 있었다면 피고는 총을 들었겠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댑한 저에게 검사는 “피고의 신념이 유동적이고 선택적이라 양심의 진정성이 의심스럽다”고 했습니다. 그는 ‘법이 인정하는 평화란 불의에조차 저항하지 않는 것’이 강변하는 듯했고 판가도 이를 수용해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검사와 판사, 그리고 법의 눈에는 1980년의 광주와 2021년의 미얀마가 어떻게 비쳤던 걸까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너무 먼 곳의 일이라 오늘의 한국을 살아가는 병역거부자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80년 5월 광주시민들의 항쟁과 수십년 이어진 병역거부자들의 저항이 지금 우리가 누리는 정치적 공간으 ㄹ창출했다는 사실입니다. 오월 광주를 기억하는 이들의 더 많은 연대와 투쟁, 제한적이나마 시행된 대체복무제가 이를 보여줍니다. 마찬가지로 미얀마 시민들의 투쟁과 저를 포함해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는 병역거부 수감자들의 저항도 각자가 그리는 세상을 앞당기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그저 더 이상의 희생과 수감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요. 꿈꾸는 바를 놓아버리지 않는다면, 서로의 손을 굳게 잡는다면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시간이 더디 흐르는 방 안에서 차분히 되뇌어 봅니다.

 

두서없이 긴 글을 이만 줄여야겠네요. 일교차가 많이 커서 감기 들기 딱 좋은 날씨입니다. 저는 봄이 오는 줄 알고 버선발로 뛰어나가듯 머리를 박박 밀었는데요, 적분에 찬바람에 아침저녁으로 두통에 시달렸어요. 부디 여러분은 환절기를 잘 넘겨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부쩍 심각해진 코로나19 전염도 조심하시구요.

 

다음 기회에 더 좋은 소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2021.4.19. 시린 머리 수건으로 싸매고, 병역거부자 오경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