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홍입니다. 두 번째로 글을 쓴다는 것은 제가 지금 지내는 세계에 들어선 지 만 2개월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때로는 그 사실에 잔잔하면서도 출렁이지는 않는 고통을 느낍니다. 조심스럽게 고통의 수면을 딛고 올라서면, 앞으로 열두 번 남짓 글을 더 쓰면 제가 속해 있는 세계와 작별할 수 있다는 희망의 촉각을 느낍니다. 낮과 밤처럼 두 상황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제 마음에 드리웁니다. 단지 주기가 하루보다 짧을 뿐, 사실은 스스로도 주기가 어느 정도인지 인식하지 못 한다는 걸 인정하기까지 2개월이 흘렀습니다. 저는 대체로 괜찮지만 괜찮지 않기도 합니다. 망연한 이치겠죠. 저에게도, 저와 다른 세계에서 이 글을 읽고 계실 분들께도요.
아직도 적응 중이지만, 그동안 꽤나 잘 적응해왔습니다. 봄바람에 위태롭게 휘날리는 담벼락 틈새 자란 이름 모를 풀처럼 흔들리던 미결수들과의 생활을 마치고, 적응력은 탁월하지만 자신이 자리 잡게 될 터가 어디인지 알지 못해 밤새 불안에 떨며 잠을 뒤척이던 민들레 씨앗 같던 기결수 몇몇과 차례로 작별한 후에, 남은 기간 동안 함께 자고, 일하고, 먹고, 배설할 사람들을 만나고 일상이 정돈되었습니다. 여느 남성 집단과 다르지 않게 참을 수 없는 가벼운 말로 소통하는 것에는 적응하기 어렵지만, 제가 지냈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관용에 놀라기도 합니다. 아마도 스스로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할 숙명을 인지하고 타인을 포용할 여지가 넓어진 거겠죠. 저에게도 영향을 미쳐, 반대편 세계에서 만난 이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가석방 심사를 통과해, 우주선에 진입하는 비행사와 같은 비장함과 흥분에 휩싸여 절대로 자각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무리를 이탈했습니다. 아직은 먼 미래라서 그런지, 남은 이들의 동요에는 휘말리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새로이 합류하고, 다시 떠나는 이 세계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했을 뿐입니다.
벌써 1년이 넘는 시간을 견딘 수용자들에 비하면 저는 일상적으로 긴장도가 높은 상태입니다. 반대편 세계가 그렇듯, 그동안 이겨낸 시간의 무게 순으로 위계가 정해지는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만, 제가 지냈던 세계에서 하루를 꽉 채워서 긴장을 유지하며 일하고, 공부하고, 토론하고, 사랑하는 이에게 충실했던 습관을 차마 버리지 못한 이유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안식년만 같은 지금의 생활, 매일 오후 9시에 잠들고 오전 6시에 일어나는 습관의 반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다른 종류의 긴장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류의 자극을 줄이기로 했습니다. 욕구를 결핍시킴으로써 적절하고 조절 가능한 스트레스를 마주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경험하지 못했지만 수도자의 자세와 닮은 면도 있겠죠. 이러한 삶의 태도는 노화 방지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 의도하지 않은 작은 희망을 찾아낸 셈입니다.
긴장하는 태도는 신체적인 반응 속도를 높일 뿐만 아니라(저를 아는 분들은 믿지 못하거나, 비웃으며 믿지 않겠지만), 독서를 위한 몰입에 필수적입니다. 온전히 마주하는 만큼 의식에 상흔을 남기는 시간의 무게를 피하려면 저마다 도피할 영역이 필요합니다. 저는 육체적으로는 사육되는 동물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 가운데, 정신적으로는 반대편 세계 또는 경계를 넘어서는 어딘가로 표류하기로 애초부터 계획을 세우고 성실히 이행하고 있습니다. 동료들을 괴롭히며 지인들로부터 도서 기증(또는 대여)을 강요해달라고 부탁했고, 벌써 최근 2년 간 읽었던 것보다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모두가 잠든 사이 소설을 읽고, 바쁜 노동 후에 찾아오는 휴게 시간에 비문학을 읽으며, 일과를 정리하는 방 안에서는 경제학을 공부합니다. 그래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책이 쌓이는 걸 보면서, 소중히 선물을 골라주셨을 분들게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느낍니다. 수년 전부터 도전했던 ‘100대 소설 읽기 프로젝트’를 재가동한 건 큰 성과이지만, 이곳에서 마주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저에게 과분한 과제라는 생각에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 된 고인을 애꿎게 원망합니다. 지금 제 글이 장황하고 어지러우며 표류하는 이유는 오로지 프루스트 때문입니다.
<자본과 이데올로기> 같은 두껍고 무거운 책은 위대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반대편 세계에 이로운 계시로 작용하겠지만, 제가 지내는 세계에서는 시간을 셈하는데 가장 유용한 도구 중 하나입니다. 토마 피케티의 수많은 은혜로운 말과 제안을 수없이 곱씹고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주말을 통으로 바쳐도 부족합니다. 제가 이 성전을 완독할 즈음이면 석가탄신일을 마무리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책 외에도 남은 시간을 헤아릴 때 상처받지 않는 방법을 찾아 헤매다보면, 사고는 끝없는 가지치기를 통해 의식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초과합니다. 시계나 달력을 관찰하지 않을 수 없어 괴롭지만, 하루하루에 연연하지 않기 위해 사회운동의 소중한 파트너이자 동료들이 피땀으로 일구는 일간지를 절독했습니다. 하루를 24시간의 경계에 가두지 않고, 여러 ‘하루들’의 묶음으로 인식하는 방법을 개발합니다. 비타민 영양제 한 통에 담긴 하루를 삼키면 추석이 지나 있을테고, 네 권씩 쌓인 주간지를 폐기하면 하루가 한 달 만큼 버려질 테며, 길이는 조금씩 다르지만 봄이 하루 지나면 여름이, 다음에는 가을과 겨울이 하루씩 흘러갈 거라는 인식의 틀을 확립하는 셈이죠. 그 중에서도 제가 가장 충실한 셈법은 월요일만 유일한 요일로 지정하는 겁니다. 반대편 세계에서 가장 애정했던 토요일은 가장 허무한 휴식으로만 채워져, 공식적인 요일로 지정할 가치도 없습니다. 모든 공휴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모든 요일도, 월요일처럼 끝을 가늠할 수 있게 만드는 시작의 의미를 내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요일의 시간 중 반대편 세계와 닿는 시간만이 진정으로 하루에 포섭될 의미를 갖기 때문에, 모든 유효한 시간을 합쳐도 하루를 채우지 못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의 허무에 잠식됩니다. 무리의 일부는 온 의식이 바다에 잠기는 권태를 경계하라고 경고합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영혼이라 해도, 반대편 세계에서는 꿀만 같던 여유를 견디지 못해 볼품없는 군것질 거리에 손을 대고, 이부자리를 깔고도 초조한 마음을 가중시키는 커피를 입에 적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씁쓸한 웃음으로 이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저 역시 여러 책에 담긴 텍스트를 오가며 의도적으로 주의를 분산시키고,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황색 저널리즘에 다가서는 지상파 채널의 음향 간섭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의식의 불안정성을 해소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에 완벽하게 적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적응시키지 않으려 통제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단 번에 모든 크기의 고통을 안기지 않는 절망에 어떻게 적응할 수 있을까요. 저마다 희망을 되찾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매월 열리는 가석방 심사라든지, 기적처럼 회자되는 사면에 집착할 수밖에요. 삼성 그룹의 최대 상속자에 대한 사면 요구를 반신반의하며 낙수효과의 가능성으로 치환하여 기대하고, 가석방 요건이 점진적으로 완화되는 정책이 그의 공로로 세워진 것이라는 칭송을 아끼지 않는 것이 이 세계의 보편적 관점이라고 합니다.
제 마음을 밝혀주는 반가운 편지에 담아주신 안부를 묻는 질문에는 언제나 괜찮다고 답합니다. 그 순간만큼 괜찮은 순간이 없기 때문인데, 이건 여러분과 제가 속한 세계가 지닌 차이 때문은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괜찮지 않다고 답한 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보낸 편지함’을 열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프라이버시가 없는 것도, 재래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도 그만큼 불편하지는 않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지난 편지에 썼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분리되어 있는 것, 그리고 그 사실을 가장 잔이하게 마주하게 만드는 두 세계 사이의 견고한 벽을 자처하는 접견실의 구조입니다. 체념과 순응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 벽을 넘어설 시간이 단축되지 않는다는 섭리를 기꺼이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사회운동가로서 절대로 꺾이지 말라는 당부를 받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것도 신경 쓰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걱정하셨는데, 교정시설 직원들은 순차적으로 백신을 접종하고 있고, 마스크도 잘 배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편 세계의 높은 백신 거부율이 걱정됩니다. ‘양심적 거부’라는 용어가 백신 접종으로부터 탄생했다는 걸 <면역에 관하여>를 통해 알았습니다. <평화는 처음이라>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안보는 방역과 사회보장제도에 더욱 큰 비중을 두고 있는데, 군대와는 달리 집단면역 거부에 대해 관용적인 세계의 흐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백신 접종에 대한 양심적 거부도 초기에는 법률에 의해 규제되고 처벌되었으나, 종국에는 의학적·종교적·철학적 이유를 근거로 각자의 양심에 따라 거부할 권리를 인정했다는 것을 율라비스를 통해 알게 됐습니다. 어쩌면 저와 같이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과 백신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은 정치·사회·경제적 입장이 반대되는 경우가 많겠지만, 양심적 거부는 장권을 두 영역 모두에서 보장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만을 바랍니다.
간결하고, 담백하고, 비판적이었던 제 글의 장점은 서로 다른 세계를 교차하며 변한 것 같습니다. 다시 볼 수 없지만, 슬픔과 우수에 차오른 고백이었던 지난 글과는 너무 달라서 걱정입니다.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지인들로부터 비평받을 수 없는 것도 이 세계에서 느낀 고역에 추가해야겠습니다.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할 정도의 용기는 남아있습니다. 글에 대한 비평이 담겨 있더라도, 서신과 편지는 제게 큰 희망이 됩니다. 그 외에 저를 지탱하는 현재의 희망은 사연 뿐인데, 제가 속하지 않은 세계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지난 편지 이후부터 오늘까지의 제 하루를 고백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모두 건강하고 평안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2021년 5월 5일
홍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