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희(전쟁없는세상 병역거부팀, 징병제폐지를위한시민연대)

 

전쟁없는세상 주: 스페인의 인수미시온 운동을 소개한 글을 2회차에 걸쳐서 올릴 예정입니다. 이 글은 두 번째 글로 앞의 글과 이어집니다. 

 

인수미시온의 종결

스페인 정부는 1998년부터 군 복무자와 대체복무자의 복무 기간을 동일하게 조정하게 된다. 이미 이쯤 되면 대기중인 대체복무자가 수천 명에 달할 정도였다. 정부는 이 시기부터 점점 평화수감자들을 석방하고 사면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스페인 정부는 2001년 신병 징집을 중단하고 국회는 병역거부를 비범죄화 시켰다(이 와중에 보수당인 인민당은 표결을 거부했다).

2002년, 스페인 형법에서 병역거부에 관한 모든 조항이 삭제되고 평화수감자들에 대한 일제 사면이 이루어지면서 인수미시온 운동도 종결되었다. 현재 이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각 지역의 풀뿌리 운동, 시민 운동, 생태운동 등으로 스며들었고 당시 겪었던 시민불복종 운동의 경험은 현재 스페인 시민운동의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가?

인수미시온 운동은 운동 주체들이 시대 상황을 매우 잘 응용한 것이 주효했다고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최초의 병역거부자는 프랑코 정권이 살아있을 때 등장했지만, 당시 사회 저변에 깔려있던 민주화 운동 세력과 적절히 결합했고 활동가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프랑코 정권은 1975년 끝났고 과거의 일은 망각의 협약(Pact of forgetting) 이후 적당히 덮히는 듯 했으나 사회단체들은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프랑코 정권 청산을 위해 스페인에 만연한 군사주의와 파시즘을 없애야 했다. 결국 반군사주의 운동이 필요해졌고, 직접 행동으로서 병역거부 운동을 활용했다. 여기에 각 정당과 정파, 지역들이 합종연횡하여 단결했기에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병역거부자들이 등장했다. 게다가 80년대 중반 하드코어 펑크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스페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사조는 무정부주의와 자율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펑크족들은 자연스럽게 인수미시온 운동에 녹아들면서 운동의 확산에 일조했다.[1]

스페인에는 징병에 대한 저항감이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스페인에는 18세기 내내 카를로스파 전쟁(Guerras Carlistas)이라는 내전이 세 차례나 일어났으며, 20세기 전반기에는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리프전쟁도 있었다. 이 시기에는 징병에 대한 조직적이지 않은 저항이 계속 있어왔다. 또한 20세기 이후 스페인에는 강력한 무정부주의 조합운동이 있었다. 이들 또한 국가의 군대에 복무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스페인은 각 지역의 문화와 풍습이 많이 다르고 경우에 따라서는 고도의 자치를 부여 받은 지역들도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들은 중앙 정부의 군대에 불만이 많았고, 실제로 스페인 내전 동안 서로 전투를 벌였다. 인수미시온 운동은 특히 스페인 내 소수민족에게 강력한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프랑코 정권부터 이어져온 군부에 적대적이었다. 바스크, 카탈로니아, 갈리시아, 카나리아의 민족주의 세력들 중에는 평화주의와는 다른 이유로 인수미시온에 합류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반제국주의자였으나 반군사주의자는 아니었고, 스페인의 군대에 복무하기를 거부했다. 나바라주(스페인의 바스크 지방)의 젊은이들의 병역거부율은 56퍼센트나 달했다.[2] 징병제가 중단될 즈음에는 완전거부자의 숫자가 징병된 병력의 숫자보다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운동이 성공한 데에는 상황에 따라 전략을 변화시킨 것도 주요 요인으로 평가된다. 몇몇 병역거부자들은 자신들이 국제적으로 양심수로 분류된다는 사실을 알고, 수감 사실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한편 다른 그룹은 더 많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운동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옥행을 합법적으로 피하는 전략을 취했다. 또 다른 그룹들은(일명 “투명인간”이라 불리던 사람들) 법원에 대한 불복종을 선언하고 재판에도 출석하지 않았으며 계속 도망 다녔다. 이들은 자신의 신념을 법원이 판단할 권한을 거부했으며, 대체복무제는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대체로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이 전략을 택했고, 이들은 도시에서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부는 검거되었지만 많은 이들이 징병대상 연령을 넘길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이들은 병역거부의 이슈를 넘어서 반군사주의와 관련한 다양한 이슈에 결합했고, 상황에 따라 전략을 변화시켰지만 항상 목표를 일정하게 유지했다. 이들은 스페인의 나토 가입 반대운동에도 적극적이었고, 대체복무제에 관련한 단체나 기업도 보이콧했다. 그러나 더 많은 젊은이들이 대체복무를 택함으로써 군대에 가지 않는 것도 지지했다. 또한 국방세 납부 반대운동에도 참여했고 보수 정당의 “군 전문화” 기치에 따른 징병 축소 공약에도 반대로 맞섰다. 군비 축소와 징병제 폐지를 동시에 이끌어 낸 것은 인수미시온이 거의 유일하다 할 수 있다.

 

 결론

인수미시온 운동은 단기간에 끝난 운동도 아니며, 상당히 광범위한 계층의 인원들이 지속적으로 참여한 운동이었다. 아마도 스페인의 상황은 한국과 많이 다르고 당시와는 기술의 발전도 차이가 있기에, 이 사례를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지금 한국에서 병역거부자나 탈영병이 도망 다니며 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들의 방식은 다양한 영감을 준다.

인수미시온 운동의 종료 이후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활동가들과, 역설적으로 점점 축소되는 평화운동을 두고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다고 한다. 군은 현대화 되고 정예화 되어서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여전히 스페인은 나토 회원국이며 스페인군의 해외 파병도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시민불복종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인수미시온 운동은 하나의 유산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들이 평화교육이나 국방세 납부 반대, 지역자치 운동으로 발전한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인수미시온 운동을 다시 되짚게 될 때 사람들은 이러한 질문에 도달하게 될 지도 모른다. “세상을 바꾸되, 어떤 세상으로 바꿀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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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당시 인수미시온 운동과 관련하여 발매된 스페인의 하드코어 펑크 컴필레이션 앨범. https://youtu.be/Pvpjc92K3Gc

[2] https://rebelion.org/ejercito-y-navar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