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령(시셰퍼드 코리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수도 키이우를 비롯해 여러 도시는 초토화가 되었고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전쟁은 생동하는 모든 순간을 정지시켰고 생존해야 한다는 공포와 두려움만 남겼다.
전쟁없는세상 활동가로부터 전쟁 중 고통받는 동물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 맨 처음 떠올린 것은 전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와 거대한 스케일이었다. 그래서 동물이 당한 피해를 크고 넓게 생각하려 애썼다. 이를테면 인류역사상 전쟁이 야기한 동물의 피해를 수치화한 거시적인 통계 같은 걸 찾고 있었다. 하지만 넘쳐나는 숫자들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건 없었다. 전쟁이라는 광대함에 가려지지 않도록, 당장의 동물의 위급함을 글로 잘 쓰고 싶었다.
‘반려’의 삶이 사라진 반려동물
고민이 깊어질 때쯤, 올해 2월 우크라이나 러시아 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보호자를 한 달 내내 집 앞에서 기다린 반려견 ‘레니’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리고 레니에게 이입해보기 시작했다. 상상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 오지를 않는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질 않고, 왜 나타나지 않는지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면 어떨까. 불안하다. 그리고 무섭다. 레니도 그랬을 것이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함께 산책하던 이가, 소파에 서로 기대앉아서 체온을 나누던 이가 일시에 사라졌다. 레니는 이후에 임시 거처에서 보호되다가 새로운 가족을 만났지만, 보호자를 잃은 슬픔과 두려움은 레니에게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다. 전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에게도 깊은 절망과 두려움을 안긴다. 매일 냄새 맡으며 걸어다니던 산책로가 사라지고, 누워서 낮잠 자던 뒷마당이 산산조각 나고, 텅 빈 집과 거리에 남겨져 엄청난 포탄의 굉음을 홀로 견뎌야 한다. 전쟁은 동물에게서 ‘안전하다는 느낌’, 그리고 반려하는 삶을 순식간에 빼앗아버린다.

러시아 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보호자를 기다리는 레니의 모습 _ 트위터 @Gerashchenko_en
도망칠 권리조차 박탈당한 동물원 동물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인간의 유희를 위해 동물원에 전시되며 학대당하던 동물들의 상황은 어떨까. 2000년 초반에 일어난 이라크 전쟁 중, 바그다드 동물원에 갇힌 동물을 구조하기 위해 이라크로 들어간 민간인 로렌스 앤서니(Lawrence Anthony)의 에세이, ‘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에서 동물의 처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들은 스스로 보호하기 힘든 지경에 처하며, 전시동물 즉 동물원에 갇힌 동물은 더욱 그렇다며 강조하면서,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원의 동물들은 인간이 구조해주지 않는한 우리 밖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굶주림과 갈증 속에서 서서히 고통스럽게 죽어간다고 증언했다.
인간에 의해 단축되는 동물의 시간
과학 저널 네이처(Nature)는 ‘전쟁의 파괴력이 인간뿐 아니라 야생동물의 개체수 감소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밝혔다. 또 미국의 생태학자 조슈아 다스킨(Joshua Daskin) 연구팀은 ‘크든 작든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의 개체수가 줄어들며, 특히 교전이나 전쟁 무기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실제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흑해 연안에서 수천 마리의 돌고래가 죽은 채로 발견됐는데 많은 과학자가 전쟁으로 인한 해양 오염과 전쟁 무기의 소음을 주원인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렇듯 자연의 섭리 속에서 자기 생을 살던 야생동물들은 전쟁이라는 가장 인위적인 방식으로 생태계에 난입한 인간 때문에 갑자기 생을 마감하게 된다.

흑해 돌고래가 죽은 채로 발견된 모습_ 영국 가디언지 뉴스 캡처
인간 쇼비니즘의 절정, 동물을 전쟁 도구로 전락시키다
인간 쇼비니즘(chauvinism), 즉 인간중심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 외의 모든 존재를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인간을 위한 동물 착취는 전쟁의 영역에서도 고스란히 자행되고 있는데, 얼마 전 미국의 군사전문매체 USNI(United States Naval Institute)는 러시아군이 적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 방어용으로 해저에 돌고래를 배치했다고 폭로했다. 사실 동물을 군사 목적으로 이용해온 것은 러시아뿐만이 아니다. 아니, 심지어 동물의 전쟁 도구화는 긴 역사를 지녔다. 또 전쟁 전략과 무기를 위한 실험 대상으로 동물이 동원되기도 하는데, 돼지에게 갖가지 부상(총상, 화상)을 입혀 어떻게 출혈이 일어나고 죽어가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부상자 전술에 도입한다든지, 화학전을 위해 원숭이를 가두고 화학물질의 위험 정도를 실험하는 것이 그렇다. 이처럼 인간중심주의에 기반한 인간의 패악은 엄청난
동물의 희생을 야기하고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알지조차 못하는 동물들의 절규를 끊임없이 낳고 있다.
‘만물의 영장’, 이 지겨운 클리셰
“Are we smart enough to know how smart animals are?(우리는 동물이 얼마나 똑똑한지 알만큼 충분히 똑똑한가?)”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 의 책 제목이다. 프란스 드 발은 수십 년간 동물을 연구해오며 동물의 지능과 감정, 공감 능력 등이 경이로운 수준임을 확인했다. 동시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누리며, 인간이 동물을 지배해도 된다는 통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드발은 우리의 상상보다 동물이 훨씬 똑똑하며, 결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지 않음을 주장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인간은 동물과 이 밖의 다른 생명들을 관리자의 역할로서 이들을 존중하며 관리해온 게 아니라 단지 인간만큼 똑똑한 동물을 죽이고, 착취하고, 이용하면서 인류 발전을 이룩해낸 것일 뿐이다.
생명과 사물의 차이를,
행복과 흥분의 차이를,
수단과 목적의 차이를,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과 폭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을 향해 이미 첫걸음을 뗀 셈이다.
– 에리히 프롬,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일부 발췌
인간이 책임 있는 만물의 관리자 노릇을 해야겠다면 적어도 이 ‘차이’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삶을 사랑하는 길이자, 전쟁이라는, 또 동물 착취라는 이 지겨운 폭력의 역사를 끝내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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