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기(장항습지 지뢰폭파 피해자, 평화운동가)
다음은 2023년 4월 8일 광주비엔날레에서 열린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소: 멸종 전쟁’ 2일차 한화 그룹과 대한민국 국방부를 상대로 한 증거 재판에서 김철기 님이 증인으로 출석해 증언했던 내용입니다. 김철기님은 한강 하류 장항 습지 정화 작업 도중 지뢰 폭파로 한쪽 다리를 잃은 지뢰 폭파 피해자입니다. 메인 이미지는 녹색연합 서재철 전문위원께서 제공해주신 파주의 지오피 철책선 순찰로 옆에 설치된 대인지뢰 경고판 사진입니다. (이 글은 지뢰 폭파 사고 당시 상황을 비교적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트라우마에 취약하신 분들은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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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김철기라고 하고요, 경기도 고양시에 거주하고 있고 50대 후반의 평범한 시민이자 국가폭력의 피해자입니다.
2021년 6월 4일날 저는 오른쪽 다리가 처참하게 폭파되는 그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제가 들려드릴 이야기는 참으로 많은데 좀 줄여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곳에서 일을 해야만 했고, 또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했고, 그리고 그 이후에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가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는 장항습지라는 아주 훌륭한 습지가 있습니다. 보존 가치가 높은 그런 곳이죠. 그곳이 2021년 5월 달에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보존 가치가 높고 그 안에 아주 희귀한 동물과 생물들을 보존해야만 한다는 어떤 그런 가치가 있는 곳을 지정해 주는 제도입니다. 그런 람사르 습지로 지정이 됐고 그 안에는 실제로 멸종위기종인 재두루미를 비롯해서 말똥게라든지 그리고 굉장히 많은 개체의 동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저희가 속해 있는 곳은 사회적 협동조합 ‘한강’이라는 곳이었는데요, 거기서 이 장항습지 정화 작업을 하자라고 고양시에 제안을 했습니다. 고양시에서는 환경부의 한강유역청과도 상의를 했고, 그리고 그곳을 여전히 관리하고 있던 육군 9사단 이런 곳과도 협의를 해서 고양시에서 협동조합 ‘한강’에 용역을 줘서 저희가 그곳을 맡아서 정화 작업을 2019년도부터 하기 시작했습니다. 2019년, 2020년, 2021년 이렇게 3년째 이곳에서 정화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장항습지가 한강 하류 지역이라서 한강 위쪽에서 댐이 물을 방류하게 되면 굉장히 많은 부유 쓰레기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그런 쓰레기들이, 엄청난 양의 쓰레기들이 들어옵니다. 업소의 냉장고라든지 개인 트럭의 타이어라든지 이런 것들조차 다 떠내려오고 있고, 그런 것들을 다 치우는 그런 작업들을 해왔습니다. 3년째 그걸 해오고 있었고요. 저 역시 그곳에서 3년째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2019년, 2020년 이렇게 해오다가 2021년에는 날이 좀 풀린 이후인 4월달에 다시 그곳에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6월 3일은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그래서 작업을 할 수가 없었죠. 저희는 하루 쉬었습니다. 하루 쉬고 좀 이렇게 산뜻한 마음으로, 화창하게 맑은 6월 4일에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보통 아침 7시 정도에 그곳에 모이는데요, 장항습지에 들어갈 수 있는 통문이 2개가 있습니다. 철조망으로 둘러쌓인 채 철제로 만들어진 통문이 2개가 있는데, 문에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자물쇠 관리는 언제나 9사단의 병사들이 합니다. 이틀에 한 번씩 와서 비밀번호를 바꾸고 그 바뀐 비밀번호를 한강유역청의 직원에게 전달을 하면 한강유역청의 직원은 그곳에 출입을 하는 우리 같은 작업을 하는 작업자들한테 문자로 보내줍니다.
참고로 9사단에서 2020년 10월 11월 두 달 동안 그곳에서 지뢰 탐지 작업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뢰 탐지 작업이라는 것은 정말 철저하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실 저희가 다 정화 작업한 곳을 뒤따라오면서 지뢰 탐지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그게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우리가 먼저 하고 그 뒤에서 지뢰를 탐지한다는 거는 말이 안 되는 거죠. 아무튼 형식적으로 그렇게 두 달 동안 지뢰 탐지를 하고 그곳에 지뢰 탐지를 했다라고 깃발을 꽂아놨습니다.
아무튼 6월 4일 날 비가 그친 다음에 맑은 날 저희가 날 들어가서 작업을 하다가 9시 경으로 기억합니다. 잠시 쉬면서 커피도 한 잔 마시고, 다시 10시까지 작업을 하자고 했습니다. 이 작업 들어간 게 6명인데요. 여섯 명이 각자가 흩어져서 유입된 쓰레기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밑에 쓰레기들을 마대에다가 담아 모아가지고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곳까지 들고나가는 그런 작업인데요. 그 작업을 9시에 이제 시작을 했습니다.

세대간 기후범죄 재판에서 증언 중인 김철기님
과연 전날 비가 많이 왔고 그곳이 다 갈대 고사체들이 쓰러져 있는 곳이라 그 위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장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무릎까지는 오는 장화를 싣고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9시간 40분이 좀 넘은 시간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직접적인 소리를 못 들었는데 굉장히 놀라운, 아주 강력한 충격을 받은 게… 제 기억으로는 뭔가 굉장히 강력한 스프링을 밟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튕겨져 나갔으니까요. 뭔가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데 튕겨져 나가면서 ‘굉장히 강력한 스프링을 밟았구나’라는 생각으로 뒤로 넘어졌는데 순간 귀가 멍해지는 거예요. 소리가 안 들리고 귀가 멍해지면서 저 멀리서 사람들이 갑자기 제 이름으로 부르면서, “김철기씨 어떡해!” 소리를 지르는데 마치 소리가 저 멀리서, 산에서 들리는 메아리 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저한테는. 제 귀가 멍해지니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고통도 못 느꼈습니다.
이거 이게 뭐지 무슨 얘기지? 뭔가 느낌이 이상해서 오른쪽 다리를 들어봤습니다. 오른쪽 다리를 들어봤더니 장화 아래 쪽에 무릎 아래 쪽의 부분이 폭파되어서 없는 겁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겠습니다. 저는 굉장히 놀래서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에 있던 동료들도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선뜻 다가오지 못하더라고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전쟁 시기도 아니고 평상시에 초기 신도시인 일산에서, 그런 곳에서, 지뢰가 폭파되어서 사람의 신체 일부가 날라갔는데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놀라서 선뜻 다가오지 못하다가 그래도 그분들도 정신을 차리고 해서 저를 좀 반듯한 데 누이고 그곳에서 지혈을 하고 119에 신고를 하고 통문 쪽으로 뛰어나가고 하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그때까지는 저는 고통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거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거 아닌가’라는 어떤 그런 공포감을, 신체에 느껴지는 고통보다는 그런 공포감 때문에 더 많이 떨었던 것 같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사고 난 지점이 통문 두 개를 통과를 해야 되는 지역이고요 또 걸어서 가야 되는 구역이고 갯골을 두 개를 넘어야 하는 곳이어서 119에 신고를 해도 빨리 오지 못했습니다. 제 기억으로 1시간이 넘게 그렇게 그 상태로 지혈만 한 상태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고요. 이렇게 죽어갈 수 있겠구나, 이렇게 죽는 거구나, 그러면서 이제 과거의 일들이 생각이 나고 그런 상황이 었습니다. 1시간여 만에 이제 119가 와서 제 다리에 치료를 하기 시작할 때부터 신체적인 고통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제 다리 쪽에다가 이제 소독제를 뿌리고 붕대를 감고 이렇게 상처 부위를 건드리는 그 순간부터 죽음의 아픔이, 그 아픔이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아픔이 밀려오는데, 제가 주위에 있는 동료들, 다 저보다 선배들이었는데요, “형 차라리 날 죽여줘. 이렇게 살아서 뭐해.” 너무 아프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거예요. “죽여줘 차라리. 나 죽는 게 낫겠어.” 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그렇게들 얘기를 하더라고요. 저도 그 기억이 납니다.
낮 1시에 의정부 성모병원에 도착을 해서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의사가 저한테 무릎 아래 15cm를 남기고 절단 수술을 할 거고, 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더 위를 자를 수도 있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무릎 위까지 자를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최대한 무릎 아래를 지키는 쪽으로 열심히 노력을 해보겠다고요.
사고가 난 그 순간부터 병원에 누워서 수술을 한다고 하는 3시 반, 저한테 이제 마취제를 놓아서 제가 이제 마취에 취해서 잠이 들 때까지, 그때까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동영상이 돌아가듯이 기억에 나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어요. 그게 가끔 생각이 나고, 꿈에서 꿈을 꾸게 됩니다. 저는 지금도 생각을 하는데 ‘차라리 사고가 났을 때 기절을 했으면 어땠을까. 그럼 수술 받기까지 겪은 상황과 고통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지 않을 텐데’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수술을 하고 병원에 입원했는데 한 일주일이 지났는데 수술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아물지 않아서 괴사가 다시 일어나서 2차 수술까지 했습니다. 결국 무릎 아래 5cm를 남기고 전부 절단을 하게 됐습니다. 지금은 5cm를 남긴 그 아랫부분은 의족을 끼고 지금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재활 교육을 받고 해서 지금은 이렇게 다행히 조금씩 걷게 되었는데요. 이게 다치고 난 이후에 굉장히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하고… 또 이 절단 환자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건데 환상통이라는 게 있습니다. 환상통이라는 게 뭐냐면 없는 부위가 아픈 거예요. 문득문득 종아리가 아파서 만져보면 종아리가 없거든요. 없는 부분이 아픈 거예요. 이 환상통에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습니다. 평생 갈 수밖에 없는 그런 그런 통증입니다, 환상통은. 지금도 약을 먹고 있는데요, 이 약을 안 먹게 되면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정신적인 치료까지도 해주는 약이니까 그 약을 평생 먹어야 하는 거죠.
제가 다쳤던 얘기를 좀 했는데요. 그 이후에 어떻게 됐냐. 다치고 나서 경찰에서 일단 피해자 조사를 받았습니다. 경찰에서는 한결 같이 자기네들의 짜여진 시나리오를 갖고 와서 질문을 하더라고요. 고양시나 한강유역청이나 제가 소속돼 있던 한강이라는 협동조합에서 안전교육을 제대로 시켰냐? 그곳에 지뢰가 있어서 터졌는데 지뢰가 왜 거기 있는지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않고, 그곳에 지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안전 장비를 하고 들어갔냐? 안전 장치는 제대로 받았냐? 그러니까 장갑도 두꺼운 장갑이라든지 신발도 지뢰가 터졌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신발을 받은 적이 있느냐, 말도 안 되는 그런 소리를 하면서 한 두 시간여를 조사를 받으면서 마지막에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만약에 어떤 처벌을 받아야 되는 주체가 나온다고 하면 처벌을 원하느냐고.
제가 이렇게 내가 대답했습니다. 처벌을 받아야 되는 주체는 국가권력이라고. 국가가 제대로 관리를 못했기 때문에 그런 피해가 생겼다고. 지뢰가 언제 어떻게 심어졌는지 모르지만, 어떻게 거기까지 유입됐는지 모르겠지만 국방부가 제대로 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방부에서 처벌을 받는다고 하면은 처벌을 원하지만 다른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다면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 이후에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고양시 공무원 3명, 한강교육청 공무원 2명, 사회적 협동조합의 고양 지부장 1명 이렇게 6명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를 했습니다. 검찰에서 검토를 했는데 1년 만에 무혐의 처벌이 나와서 다행히 그분들은 처벌을 받지 않게 됐습니다.
어떤 주체가 처벌을 받거나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저도 소송을 걸었고 지금 진행중입니다. 국방부에서는 여전히 자기네들은 그 책임을 고양시에 이관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은 한강유역청에서 관리를 했기 때문에 자기네들이 책임이 아니다라고 얘기를 합니다.
근데 제가 처음에 얘기했지만 통문이 두 개 있다고 말씀드렸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통문 비밀번호를 바꾸는 일은 원사와 그 밑에 병사가 합니다. 그리고 국방부에서는 허가 받은 사람 외에는 그곳에 못들어가게 출입 통제를 하고 있으니, 분명히 국방부에서 관리를 하고 있던 게 맞아요. 그런데 자기네 책임이 없다고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과연 그들이 책임이 없을까요?
전쟁없는세상 발표자도 말씀을 해 주셨는데, 우리나라 DMZ 지역에도, 후방 지역에까지 지뢰가 많이 설치가 돼 있습니다. 많이 제거를 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양의 지뢰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뢰 사고 피해자가 2천여 명이고, 지뢰 불발탄까지 포함하면 6천여 명의 피해자가 국내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피해자들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게 국방부의 태도입니다. 국방부는 왜 자기네들이 당연히 관리 감독을 해야 되는 그런 지뢰가 터져서 사고가 났는데도 왜 그들은 그것을 자기는 책임이 아니라고 할까요? 빠져나가기 위한 어떤 기술들, 핑계들만 다 만들어놨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래 전에 1960년대, 1970년대에 전방 지역에서 다친 피해자분들을 지금 제가 가끔 만나고 있는데요. 그분들을 만나보면 어떤 분들은 각서를 쓴 분들 있더라고요. “이곳에 들어가서 일을 하다가 다쳤을 경우에는 다 내 책임이다.” 이런 각서를 쓰고 들어가서 작업을 하다가 다쳤기 때문에 책임을 못 묻는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런 빠져나갈 수 있는 어떤 구실들만 만들어 놓고 그렇게 책임을 회피하고 있습니다.
무기가, 지뢰가 왜 이렇게 사람들한테 아픔을 줘야 하는지, 그리고 아픔을 줬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지 너무 분통이 터집니다.

일명 ‘발목지뢰’라고도 부르는 M14대인지뢰. 김철기님이 사고를 당한 지뢰도 M14대인지뢰로 추정된다. 사진 제공 서재철
이 일을 겪은 후 제 삶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제가 지뢰를 밟았습니다. ‘이 지뢰가 무엇입니까? 전쟁의 어떤 산물이다. 그럼 우리나라가 왜 분단이 되었는가?’부터 또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일제강점기 이후에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이 되지 않으면서 우리는 또 분단이 됐습니다. 분단된 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났죠. 전쟁 이후에 이후에 수많은 불발탄과 지뢰들이 전방과 후방에 흩어져 있습니다. 결국은 분단의 아픔입니다. 분단 국가에 살고 있잖아요 우리는. 제가 겪고 나서 보니 분단의 아픔이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그런 사고를 겪고 나니까 “아니 일산에서 지뢰가 터졌어?”라고 놀라는 분들이 많습니다. 일산뿐만이 아닙니다. 서울에서도 터질 수 있고, 어디서든 사고는 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방치하고 우리가 모르고 그냥 잊고 스쳐가는 것 뿐입니다. 항상 그 기억에 우리는 분단의 아픔에 우리는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걸 극복하기 위해서 뭘 어떻게 해야 되는가. 뭘 다시 해야 되는가를 저는 생각했습니다.
저는 지금 고양시 장애인 편의증진 기술 지원센터라는 곳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행히 고양시에서 사무직으로 일을 할 수 있도록 취업 자리를 만들어줘서 최저임금이지만 그걸 받고 지금 사무직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제가 직접 육체 노동 쪽으로 많이 했었는데요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다리가 불편하니까. 다리가 불편할 때 우리는 제일 가장 편안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 걷는 거죠. 제가 사고 이후로 재활하면서 하루에 한두 시간 정도, 한 평균 7킬로미터를 걷습니다. 걸으면서 잊어버리는 거죠. 가만히 있으면 아까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환상통이 떠오르니까요.
제가 이 자리에 와서 이렇게 얘기하기까지 정말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트라우마를 이겨내야 한다는 거, 많은 사람 앞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거,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아직도 굉장히 많이 힘들게 다가옵니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운전을 할 때 뒤에서 경적 소리가 울리면 너무 깜짝 놀랍니다. 또 자다가 깼을 때, 그 왜 있잖아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갑자기 어느 나라 낯선 언어도 모르는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고 깰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가려고 딱 일어섰을 때 깜짝놀랍니다. ‘아 맞아 나 다리가 하나가 없지. 내가 왜 이렇게 다리가 하나가 없는 삶을 살아야 될까.’
이렇게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저는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전쟁 없는 세상 만들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도와주신다면, 같이 도와주신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다 생각합니다. 앞서 전쟁없는세상에서 기업들의 무기 수출에 관해서 말씀 해 주셨습니다. 국방부가, 국가가 좀 더 이런 부분들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무기가 없는 그런 세상, 전쟁이 없는 그런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어 나가는 데 여러분도 같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