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독서공동체 ‘들불’1) 운영자, 시민단체 활동가)
전쟁없는세상: 3월 21일(금)에 진행한 《전쟁 없는 세상》북토크 ‘비폭력 저항이 바꾸는 세계’의 참가 후기를 독서공동체 ‘들불’의 운영자 구구님께서 써주셨습니다. 행사 사진과 책 서평(한베평화재단 활동가 권현우 님의 서평, 멸종반란 활동가 희음 님의 서평)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집회 참석을 위해 거의 매일 광화문에 간다. 6시 30분쯤 도착하면 어김없이 커다란 스피커를 단 승용차 한 대를 마주친다. 차에 달린 큰 스피커에서는 알아듣기 힘든 선동적인 말들이 흘러 나온다. 그러다 무시하기 힘든 한 마디가 또렷하게 울려 퍼진다. ‘전쟁을 선포하라… 전쟁을 선포하라…’
얼마 전 만난 옛 직장 동료는 이제 시민들도 무장할 때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트위터(현 X)의 일부 이용자가 2차 계엄과 무력 충돌 가능성에 관해 쓴 트윗을 따라 읽으며, 이제 물러설 곳이 없으니 시민단체 측에서 보급 가능한 무기를 확보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동료는 그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집회를 ‘전쟁’에 빗댔다. 이겨야 해, 싸워야 해, 모두가 돌진해야 해. 이제 우리도 권력자들에게 위력을 보여줘야 해. 동료들의 말 끝마다 ‘전쟁을 선포하라’는 거친 음성이 따라 붙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별 다른 대꾸없이 애꿎은 빈 잔만 휘저었다. 전쟁, 폭력은 절대 안된다고 이야기하고 다니던 나였지만, 막상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돌파구가 없다는 막막함이 몰려 왔다. 이런 마음으로 동료들을 설득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과 헤어진 후 지하철에 앉아 버릇처럼 뉴스 어플을 켰다. 기다리던 윤석열 파면 선고 소식은 어디에도 없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 기사가 메인에 크게 실려 있었다. 다른 것보다 대담에 임하는 트럼프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 ‘우크라이나가 좀 더 힘 있는 국가였다면 달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가 떠올린 ‘힘’이란 게 뭐지? 나는 왜 문제 해결 방안을 ‘힘’의 논리 안에서 찾으려고 한 거지? 세계도, 동료들도, 그리고 나도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희생, 폭력, 그리고 어긋난 힘의 논리가 익숙한 세계, 의심도 질문도 없는 평범한 악의 세계로 향해가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문득 《전쟁 없는 세상》 출간 기념 북토크를 신청해둔 게 떠올랐다. 미뤄오던 독서를 하고 북토크에 참여하면 귓가에 웅웅거리며 맴돌던 ‘전쟁을 선포하라’는 말에 더 큰 울림으로 저항할 수 있을까? 기대 반 막막함 반으로 책을 펼쳐 들었다.
이 책은 저자인 마이켄 율 쇠렌센과 평화주의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상의 회의론자가 대화를 나누는 방식으로, 평화주의와 관련한 설득의 방법론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전략서다.2) 처음 몇 장을 넘길 때만 해도 저자가 오죽 답답했으면 이러한 서술 방식을 택했을까 싶었는데, 읽다보니 점점 회의론자의 일면을 나 역시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미주를 제외하면 155쪽에 불과한 얇은 책을 배움과 성찰을 거듭하느라 오래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3월 21일, 북토크 당일이 되었다. 책을 덮고 나니 소란스럽던 마음이 조금 잠잠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물음표가 남아 있었다. 말로, 몸으로, 함께 하는 것으로 가능한 변화는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을까? 여러 갈래로 틈입해오는 질문들을 품은 채 북토크 자리에 앉았다.
이번 북토크의 패널로는 전쟁없는세상(이하 전없세) 활동가이자 이 책의 번역가인 오리(최정민), 전없세 활동가이자 인권연극제 대표인 쭈야, 그리고 은유 작가가 참여했다.

왼쪽부터 은유 작가, 역자이기도 한 오리(최정민) 활동가, 그리고 사회자 쭈야 활동가
패널들은 각자가 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을 공유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리는 폭력에 비해 비폭력 운동은 천 개, 만 개의 색깔과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이 책에서 언급된 비폭력 운동의 사례 중 ‘덴마크’의 사례3)를 소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점령 하에 놓였던 덴마크는 ‘2분 파업’이라는 짧고 안전한 방식으로 저항의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오리는 저항을 지지하는 모두가 무리 없이 참여하기 좋았지만 그 영향력은 상당했다는 점에서 덴마크의 사례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으면서 누구도 다치지 않는 조용한 저항이라니, 내겐 그 상상력과 영향력이 낯설고 급진적으로 느껴졌다.
이에 덧붙여 은유 작가는 부모가 된 입장에서 특히 인상 깊게 읽은 사례로 교사, 학부모를 조직해 저항운동을 펼친 노르웨이, 코소보의 저항을 언급했다. 그는 저항운동이 현 상태를 유지하는 지지 기반을 무너뜨리는데 의미가 있었다고 이야기하며, 이 책의 사례들을 통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곧 폭력에 협조하는 일이란 걸 실감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나 자신도 현 상태를 유지하는 데 일조해왔다는 생각에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지금껏 나는 얼마나 많은 폭력에 침묵해왔으며, 그것이 내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해왔을까? 이따금씩 회피했던 이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질문을 곱씹다 보니 평화는 단순한 구호나 선언이 아닌, 매일 스스로 되물어야 하는 삶의 태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쭈야가 전없세에서 진행하는 비폭력 트레이닝 중 ‘권력의 축’ 이라는 툴을 언급했다. 비폭력트레이너의 진행으로 이루어지는 프로그램에서 참여자들은 ‘권력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떠한 축들이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지’를 함께 살핀다고 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권력을 지탱하는 여러 축 중 한 두 개의 축만 무너져도 권력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권력은 거대하고, 단단하고, 개인이 대항하기엔 멀게만 느껴졌는데 실은 그것이 불안정한 구조 위에 세워져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쭈야는 권력의 구조를 약화시키는 방법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음을 상기시켰다. 쭈야의 이 말에 나는 희미한 희망을 발견한 것 같아 조금 안도했다. 거창하거나 완벽한 계획이 아니어도,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분명 있을 터였다.

우리가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을 분석하는 툴 ‘권력의 기둥’. 권력은 막강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기둥을 몇 개만 제거하더라도 쉽사리 붕괴될 수 있다. 이 툴은 권력을 떠받치는 기둥들을 파악하고 그 중 어떤 기둥을 타겟으로 캠페인을 진행할지 파악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다. 이미지 출처는 guide2change.org
이야기는 점차 확장되어 전없세 활동가들이 평화를 실천하기 위해 어떠한 전략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공유로 이어졌다. 오리는 비폭력 운동은 단순히 ‘폭력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넘어서, 장기적인 전략을 가지고 시민을 조직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군수산업 내 거래가 활발해지고, 군수산업체의 주가가 오르기 시작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전쟁이 준비되고 있을 때 그것을 멈춰야 한다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야 분노하며 뒤늦게 연대했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떠올랐다. 전쟁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이미 어딘가에서 천천히 준비되고 있었다는 말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 박혔다.
마지막으로 쭈야는 한국산 무기가 예맨 전쟁에서 사용된 사례4)를 들며, 우리가 속한 사회의 가해자성을 직시해야만 내가 설 자리, 해야 할 역할을 보다 구체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위치에서 개인과 공동체를 바라보는 게 당연해진 작금의 대한민국에 중요한 일침이었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누군가에게 명백한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공동체의 위치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 질문은 책과 패널들을 거쳐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아직 뚜렷한 답을 내릴 순 없지만, 이제는 그 질문에서 도망치지 않으려 한다.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전쟁 없는 세상》과 북토크의 패널들에게서 얻은 덕분이다.

전쟁없는세상의 평화활동을 담은 오월의봄 출판사 책들, 가장 왼쪽이 북토크의 주인공인 <전쟁 없는 세상>, 차례로 <저항하는 평화>, <병역거부의 질문들>, <어둠의 세계>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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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 인스타그램 @fieldfire.kr / 트위터 @fieldfire__(밑줄 두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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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보다 자세한 후기는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 블로그 탭에서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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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에 저항한 덴마크인들의 투쟁을 다룬 영상을 전없세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youtu.be/YJ7USdOogJc?si=U8vdmsnR5ySgvIV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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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은 전없세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확인할 수 있다(https://withoutwar.org/?p=14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