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

나른한 토요일 오후, TV에는 “뮤직뱅크 연말특집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귓전에 흐르는 멜로디를 듣고 있노라니 오늘이 올해 마지막 날이라는 게 이제야 좀 실감이 나네요. ‘별빛 달빛’, ‘롤리폴리’ 이런 노래들을 다시 들으니 지난여름 땡볕 아래 고척동 교도소 대운동장에서 운동을 하던 때의 장면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제겐 너무 멀게만 보이던 2012년이었는데 어느새 이렇게 코앞에 다가왔다니, 얼떨떨한 기분도 듭니다. 그동안 질리도록 사먹었던 제크와 하비스트, 꼬깔콘이 사라지는 대신 맛동산과 에이스, 조리퐁, 구운 양파, 아이비가 새로 공급된다는 소식에 내심 반가워하고 있습니다.

“보안청사” 불리는 직원 건물의 청소부로 출역을 시작한지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갑니다. 새로운 공간, 사람, 리듬에 적응하느라 12월 한 달은 쏜살같이 지나버린 기분입니다. “땡보직”인줄 알고 왔는데 생각보다 일도 많고 책 읽을 시간도 갖기 어려워서, 조바심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으려고 마음 다스리고 있습니다.

요즘엔 족구에 맛을 들여서 매일 점심 식사 후 운동시간마다 죽어라 뛰고 있습니다. 나중에 밖에서 족구하는 아저씨들을 보면 저 사람은 혹시 어느 교도소 무슨 공장 출신일까 저도 모르게 떠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낮에는 주로 직원 이발소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같은 방에 있다가 엊그제 가석방으로 나간 이발사 분은 영등포 구치소에서 승덕씨랑 함께 지냈다고 하더라구요. 승덕씨가 “빨갱이 천주교 신자”였다고 말하는 그이의 사상검증을 저 역시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같이 생활하는데 ‘사상’ 때문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던 듯합니다. 그냥 제가 다 “네네”해버렸거든요. 신촌 한복판에서 정부(情婦)의 “귀쌰대기를 쳐올린”걸 자랑처럼 말하는, 남성이란 걸 제외하면 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이 아저씨가 김정일을 욕하며 조선일보 사설의 주장을 되풀이 하는 걸 보면서는 얄미워지는 한편 안타까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바른 소리 잘 하는”이를 싫어하는 이 이발사 아저씨가 부디 다시는 이곳에 들어올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발사가 나간 뒤 8.46m²짜리 정원 3인실 방에는 이제 91년생인 S와 저 이렇게 두 사람이 넉넉함을 만끽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소년수로 들어와 내일이면 22살이 되는 S는 예전에 현민이가 수감되어 있던 시절부터 사동 소지를 해왔습니다. 주말엔 “현민이형이 방에서 내내 책 보다가 잠깐 낮잠을 30분 정도 자고 다시 또 책을 보던”것을 기억하고 있고 “신문은 한겨레와 경향 두 개”를 구독했던 것도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한 자리가 비어서 일손이 필요하다는 S의 부탁을 받고 저는 일주일 전쯤부터 평일 저녁과 주말에 사동 소지 일을 돕고 있습니다. 이 “사동도우미”의 주된 업무는 배식과 청소, 신문 및 식수 배달입니다. 마침 6시에 출근해서 하루 일과 다 마치고 방에 돌아오면 저녁 6시 30분. 하루하루는 금방 지나가는 기분입니다. 일이 좀 더 늘긴 했지만 사동 소지를 하면서 비좁지 않은 곳에서 방에는 안 나오는 따뜻한 물로 씻을 수 있음에 나름 만족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물로 씻느라 피부가 건조해지는 걸 오히려 걱정해야 되는 정도이니, 어디 가서 겨울 징역 살았다고 말하기 민망한 지경입니다.

얼마 전에 새로 들어온 여호와증인 신자 중에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침례를 받고선 곧바로 병역을 거부한 분이 있더라구요. 나름 독특한 캐릭터에 말도 잘 통해서 요 며칠 이 분과 얘기 나누는 재미를 쏠쏠히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잘 해보면 이 분에게 일본어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엔 밤 9시에 꺼지는 TV가 오늘은 재야의 종을 보여준다고 12시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보통 토요일 저녁마다 영화를 한 편씩 보여주는데 오늘은 마침 토요일이니 영화를 두 편 연달아 보여줄는지 궁금해지네요. 일요일인 내일도 출역을 나가야 하니 일찍 자고싶긴한데 징역에서 흔치 않은 날이라 12시까지 깨어 종치는 걸 봐야할지 살짝 고민이 되네요.

오늘만 특별히 12시까지 TV가 나온다는 이런 S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버렸습니다. 이렇게 또 웃고 살아야겠죠.

비록 희망버스도 못 타봤고 “나꼼수”를 들어보지 못한 채 지나가 버린 한 해였지만, 저를 걱정해주고 지지해주는 분들의 마음 덕분에 충만함을 경험한 것만으로도 제겐 의미 있는 해였단 생각이 듭니다. 징역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오면서 스스로와의 연결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사람에 대한 신뢰를 시험 받는 동안 분명 1년 전 제 모습보단 조금은 더 성장했으리라고 믿고 싶습니다. 얼른 출소해서 다시 수다를 나누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견디는 힘을 갖게 해준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2012년 새해, 평화의 인사를 전하며,

2011.12.31

서울남부교도소에서 날맹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