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가족접견을 하였다. 가족만남의 날이라고도 하고, 합동접견이라고 부르는데, 대강당에서 56명의 수감자가 접견실의 가림막 없이 가족과 1시간 반 동안 만날 수 있다. 영치출역자 세 명 중 두 명은 4월에 했기 때문에 나에게 기회를 양보해줬다.
꺼림칙한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서류상 증명가능해야하는 ‘가족’이라는 자격 때문이다. 교도소는 가족을, 가족만을 참 좋아한다. 접견올 때 민원인은 수감자와의 관계를 밝혀야 하는데, 그건 단지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서다. 접견 횟수는 수감자의 가석방에 영향을 미치는데, 오직 가족의 적변만이 유효하다고 한다. 합동접견 뿐만 아니라, 1박2일 함께하는 ‘만남의집’도 있는데 역시 가족만이 가능하다. 이성 애인을 약혼자로 만나는 경우까지는 어찌어찌 가능한 것 같지만, 출소의 꿈을 심어줄 행사를 가족으로 제한하는 것은 너무 쓸데없는 행위인 듯 싶다. 가족과 만나기 어려운 사람, 가족이 없는 사람, 가족이 싫은 사람은 어쩌라구.
다른 하나의 꺼림칙함은 알몸 검신 때문이다. 전주교도소와 대구구치소에서 합동접견 후 수감자를 알몸검신하는 과정에서, 수감자의 수치심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절한 방법을 해야함에도 다른 교도관 및 수감자가 보는 공간에서 옷을 벗어야하는 일이 있었다. 이 일로 국보법 위반가와 병역거부자는 교도소에 항의하고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같은 일을 겪는다면, 연대의 당위로(이것이 옳지않은 연대라는 걸 안다ㅠㅠ) 교도소에 항의하고 인권위에 진정을 내야할텐데, 지금의 안락함을 버리고 부담을 짊어지기가 주저스러웠다. 그래서 이번 합동접견 말이 나오기 훨씬 전에 주임에게 물어 알몸검신이 없다는걸 확인받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난주 금요일 퇴근 직전에 4월 합동접견때 알몸검신 했다는 소릴 들었다. 와우! 편안했던 날들이여 안녕! 스리슬쩍 넘어가려 했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ㅠㅠ
인천구치소 입소 때에 알몸검신을 했었다. 입 속, 귓구멍, 머리,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사이, 겨드랑이, 그리고 바닥에 설치된 카메라로 항문까지. 교도관 1인이 나름 신경써서 했는데,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었고 -나름 병역거부 결심기간이 강산도 변한다는 십년인데, ‘전혀’ 예상을 안했다는게 쪼끔 부끄럽다^^;;- 그리고 고3때 육사 신체검사에서는 훨씬 경악스러운 방식으로 항문검사를 했기 때문에 -항문검사의 목적은 치질이었다. 치질과 B형 간염은 불합격이었다-_-;;- 이정도면 괜찮다 싶었다. 그런데 이번 접견을 앞두고는 그런 태연함이 생기지 않았다. 앞서 말한 주저스러움에 더해, 교도관에게 내 알몸을 보인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게 다가왔다. 그런 상황이 펼쳐졌다면 내가 어떻게 행동했을까. 별 말도 안하고 지시에 불응하지 않으며, 그 후에 그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얘기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았을까. 그 결과 저항하지 않은 나를 비난받지 않을 수 있도록 잘 포장해서 말했을 것 같다.
알몸검신은 없었다. 교도관 1인이 보는 칸막이에서 겉옷을 갈아입었을 뿐이다. 4월에는 알몸이었는데 10월에 그러지 않은 것은, 전주교도소와 대구구치소에서 두 재소자의 항의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전국 교정시설에서 일어난 일은 빠르게 공유되고 교도관은 그런 일을 매우 신경쓴다. 영치 작업자들은 건물을 이동할 때 교도소 정문이 열리면 이동하지 못하고 서있어야 하는데 -나가라고 등떠밀어도 기어코 들어와야하는 우리가 보기에 이런 보안 수칙은 정말 쓰잘데 없다- 어느 소에선가 재소자 한 명이 정문을 통해 도주했기 때문이란다. 오늘 알몸검신도 마찬가지이리라.
서신검열 대상자로 지정된 것에 싸우고 있는 공현이나 대구구치소 준규씨나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불이익을 감수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의 행동이 참을 수 있는 선을 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참을 수 없음’을 나도 가끔 무례한 교도관의 행동을 통해 느낀다. 그럴 때는 저 사람에게 존중받고 있지 않다는 것에 화가 많이 난다. 마음에 생채기가 나는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 눈치보며 행동하기도 한다. 내가 조금더 단단하거나 조금더 여려서 저항하고 문제를 멋지게 제기하고 싶은데, 지금은 마음이라도 뚱해있기, 다른 사람의 저항을 잘 보기, 그 상황을 상상하며 공감하기라도 하련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오셨다.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접견이었다. 형 군대갔을 때도 입대 후 한달 뒤에 면회간게 다였다. 양동이에 산낙지를 싣고갔다가 부대표지판을 들이받고 양동이를 쏟는 우여곡절 끝에 면회했다는 이야기를 오늘 처음 들었다. 보온도시락 두 통에 콩밥, 깐 대하를 듬뿍 넣은 꽃게탕, 어젯밤 밭에서 뽑은 배추로 만든 겉절이를 담아오시고, 어머니의 장사수완으로 돈 좀 벌고 있다는 대하튀김을 싸오셨다. (음료수 및 모든 국물음식은 반입이 안되는데 꽃게탕을 어찌 들여왔냐며, 얘기들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비료를 많이 줬는지 세번의 태풍에 베(벼)가 많이 쓰러져서 바슴(추수)하니 얼마 안되더라는 얘기, 밭에 심은 고구마를 아직도 다 못캐었다는 얘기, 대하튀김장사가 꽤 잘되어 여기저기 묵혀놓은 빚들도 조금씩 갚고 차 할부금도 잘 내고 있다는 얘기, 대선 얘기, 동네장사 얘기, 가족 친척 얘기 등을 들었다.
설 때만 해도 안철수에 부정적이었던 아버지가 호의적으로 변해서 놀랐지만, 민주당은 빨갱이라서 안된다는 말에는 그런식으로 따지만 간척지 보상 때문에 데모했던 아버지나 군대안간 저나 다 빨갱이라고 말씀드렸고(물론 좋게좋게). 어머니는 빨갱이, 빨갱이 소리에 두근거리며 지난번 우리집을 유심히 지켜보던 낯선 사람이 나 때문이 아니었는가 의심했다. 날 처음보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던 아버지의 충혈된 눈은 얘기를 나누며 진정이 되었다. 얼굴보며 감옥 생활 얘기를 들으니 두 분 모두 적잖이 안심이 되나보더라. 그늘없는 이 얼굴을 보라며 한껏 호기를 부렸다. 즐거운 시간이었다.
2012. 10. 30.
서울남부교도소에서 전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