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수감자 언니오빠들에게.
10월 13일, 오늘은 제가 수감된지 만 9개월 째이자 10개월로 접어드는 날이고, 또한 만기일 기준 형량의 반을 지나는 때입니다. ‘아니 벌써?!’라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제게는 오늘도 그저 지리한 지난 9개월의 또다른 하루일 뿐이로군요. 2분의 1시점을 지나면서 드는 소망은 하루빨리 2016년이나 왔으면 싶습니다. 내년에는 현재 감옥에 수감된 분들 모두 사회에 있을테니까요. Dreams come true in 2016!
오늘 도착한 수감자우편물의 지훈씨 서신을 보니 저도 떠오르는 것이 있군요. ‘사랑’에 관하여.
많은 이들이 사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듣다보면 각자 다른 의미의 사랑을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는 했습니다. 또한 제가 믿는 사랑과도 다를 때가 많았구요. 그래서 한동안 사랑의 의미에 대해 고민했었고 나름 정리를 할 수가 있었죠. ‘사람마다 뜻하는 사랑의 층위가 각각 다르며 각 층위의 형태도 다양할 수 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텐데, 길게 풀어쓰면 장황해질테니 러프하게나마 설명해보겠습니다.
요컨데 사랑에는 ‘1인칭의 사랑’, ‘2인칭의 사랑’, ‘3인칭의 사랑’이 있지않나 생각을 합니다. 각 인칭을 하나의 층위라 한다면 그 층위마다 크게 온전한 형태의 사랑과 불완전한 형태의 사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1인칭의 사랑은 ‘나 중심의 자기애적 사랑’으로 자신을 아끼고 존중하며 ‘내가 있기에 당신도 있다’의 관념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불완전한 1인칭의 사랑은 나만 있고 타인은 없는 상태로, 나 중심의 이기주의적 욕망이 됩니다.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이 주로 보이는 형태죠. 가부장 사회에서 남성의 사랑이란 소유와 폭력의 동의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니까요. 온전한 1인칭의 사랑이 나도 있고 너도 존재하는, 내가 소중한만큼 타인의 존재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불완전한 1인칭은 ‘자기애’와는 구별되는 병적인 나르시시즘의 상태입니다.
2인칭의 사랑은 ‘나와 당신의 상호적인 사랑’입니다. 2인칭의 온전한 사랑이 가능하려면 ‘1인칭의 자기애적 사랑’이라는 골격을 먼저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1인칭의 사랑’이 기반이 된 2인칭의 사랑은 나를 중심으로 두던 형태의 사랑에서 나의 자아경계를 넘어 당신에게까지 경계가 확장이 되는 경험을 합니다. 당신이 내가 된다거나, 내가 당신이 되길 욕망하는 분열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라는 타자를 포용하며 확장되는 것이죠. 반대로 2인칭의 불완전한 사랑은 ‘나는 없고 당신만 있는 상태’입니다. 쉽게 말하면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에게 강요되는 사랑의 모습이죠. 나를 위한 사랑이 아닌 타자를 위한 사랑이자, 내가 없는 사랑인거죠. 타인이 욕망하는 사랑을 내가 욕망을 하게 되는, 타자화된 사랑. 성형공화국이자 아이돌공화국이 된 남조선의 현실을 볼 수 있는 사랑의 단면일테죠. 이런 불완전한 2인칭의 사랑은 1인칭의 자기애적 사랑의 결핍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벨 훅스의 책은 대충 훑어봤기에 지훈씨만큼 그 내용에 비판하거나 긍정하기는 어렵지만, 제가 이해한 그녀의 사랑은 이 1인칭과 2인칭의 온전한 사랑을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촉구하고자 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가부장제 사회는 불완전한 2인칭의 사랑만을 여성에게 강요해왔기에 페미니즘은 여성에게 1인칭의 자기애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페미니즘의 이 1인층의 사랑을 강조한 결과 페미니스트 1세대들은 사회적 평등과 권력을 얻은 반면, ‘나와 당신’이라는 2인칭의 사랑에는 실패했다는 지적이 나온거죠. 벨 훅스의 비판은 가부장제 사회에 있기도 하지만 ‘자기애’라는 한계에 갇힌 기성 페미니즘의 사랑의 가치에도 향해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상호존중, 연대, 공감이라는 관계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듯 싶구요.
그럼에도 1인칭의 자기애는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강조하죠. 내가 없는 사랑이란 ‘노예의 주인 사랑’과 같은 것이니까요.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어야 타자와의 상호존중의 사랑도 실현가능하겠죠. 이 사회에서 여성이 사랑에 빠진다는 건 나를 제거한 채 상대편에게 자신을 맡기고자 하는 욕망이 되는 경우가 많죠. 반면 남성이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렇게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젠더 각본에 따라 그리 길러지고 그런 욕망을 강화시키며 성장한 결과일 겁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벨 훅스의 이야기를 꽤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갈수록 나르시시즘의 사랑만이 판치는 시대에 적절한 메시지이기도 하구요. 미국의 페미니즘&성혁명 1세대 중심의 서술이라 이곳과는 차이가 있기는 해도 나름 비교하며 읽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3인칭의 사랑은 ‘나 그리고 우리의 범우주적 사랑’입니다. 대충 짐작할 수 있듯, 이웃을 나와 같이 사랑할 수 있는 초월적 사랑이자 종교의 영적 가르침에 해당되는 영역이죠. 이 사랑 역시 1인칭과 2인칭의 사랑을 골조로 하지 않는다면 병적인 전체주의로 변하죠. 종교에서는 교조주의적인 형태로, 흔희 볼 수 있는 모습으로는 호국을 외치며 대한민국과 사랑에 빠진 ‘나도 없고 너도 없이’ 국가만 있는 애국주의도 병든 3인칭의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좋은 모습은 알다시피 부처와 예수가 있을테구요. 그 반대는 김정은, 박근혜, 아베?!
1인칭-2인칭-3인칭의 사랑은 각 단계로 경계를 확장하는 형태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인칭을 2인칭이, 2인칭을 3인칭이 포용하며 그만큼 사랑의 범위도 경계도 넓어지는거죠. 반면 단계를 스킵하면 앞서 얘기했듯 불완전한 병적인 상태의 사랑을 하게되는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미션 클리어하듯 이 단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넘어서고 아니고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사랑에 빠졌을때는 이 모든 경계가 수축과 팽창의 운동을 불규칙적으로 하며 자신이 어디에 위치해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 있을테죠. 고통과 쾌락이 공존하는 어느 지점에서 말입니다. 그점에서 지훈씨의 사랑법에도 매우 공감할 수가 있습니용~ ^^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는데 막상 쓰다보니 어떻게 끝을 맺어야할지 막막하군요. 급마무리하겠습니다. 모두 사랑하며 삽시다. 얍!
2015. 10. 13. 경묵.
(후렴) 사랑은 아무나 하나, 그 누가 쉽다고 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