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과연 양심을 판단할 수 있을까?

이 용 석

들어가며

2006년 8월 17일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피고인을 징역 1년 6개월에 처한다”는 판사의 말을 나는 피고인석에서 들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판사가 뭐라고 말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실형 1년 6개월 선고 받았으니 판사가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재판은 기억날 게 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첫 심리공판 때 본인 확인하고 기소 이유에 대해 검사가 설명한 뒤 아주 간단한 심문이 이어졌다. “피고인은 모월 모일 입영통지서를 수령하였지만 입영일까지 입영하지 않은 사실이 있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검사는 심문을 마치고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해달라고 구형을 했고, 판사는 내게 최후진술을 하라고 했다. 그러고 8월 17일 재판에서 판사는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했고 나는 법정에서 바로 구속되어 인천구치소에 수감되었다.

우리는 병역거부가 법을 어기는 행위인지 알면서 병역거부를 했다. 우리와 검사 사이에는 범죄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다툼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검사는 우리의 양심이 병역법 88조 1항에서 규정하는 입영하지 아니할 정당한 사유가 아니라고 주장했고 판사는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 검사도 판사도 내가 말하는 양심이 과연 진실된 것인지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재판정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역거부자를 싫어하는 사람, 병역거부자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양심의 내용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나는 비록 감옥에 갈지언정 양심이 가짜라거나 혹은 충분히 깊지 못하다는 의심을 받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감옥에 가는 것으로 내 양심이 진실된 것임을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감옥까지 가는데 양심이 진실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했던 것이다.

2018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가 대체복무제도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고 난 뒤 병역거부는 더이상 범죄행위가 아니게 되었다. 이는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한 것으로 인권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진전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병역거부자들은 이 진전 이후로 새로운 난관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이 대체복무제도라는 법적, 제도적 권리를 가지게 되면서 그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국가가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헌법재판소 결정을 기다리며 재판이 연기되어 있던 병역거부자들은 재판정에서,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어 이를 신청한 병역거부자들은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각각 판단을 받게 되었다. 병역거부자들이 감옥에 수감되던 시절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양심의 진정성이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1.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재판

2018년 11월 대법원은 병역거부자에 대해 처음으로 무죄 선고를 확정하면서 진정한 양심을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대법원에서 제시한 기준은 “다른 신도들도 병역거부를 하는지, 병역거부가 교리로 명시되어 있는지, 병역거부자 당사자를 교단이 신도로 인정하는지, 종교를 믿게 된 동기와 실제 종교활동을 얼마나 하는지” 등등이었다. 이후 하급심에서는 대법원이 정한 기준에 따라 병역거부자의 양심이 진실된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준은 양심의 범위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규정했을 뿐만 아니라 특정 종교인들에 대한 판단 근거일 뿐이었기 때문에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들, 특히 평화주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의 재판에서 문제가 되었다.

검사들은 병역거부자를 여전히 범죄 혐의가 있는 피의자로 간주했고, 양심의 진정성을 판단한다는 명목으로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문을 이어갔다. 폭력적인 컨텐츠를 즐기는지 알아본다며 게임 사이트 접속 기록과 영화 티켓 예매 목록을 제출하라고 하거나 종교 생활을 성실하게 하는지 알아보겠다며 휴대폰 위치 추적을 신청했다.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병역거부자의 경우 단체 정관에 병역거부가 명시되어 있는지, 회원 중에 병역거부자가 있는지를 추궁했다. 양심은 지극히 개인에 속하는 것인데 그것을 집단을 준거로 판단하겠다는 거였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양심에 대한 지극한 몰이해를 드러낸다. FPS(1인칭 슈칭 게임) 게임이나 갱스터 영화를 본다고 그 사람의 양심이 가짜일 수는 없다. 그런 논리라면 사람 때리는 직업을 가진 무하마드 알리나 사람이 허구한 날 죽어나가는 폭력적인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자인 소설가 조지 R.R. 마틴 또한 병역거부자일 수 없다. 베트남전쟁 당시 병역을 거부한 두 사람은 재판에서 무죄를 받거나(무하마드 알리) 병역거부가 인정되어 대체복무를 수행했다.(조지 R.R. 마틴) 실제 재판정에서 이루어지는 검사의 심문과정은 양심의 자유를 더욱 노골적으로 침해했다.

병역거부자 오경택은 검사로부터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이었다면 총을 들었을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만약 오경택 스스로가 자신의 양심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면 이는 자신의 양심을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타당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검사의 이 질문은 사실상 답이 정해져 있는 공격이었다. 오경택이 총을 들지 않겠다고 대답하면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군을 부정하는 것이 되고, 총을 들겠다고 하면 병역거부의 양심이 훼손되는 것이다. 이처럼 극단적으로 예외적인 상황에서 두 가지 선택지만을 제시하는 것은 양심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양심을 훼손하기 위한 공격이다.

병역거부자 시우의 검사는 서면으로 이런 질문을 했다. “피고인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이 존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군사력에 불균형이 발생하여 일본군 위안부 피해가 발생한 것 아닌가요?” “피고인이 주장하는 평화 방법으로 제2의 위안부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변호사의 문제제기를 판사가 받아들여 결국 이 질문을 실제로 하지는 못했지만 이 서면 질문은 양심에 대한 검사들의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헌법재판소에서는 양심의 유무를 판단할 수는 있어도 양심의 내용을 문제삼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명시했지만 시우에게 질문하고자 했던 검사는 시우의 양심의 내용-평화주의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에서는 2018년 병역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양심은 그 대상이나 내용 또는 동기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으며, 특히 양심상의 결정이 이성적·합리적인가, 타당한가 또는 법질서나 사회규범·도덕률과 일치하는가 하는 관점은 양심의 존재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 없다”면서 “특정한 내적인 확신 또는 신념이 양심으로 형성된 이상 그 내용 여하를 떠나 양심의 자유에 의해 보호되는 양심이 될 수 있으므로, 헌법상 양심의 자유에 의해 보호받는 ‘양심’으로 인정할 것인지의 판단은 그것이 깊고, 확고하며, 진실 된 것인지 여부에 따르게 된다.”고 판시했다. 병역거부자가 스스로 주장하는 양심이 진실 되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따질 수는 있지만 그 양심의 내용은 국가가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례로 2021년 6월 25일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된 병역거부자 시우의 2심 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국군에 대한 인시기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정당한 이유의 존부 판단이 양심의 내용의 타당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시우의 사례가 예외적이고 다른 병역거부자들은 여전히 양심의 내용을 문제 삼는 재판을 거쳐 유죄를 선고 받고 수감되었다.

 

2. 양심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

헌법상 권리인 양심의 자유를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가진 판검사들이 양심에 대해 매우 부족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확실히 큰 문제다. 하지만 이것을 판검사들만의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데, 한국 사회 전체가 양심의 자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와 더불어 양심의 자유라는 개념이 발전해온 유럽 국가와 달리 우리에겐 양심은 굉장히 낯선 개념이었다. 제헌 헌법에 양심의 자유가 포함되었지만, 당시 양심의 자유에 대해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상의 자유가 양심의 자유와 함께 헌법 조문에 포함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조봉암 등 일부 국회의원은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니 사상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와 구별하여 헌법 조문에 포함하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개념적으로 사상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에 포함되는 것이기도 했고, 일각에서는 사상의 자유를 명시하면 반국가 사상이 판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반대 의견이 많아서 결국 양심의 자유만 헌법에 표기된 것이 양심의 자유가 논의된 맥락이었다.

이후 양심의 자유는 헌법 안에서만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상 사문화된 권리였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 동안 사상의 자유는 심각하게 탄압 받았고 양심의 자유 또한 존중받지 못했다. 헌법이 보호하는 모든 국민의 권리지만, 한국 사회에서 누구도 온전하게 경험해보지 못했고 사회적으로 제대로 토론해본 적이 없는 권리가 바로 양심의 자유였던 것이다. 양심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국가권력 뿐만 아니라 시민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학시절 맑스레닌주의를 표방하는 학생운동 그룹의 활동가였다. 다른 학생운동 그룹들과 회의를 할 때면 서로가 자신이 속한 조직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격한 논쟁을 했는데, 가끔씩 내가 속한 조직의 이익을 위해 나 스스로도 동의하지 못하는 주장을 펼쳐야 할 때도 있었다. 당시 나는 내 마음의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때는 다들 그랬으니 나만 유난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우리 조직만 유난히 권위적이어서 구성원들의 생각이나 신념을 억누르는 게 아니었고 사회운동 단체들이 전반적으로 개인의 양심보다는 조직을 먼저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양심의 자유를 위해 싸워왔던 인권활동가들 혹은 병역거부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때로 양심을 오해했다. 대표적인 오해는 양심의 자유를 너무 대단한 사람들이 갖는 신념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양심이 사회적인 이슈가 된 것은 비전향장기수에게 사상전향서를 강요했을 때와 양심적 병역거부가 사회 이슈로 떠올랐을 때다. 다시 말하면 양심을 지킨 대가는 늘 감옥 생활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양심의 자유에 대해 감옥 생활 정도는 각오하는 강한 신념을 가진 이들이 가진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양심의 자유를 대단한 신념으로 여기는 것은 양심을 변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태도와 얼핏 반대 입장 같아 보이지만 실은 양심을 굉장히 협소하게 본다는 점에서 무척 닮았다. 전자는 양심의 자유를 옹호하는 분들이 자주 빠지는 오해고 후자는 병역거부자를 심문하는 검사나 병역거부자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판사들의 논리다. 흔들림 없고, 고통(감옥)마저 감수하는 양심도 분명히 존재하겠지만, 아주 극소수의 양심이 그럴 수 있지 대부분은 그와 정반대의 속성을 보인다.

 

나가며: 흔들려야 양심이다

흔들리지 않아야 양심이 아니라, 양심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다. 흔들리지 않는 생각은 양심보다는 교조주의에 가깝다. 병역거부는 단단한 양심의 결과가 아니라, 감옥에 가기 직전까지 수백 번씩 마음이 감옥에 갔다가 군대에 갔다가 탈영을 했다가를 반복하는 그야말로 흔들림의 과정이다. 나는 선고 공판을 받으러 가는 2006년 8월 17일 오전까지도 흔들렸다. 세상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일하러 나가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과연 내가 병역거부를 하고 감옥 가는 게 잘하는 일인지 반문했다. 감옥 생활 중에는 나름 감옥 안의 부조리에 대해 저항하려 했지만 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눈감고 지나간 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럴 때면 심장이 요동쳤다. 내 양심은 늘 흔들리고, 시험받고, 스스로를 배신하고, 그러다가 한 번씩 고결한 척하며 행동으로 튀어나왔다.

결국 양심은 변하지 않는 굳건한 신념이 아니라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 흔들리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는 것, 부끄러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최소한의 용기에 가깝다. 양심의 자유는 정치적인 이슈나 사상에 대한 경우와 연관 지어서 생각하기 쉽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꼭 비전향장기수나 병역거부자가 아니더라도, 잘못하지 않은 일에 대해 반성문을 강요당하는 학생, 상사의 부당한 업무 지시를 거부하지 못해 마음이 불편한 직장인, 회사가 저지른 불법을 알게 되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해 속이 타들어가는 노동자들이 모두 양심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들이다.

이처럼 양심의 자유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순간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우리는 평소에는 양심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다가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관과 내 양심이 충돌하거나 권력 질서와 양심이 충돌하면서 양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들 모두는 흔들리고 갈등하다가 결국엔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하기도 한다. 그건 양심이 진실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양심의 자유를 지키는 대가가 가혹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가치관이나 권력을 거스르는 일에 따르는 피해와 희생을 개인이 감당하기란 쉽지 않다. 헌법으로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가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적인 가치이지만 개인이 지켜가기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다. 헌법으로 모든 국민의 권리라는 것을 천명하고 보호하지 않는다면, 결국 특출나게 굳은 신념을 가진 몇 사람만이 양심의 목소리에 따를 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양심의 목소리를 외면할 수밖에 없다.

재판을 받는 병역거부자의 숫자는 이제 많이 남아있지 않다. 앞으로 새롭게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대체복무를 신청하면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심사를 받게 된다.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을 판단하는 주체가 법원에서 대체역 심사위원회로 바뀌게 된 것이다. 2020년 6월말 출범한 대체역 심사위원회에는 시민사회에서 추천한 심사위원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양심의 이해도가 판사나 검사들에 비해 오히려 더 높고, 피의자의 범죄사실을 규명하는 형사재판 절차와는 다르게 대체복무를 할 권리를 따지는 곳이기 때문에 법원보다는 양심의 자유를 보호하는 역할에 잘 맞다. 실제로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초창기에는 법원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판단한 기준으로 심사를 진행했지만 양심을 검증하는 과정이 자칫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과정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심사 기준과 심사 방식을 개선해가고있다.

하지만 양심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무리 정교해진다고 하더라도, 병역거부자들의 양심이 의심받는 상황이 달라질까? 심사 과정이 좀 더 단축되고 수월해질 수는 있겠지만 과연 병역거부자들은 자신의 양심을 증명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죄다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온전히 자신의 양심의 자유가 보호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선적으로 양심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필요가 있다. 어지간해서는 잘 변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흔들리는 과정을 양심 형성과 발현의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양심의 자유가 진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의심을 전제로 판단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뢰를 바탕으로 병역거부자의 주장과 설명을 판단해야 한다. 물론 국가 기관의 입장에서는 이를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을 우려할 수 있고, 그런 가능성에 대해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현역 군인들의 군복무 기간의 2배에 해당하는 36개월의 대체복무라면, 국제적인 기준에서 징벌적인 형태라고 비판받을 것이 뻔한 대체복무라면 걱정해야 할 것은 악용 가능성이 아니다. 어느 누가 18개월 대신 36개월을 복무하려고 양심까지 속이겠나. 복무 기간은 이것대로 단축해야 할 문제이지만, 기본적으로 현역 군복무보다 긴 대체복무 기간은 그 자체로 거름망이 된다. 실제로 1667명이 심사를 통과하는 동안 (대체역 심사위원회 발표, 2021년 9월 3일 기준) 심사에서 떨어진 사람은 단 2명이다. 2명 가운데 한 명은 입영 날에 입영하지 않으면서 감옥에 가더라도 군입대는 하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진실된 양심이 아니라고 판단했던 심사위원회의 결정이 오판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1667명 가운데 딱 한 명이 대체복무제도를 악용하려 들었지만 그조차도 심사 과정에서 걸러졌다. 악용하는 한 명을 잡아내기 위해 나머지 1666명의 양심을 의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고 합리적인 방식일까?

가짜 병역거부자, 진실되지 않은 양심을 걸러내겠다는 생각이 병역거부자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다. 양심의 자유는 대단한 사람들의 특별한 권리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보잘것없이 연약한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는 점을, 병역거부자들의 대체복무 심사에서부터 되새겨야 한다

 

*이 글은 <역사연구 42호> ‘쟁점 톱아보기’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