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쥬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급진적이고 원칙적인 비폭력의 길을 선택하셨죠. 그런데 혹자는 이것이 귀족적인 태도이고, 침략자를 상대로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우리의 입장은 “급진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합리적이고, 모든 실제적인 결과에 있어 대화와 재고의 여지를 둡니다. 전통적인 표현에 따르면 일관적인 평화주의입니다. 저는 일관적인 평화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것은 매우 효과적이지만, 전쟁 노력에 있어서는 거의 쓸모가 없습니다. 일관적인 평화주의는 군사 전략에 종속될 수 없고, 군국주의자들의 싸움에서 이용되거나 무기화될 수 없습니다. 이는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입니다. 이 전쟁은 양측의 전쟁 도발자들의 싸움이고, 피해자는 폭력적인 행위자들에 의해 분할 지배되는 평화 옹호자들입니다. 사람들은 강압과 기만에 의해 자기 의지에 반해 전쟁에 끌려가고, 전쟁 선전에 현혹되며, 총알받이로 징집되고, 전쟁 기계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강탈당합니다. 일관적인 평화주의는 평화 옹호자들이 스스로를 전쟁의 억압에서 해방시킬 수 있도록 돕습니다. 또한 인간의 평화에 대한 권리를 비롯해 보편적인 평화와 비폭력 문화의 가치와 성취들을 비폭력적으로 고수합니다.
비폭력은 단순한 전술 차원이 아닌, 효과적이고 언제나 효과적일 삶의 방식입니다. 우리가 오늘은 인간이지만 내일은 짐승들에게 공격받기 때문에 짐승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터무니없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무장 저항을 결심했습니다. 그들도 자기만의 결정을 할 권리가 있지 않을까요?
미디어는 전쟁에 총력을 다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군국주의자들의 바람이고, 그들은 이런 그림을 만들어 스스로와 전 세계를 속이는 데 많은 노력을 쏟습니다. 지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80%가 우크라이나의 방위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고 있다고 답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중 군대나 국경수비대에서 무장 저항을 하고 있는 사람은 6%밖에 되지 않습니다. 대부분은 단지 물질적으로나 정보상으로 군대를 “지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는 이것이 실질적인 지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최근 뉴욕 타임스에 키이우 출신의 한 젊은 사진작가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극도로 애국적이고 조금 악플러 같았던” 그는 밀입국업자들을 통해 국경을 넘어 친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는 헌법이나 인권법을 준수하지 않고 군사 동원을 위해 국경수비대로 하여금 거의 모든 남성의 출국을 금지한 불법 금지령을 위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런던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폭력은 나의 무기가 아니다.” 유엔 인도주의 업무 조정국의 보고에 따르면, 4월 21일 기준 1,280만 명이 전쟁을 피해 도망쳤고, 그중 510만 명이 국경을 넘었습니다.
은폐는 도망, 정지와 함께 자연계에서 포식자를 피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형태의 적응 행동에 속합니다. 많은 평화 옹호자들이 이런 단순한 수단에 의존하는데, 이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및 다른 구소련 국가들의 평화 문화가 서방과 달리 미숙하고 원시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전제 군주들이 반대하는 많은 목소리들을 잔혹하게 잠재우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푸틴이나 젤렌스키의 전쟁 노력에 대한 지지 표현을 곧이곧대로 진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공개적이고 집단적으로 그런 지지를 표할 때든, 낯선 사람과 대화할 때든, 심지어 사적인 대화일지라도, 충성스러운 언어 이면의 속마음은 평화를 사랑하는 반대 의견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의 행동으로부터 그들이 실제로 생각하는 바를 알 수 있습니다. 1차 대전 당시 지휘관들이, 총을 고의로 빗나가게 쏘고 참호 사이에서 “적”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병사들을 보며, 그들이 전쟁 선전이 말하는 허구적인 존재론적 적을 믿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말입니다.
또한 저는 두 가지 이유에서 폭력을 옹호하는 민주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거부합니다. 첫째로 전쟁 선전과 “군사주의적, 애국주의적 훈육”의 영향을 받은 정보가 제공되지 않거나 잘못된 정보 하의 선택은 충분히 자유로운 선택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저는 군사주의와 민주주의가 양립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것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피해자가 아니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평화 옹호자들이 구소련 군국주의 전쟁 도발자 정부들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소수자 집단(개인 포함)을 향한 다수의 폭력을 다수결로 집행하는 것은 “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참된 민주주의는 공공의 문제에 관한 진솔하고 비판적인 대화, 그리고 의사결정에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모든 민주적 결정은 다수에 의해 지지되고 소수자 집단(개인 포함)과 자연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숙고되었다는 의미에서 만장일치를 이뤄야 합니다. 만약 어떤 결정이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의 묵인을 얻지 못하고, 그들에게 해를 주고, 그들을 “대중”에서 배제하면, 이는 민주적 결정이 아닙니다. 이런 이유에서 저는 “정당한 전쟁을 지속하고 평화주의자들을 벌하라는 민주적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의상 민주적일 수 없습니다. 누군가 그것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민주주의”는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의 모든 전개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은 우크라이나에서 오랜 전통이라고 하던데요.
사실입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많은 출판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가 만든 단편 영화로 “우크라이나의 평화로운 역사”가 있고, 우크라이나와 전 세계의 평화에 대한 역사도 책으로 쓰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려되는 점은 비폭력이 전환과 진보보다는 저항에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비폭력은 때때로 문화적 폭력의 낡은 지위를 고수하는 데 사용되기도 합니다. 과거에 비폭력을 빙자한 반러시아 혐오 캠페인이 있었고(시민운동 “비드시치Vidsich”), 지금은 대놓고 군국주의적으로 변해 군대에 대한 지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친러시아 세력이 2014년 크름반도와 돈바스 지역을 폭력적으로 장악할 때에도 비폭력 행동이 무기화되었습니다. 당시에 푸틴은 특히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군대의 인간 방패가 되라고 말한 것은 유명합니다.
서방 시민사회가 우크라이나의 평화주의자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평화의 대의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로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평화로 가는 폭력의 길은 없다고 말입니다. 지금의 위기는 양측 모두 잘못이 있는 긴 역사를 갖고 있으며, 우리 천사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저들 추악한 악마는 고통받아야 한다는 태도는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것이고, 긴장을 더욱 고조시킬 것이며, 이는 핵 재앙도 포함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모두를 가라앉히고 평화 협상을 도울 것이라고 말입니다. 진실과 사랑은 동구권과 서구권을 하나로 만들 것입니다. 진실은 그것의 비모순적인 특성 때문에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에 거짓들은 그 자체로 모순되고 우리를 분할 지배합니다.
평화의 대의에 기여하는 두 번째 방법: 도움이 필요한 사람, 전쟁 피해자, 난민, 실향민, 그리고 병역거부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젠더, 인종, 나이 등 모든 보호받는 사유에 대한 차별 없이 도심 전장에서 모든 민간인들을 대피시켜야 합니다. UN 기관이나, 적십자처럼 그 밖에 사람들을 돕는 단체에 기부하세요. 혹은 현장에서 일하는 자원활동가들에게요. 작은 자선 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플랫폼의 온라인 SNS 그룹들에서 그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군대를 돕고 있으니 조심하세요. 따라서 그들의 활동을 확인해 더 많은 무기와 유혈 사태와 긴장의 고조에 기부를 하는 것은 아닌지 확실히 하세요.
셋째로 사람들이 두려움과 혐오를 극복하고 비폭력적인 해결책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평화 교육이 필요합니다. 미숙한 평화 문화와 군사화된 교육이 비판적인 시민과 책임감 있는 투표자들 대신에 복종하는 징집병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비롯한 모든 구소련 국가들의 공통적인 문제입니다. 평화 문화와 시민들을 위한 평화 교육의 발전에 투자하지 않는 한 평화를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전망은 어떻게 보고 계신가요?
지지 편지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타란토의 아우구스토 리기 고등학교의 학생 몇 명은 전쟁이 없는 미래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저는 이렇게 답장했습니다. “여러분의 전쟁 없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반기고 공유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이 많은 세대에 걸쳐 계획하고 만들어온 것입니다. 흔한 실수는 함께 이기는 대신에 혼자 이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류 미래의 비폭력적인 삶의 방식은 평화 문화와 인간 발달에 대한 지식과 관습, 폭력 없이 혹은 폭력을 최소한으로 하면서 사회경제적 및 생태적 정의의 성취에 기초해야 합니다. 평화와 비폭력의 진보적인 문화는 폭력과 전쟁의 낡은 문화를 서서히 바꿔나갈 것입니다. 병역거부도 이런 미래가 오게 하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권력자에게 진실을 말하고, 싸움을 멈추고 대화를 시작할 것을 요구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 평화 문화와 비폭력 시민을 위한 평화 교육애 투자하여, 함께 군대와 국경 없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실과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이 동과 서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세상을 말입니다.
유리 셸리아젠코, European Bureau for Conscientious Objection(병역거부 유럽 사무국, 벨기에 브뤼셀) 이사, World BEYOND War(미국 버지니아주 샬로츠빌) 이사, Ukrainian Pacifist Movement 사무국장
인터뷰 진행: 베르너 빈터슈타이너Werner Wintersteiner, 오스트리아 클라겐푸르트 대학(AAU) 명예교수, AAU 평화연구 및 평화교육 센터 창립자 겸 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