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평화를 외쳐야 하는 이유는,
‘나’에게 이득이 생기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만이 ‘누군가의’죽음을 막고, ‘그’를 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안전’이 먼저가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을 멈추고자 함.
그 의지의 있고 없음이
‘평화’와 ‘안보’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안보와 안전의 이름하에,
‘악의 축’이 나왔고, ‘테러와의 전쟁’이 나왔습니다.
보복이 나오고 군사적 대응이 나왔습니다.
이 쪽의 ‘테러리즘’은 저 쪽의 ‘저항’이 됐고,
저 쪽의 ‘응징’은 이 쪽의 ‘침략’이 됐습니다.
그래서 ‘안보’의 이름으로 이를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습니다.
화려한 수사, 거대한 무기, 논리로 점철된 정당성이 있지만,
남는 것은 결국 죽음뿐입니다.
‘생명의 사라짐’이 그 세계의 종착점일 뿐입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무기와 파괴,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기와 파괴, 죽음입니다.
우리 정신세계는 그 ‘보이지 않는’것들에 쉽게 노출되고 있습니다.
전 남성국민을 전쟁수행력을 갖춘 ‘티탄’으로 만들고자 하고,
전 여성국민을 그 ‘티탄’의 보조자, 치어리더, 피보호자로 만들고자 하는 사회.
그것이 ‘정상’이고, 그것이 ‘평화’이고, 그것이 ‘종교’인 사회.
그것이 다름 아닌 ‘군사주의’의 사회이고, ‘정상남성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이라 해서, 병역거부자를 기억하자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날은 어린이가, 스승의날은 스승이, 어버이날은 아버이가 중심이 되지만 병역거부자의 날은 병역거부자가 중심이 아닙니다.
보편주의의 깃발을 들고,
누군가의 죽음 그 자체를 애도하며,
‘나’와 ‘안전’을 핑계 삼아 우리 안에 커져가고 있는
‘살상에 대한 무감각’을 반성하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살상을 ‘우리’이름으로 정당화하며
안보를 목적으로 한다며 ‘당신의 복수를 대신한다’라고 선전하는,
군대, 국가, 권력, 자본에 반대하는 날이 바로 그날입니다.
시오니즘과 선민사상으로 팔레스타인 학살을 정당화하는 이스라엘, ‘팍스 아메리카나’와 대테러전쟁으로 이라크-아프간 학살을 미화한 미국. 그 해당 사회의 ‘상식’과 ‘법칙’을 무시하고, 가담과 동참을 거부하며 감옥으로 갔던 세계 곳곳의 병역거부자들. 그들이 외쳤던 것은 편협한, 누군가에게는 크나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안보-국가-민족주의’를 벗어나 보편의 시각으로 타인의 고통과 죽음을 바라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의 병역거부자들도 분단의 비극과 증오는 그러한 보편의 시각으로 한반도를 보는 노력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잇다는 평화주의적 전환을 요구했던 사람들이지요. 역설적이게도 가장 ‘좋은’안보는 한 국가, 지역의 국제관계, 문화, 정치, 경제 등이 그런 ‘보편주의’의 원칙하의 ‘무장해제’가 이뤄졌을 때에만 가능합니다. 징병제 유일의 국민의무를 사회복무제도 형태로 해체하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군축을 포기하지 않는 것, 대한민국이 평화국가, 평화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것입니다.
얼마 전 빈라덴 죽음을 두고 환호하는 미국 사회와 그에 동조하는 한국 우파들에 대해 개탄하는 글을 썼습니다. 의기양양한 그들의 모습을 보노라면, 자꾸만 이라크-아프간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와 눈물이 눈에 밟힙니다. 진짜 평화는 미국인들이 911테러 희생자들뿐만 아니라, 이라크-아프간의 학살된 민중들을 위해서도 눈물흘리고 추모할 때 가능할 것입니다. 한반도 역시 마찬가지의 감성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고요.
평화는 공기 같다고 합니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평화를 ‘말’하는 건 쉽고,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함’은 어렵고 하는 이가 적을 것입니다. 보다 많은 이의 ‘행함’이 있는 5.15세계병역거부자의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행함이라도, 그것을 기억하고 지켜보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 행함조차 없을 때보다는 ‘훨씬 더’평화에 가까이 다가갈 상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5.15 세계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하여
영등포구치소에서
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