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을 줄쳐가며 열심히 읽던 ‘모범생 모드’로 지내다가 오늘 하루 숨좀 돌릴 겸 잠시 페이스를 조절하며 ‘딴거’ 읽어봤다. 「Time」에, 포클랜드 분쟁이 재점화 될 것 같은 가운데 한 칼럼니스트가 쓴 글이 있었다. 무심코 읽다가 한 대목에 잠시 상념에 빠졌다. ’20세기는 전쟁에 징병되었던 젊은 세대들의 역사였다.(the 20th Century hac been a history of generations of young men being conscripted for war.)’ 그래. 따지고 보면 역사상 지금만큼 전쟁이 대규모로, 지속적으로 이뤄지고 또한 전례없는 대규모 동원이 된 적이 있었던가. 혁명의 보루를 지켜내기 위해 탄생한 근대 국민개병제는 역사를 경유하며, 특히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지구적 살육의 주된 도구가 되어왔다. 강요된 정체성, 근대의 완성은 합리적 이성의 시민 공동체가 아니라 거꾸로 물신화된 탐욕과 권력의 집단동원체계와 이에 대한 순종이 되었고 군대는 그에 복무하는 가장 강력한 응집수단이었다. 지나친 일반화라 할 수 있을까? 인격과 역사의 공통점은, 언제나 실체는 결정적 국면의 선택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란 것이다. 최소한의 안보를 위함이라고 합리화하기에는 군대를 통해 저질러진 폭압과 학살, 유린의 현장이 너무 많아서 재차 우리 앞에 성찰을 묻게 될 수 밖에 없다. 시리아의 아사드를 옹위하며 홈스에서 매 시간마다 처참한 살육을 선보이는 군대, 다름 아닌 시리아의 ‘국군’ 아니던가. 무력의 독점은 반드시 지속적인 견제와 그것의 축소를 위한 정치적 노력을 필요로 한다.
구럼비가 쪼개지고 파열되는 순간, 그 순간도 역시 역사에 있어 ‘결정적 순간’이다. 그 순간 공복과 파수견을 자처하던 국민의 군대가 그 가면을 벗어던지고 추악한 탐욕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셈이다. 고작 해군을 해적으로 고쳐 표기한 피켓을 들고 시위를 한 고대녀의 패러디와 풍자섞이 비판이 있었다. ‘우리 해군’은 건수 잡은 듯 옳다구나 하며 달려들었다. ‘침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며 미장하게 운을 뗀 후, ‘국민 맞냐’는, 즐겨써먹는 ‘정체성 되묻기’ 스킬을 날릴 후 ‘고소를 검토하겠다’는 권력층의 즐겨찾기 메뉴, 준열한 ‘명예훼손’ 필살기로 마무리했다. 거대한 바위마저 간단히 부셔버리는 무자비한 ‘블록버스터’급 작전을 감행하는 와정에, 쏟아지는 수많은 비난의 목소리에는 사실상 묵묵부답이면서 기껏 한다는 언론플레이의 스케일 수준 치고는 참 얄쌍궂고 쪼잔하다. 쉽게 말해 삐친건데 대양 해군을 꿈꾼다는 해군 나으리들이 할만한 대응방식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지극히 기본적인 절차도, 합의도, 무시한 해군을 두고 국민으로서 그 정도의 비판조차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 참으로 심각한 군사주의 국가 맞다. 문제많은 그곳을 두고 ‘해적기지’라고 칭했다고 비국민 딱지 붙일 셈이라면 나같은 사람, 군대 대신 딴거하겠다고 고집피우며 결국 감옥까지 오게 된 사람은 아예 ‘반국민’, ‘역적’으로 칭해도 좋다. 이런 일 두고 입다물고 무기력하게 ‘나랏님 하시는 일 그냥 닥치고 있어야지용’하는게 ‘국민‘이라는 정체성에 걸맞는 일이라면, 그런 허울 좋은 껍데기, 감투따위 미련없이 걷어차겠다.
근데말이야,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 뭐 물론 ‘해적’으로 지칭했다는 그 분을 두고 너무 심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더라도, 당신들, ‘해군’을 두고 최소한 ‘예의없는 것들’ 정도로 라도 혀를 차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을 것 같다. 문제의 본질은 여전히 변한게 없으니. 그 모든 이들에게 비국민 칭호 붙여주고 일일이 고소도 해보길. 그런 식으로 만든 해군기지가 과연 누굴 위해 함포소리를 울려댈까. 방패로 찍어대고 와이어로 가로막으면서 입까지 막는다면 그 기지에 대한 ‘신뢰도’, 급하강 할 수밖에 없다.
그 끔찍한 ‘발파’의 뉴스, 그 집단 내부에서 듣지 않았기에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그 뉴스. 그럼에도 금새 그 다행이라는 안도감마저 나의 무력감과 이기적인 ‘선민의식’과 같은 자위였을 뿐이었다. 가시지 않는 꽃샘추위에도 아랑곳 않고 차가운 바위를 끼고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는 평화 활동가들, 현지 주민들을 떠올리면 미안함과 무력감 밖에 밀려오지 않는다. 무능한 MB, 이미 끝나버린 너덜너덜한 명목상 권력을 들고 웃고 있다는 이 놈의 정부를 두고도 욕하고 조종하긴 쉬워도 정작 이런 큰 결정적 순간은 못 막아낸다. 그러고보니 노무현 정권 말기 때 한미FTA도 이랬지 아마. 해군기지도 실상 그때 추진된거라서 나는 2007년에 강정마을에 갔던 기억이 있다. 근래 민주당 공천을 두고 ‘486의 집권’이라 할만큼 당권투쟁이 크게 벌어지고 있고 이른바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것 같은데, 한편으로는 지난 대선 때의 MB열풍보다 더 두렵다. 486 이분들, 정통성과 정의감으로 무장된 적자․주류의식을 가지고 있는데다 똑똑하고 유능하시기까지하다. 그래서 자신들이 추진하는 일 논리정연하고 똑부러지게 긍정어법으로 설명하시는 분들인지라 어쩌면 FTA도, 해군기지도, 그 분들 집권 후에는 그럴듯한 ‘수정안’으로 재탄생해 결국은 똑같은 결과로 수렴될 것 같기 때문이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하는 건, 비단 연애사에 관한 기억만이 아니다.(아흐흑…) 그들이 집권할 때 해놓은게 이토록 불어난 셈인데 제대로된 과겨혁신이 없는 와중에 부상하는 486들을, 역사의 순방향이라고 봐야 할까? 反MB, 反수구보수의 주문 앞에, 이 질문마저 진영논리에 가리워진다. 그래서 더, 두렵다. 제발 그들이 확대재생산된 모순의 결정체가 아니길.
구럼비가 폭파되는 가운데 울려퍼지는 굉음은, 대자연의 울음소리다. 자연마저 ‘국민의 안보를 위한 희생대상’이라는 강요된 정체성을 뒤집어 쓴 채 파괴되며 울부짓는다. 오늘은 바위가, 내일은 바닷속 생명들이 울부짖을 것이다. 그 울부짖음의 아우라를 두고 인간은, 아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평화롭게 살 수 있을까? 20세기가 징집된 젊은이들의 역사. 강요된 애국시민의 정체성의 역사였다면 21기는 지구마저, 생명마저 그 강요된 정체성으로 인해 절멸되는 역사가 될 것인가. 할 말은 많고 활자는 무수히 찍히는데 정작 몸들은 말인 없다.
2012. 03. 11. 일요일
서울 남부구치소에서
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