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길완(대체복무요원)
2020년 10월 26일, 양심과 신념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한 이들 60여 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체복무요원으로 소집됐습니다. 그 이후로 4년이 지난 현재까지 1500명이 넘는 인원이 3년 동안 교정시설에서 합숙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병역거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과거와 달리 대체복무제도 시행 이후에는 오히려 많은 이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체복무제도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기획 〈대체복무 표류기〉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활동가 모임’에서 준비했습니다. 심사와 복무 전반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네 번째 글은 대체복무 중인 병역거부자 장길완님의 글입니다. 길완님은 대체복무자들의 상황과 대체복무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기고도 하고, 발표도 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복무를 규정한 「대체역의 편입 및 복무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지도 어느새 5년이 됐다. 그동안 3,000여 명이 넘는 병역거부자들이 대체역 심사위원회를 거쳤고, 3년의 복무를 마치고 소집이 해제된 대체복무요원 수백 명이 다시 일반 사회로 나왔다. 그러나 아직도 대체복무제도는 큰 틀에서 바뀐 것 없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체복무는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역사적 제도다. 이에 제도의 설계와 운영 역시 그러한 가치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병역기피자를 걸러내고 현역 군인과의 형평성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이 거센 사회에서 대체복무제도는 도입 취지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군대라는 익숙한 제도를 낯설게 바라보고 평화를 지향하는 다른 방법을 고민하는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복무를 선뜻 자신에게 적합한 선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제도가 생겨나기까지 시민사회의 역할
2018년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하면서 소수자를 포용하는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그러나 정부와 국회는 징벌적이고 엄격한 대체복무제도를 만드는 것으로 이에 화답했다. 현재 대체복무제도를 둘러싼 문제를 발생시킨 주된 책임은 정부와 국회에 있다. 하지만 제도가 표류하는 지난 5년 동안 시민사회가 의미 있는 역할을 했는지 역시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대체복무가 제도화된 이후, 시민사회의 목소리는 실종되었고 대체복무제도 개선은 인권운동의 주요 의제로 인식되지 않았다.
양심적 병역거부 인정과 대체복무제도 도입은 시민사회에서 오랜 기간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안이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주요 언론에서 병역거부를 기사로 다루면서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됐고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어진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운동이 성장했다. 이를 계기로 특정 종교 신자가 아닌 병역거부자가 주목받는 변화가 나타났다.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과 같이 인권의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날에도 대체복무제도 도입은 인권운동의 핵심 과제로 제시되고는 했다. 이처럼 병역거부가 정치적 문제로 자리매김하는 데 시민사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모든 병역거부자가 예외 없이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시기가 지나고 대체복무가 하나의 선택지로 주어진 현재, 시민사회와 대체복무제도는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 교정시설을 둘러싼 높은 벽이 상징하듯 대체복무제도 도입 이후에는 병역거부가 사회 현안으로 인식되지는 않는 듯하다. 대체복무제도를 인권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필요가 좀처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올 해 5월부터 근무하게 된 서울구치소 외정문 앞 풍경. 현판에는 “공정한 법 집행, 서울구치소 입니다.” 글귀가 적혀져 있다.
2018년 6월 헌법재판소는 2019년 12월까지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국회에 주문했다. 이 1년 반의 기간은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되는 결정적인 시기였다. 당시 시민사회에서는 대체복무제도가 제대로 만들어지도록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체복무제도를 관료와 전문가에게 일임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가 개입하고 참여함으로써 비판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정책에 당장 반영되지 않더라도 이후 투쟁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활동이었다.
물론 병역거부자에 대한 처벌 중단을 요구하는 일과 대체복무제도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고민하는 일은 조금 다른 층위의 논의를 요청한다. 병역거부를 범죄가 아니라 권리로 만드는 데 필요한 작업과 대체복무제도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작업은 연결되지만 서로 구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정책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기술적이고 세밀한 접근이 기대된다는 점에서 보자면 인권문제에 전문성을 지닌 시민단체가 두 가지 투쟁 과제 모두에서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체복무제도 도입 이후, 제도의 운영과 실태를 점검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활동은 뚜렷이 보이지 않고 있다. 제도 도입 시기에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안과는 별개로 시민사회 안을 제시할 만큼 역량과 의지가 모였던 반면, 현재는 제도에 어떤 한계가 있는지, 이로 인해 어떤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지, 무엇이 시급한 해결이 필요한 과제인지 논의하는 자리를 찾아보기 어렵다. 병역거부를 결심하고 대체복무를 선택한 이들이 겪는 문제를 그저 개인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지점이다. 대체복무에 대해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개선 방향을 논의하는 작업은 평화를 불화와 저항으로 번역하는 평화운동의 주요 과제여야 한다.
제도 도입 이후에는?
평화운동이 대체복무제도 개선 과정에서 어떠한 전략을 세웠는지, 앞으로 어떠한 역할을 감당할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이는 작년 가을에 열린 한 행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이라는 이름으로 개최된 국제 콘퍼런스는 오랫동안 병역거부 운동에 나선 〈전쟁없는세상〉 20주년을 기념하고 앞으로의 과제를 톺아보는 자리였다. 이틀간 진행된 국제 콘퍼런스는 크게 대체복무제도, 아시아의 병역거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병역거부라는 주제로 구성됐다. 그간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기획한 행사나 학회 차원에서 마련한 행사에서 대체복무제도를 논의한 사례는 있었지만, 시민사회에서 대체복무제도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이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공식 행사는 국제 콘퍼런스가 유일했다.
나를 비롯해서 대체복무를 하고 있던 이들은 행사에 대한 기대가 컸다. 대체복무제도의 문제를 짚어보면서 시민사회의 개입이 확장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랐다. 무엇보다 국제 콘퍼런스가 열린 2023년 11월은 대체복무제도 시행 3년 차를 맡아 처음으로 복무를 끝마친 대원이 등장한 시기였기에 제도에 대한 종합적 검토가 이루어지기에 적합한 시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포럼은 한국에서 시행되는 대체복무제도를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보다는 다양한 나라의 병역거부 사례와 대체복무제도를 살펴보고 국제 활동가와 교류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국제 콘퍼런스에서 진행된 세 가지 행사 중에 한국 대체복무와 직접 관련이 있던 것은 첫 번째 행사인 ‘대체복무를 돌아보며: 문제점과 개선점’이었다. 그마저도 세계 각지에서 이루어지는 대체복무의 현실과 역사를 한 데 아우르다 보니 운동의 시차가 어떠한 매개나 경유 없이 그대로 나열됐다고 느꼈다. 다양한 현장에서 투쟁하는 평화활동가와 만나서 서로의 고민을 나눈 것은 소중한 경험이었지만, 2023년 한국에서 평화운동이 대체복무제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살펴보기에는 부족한 자리였다고 생각한다.
행사 하나로 쉽게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복무제도 개선이 평화운동의 의제로서 주요하게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쓸쓸한 감정이 들었던 것은 분명하다. 결국 올해 5월 15일 세계 병역거부자의 날을 맞이해서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이들과 대체복무 중인 이들이 모여 대체복무의 실상을 파헤치는 ‘대체복무 고구마쇼’ 행사를 별도로 진행했다. 작년에 이어 올해 ‘대체복무 표류기’를 연재하는 것 역시 대체복무제도를 인권과 평화의 관점으로 살피고 변화시키는 일이 당사자만의 몫이 아님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전쟁없는세상에서 주최한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 국제포럼 제1세션인 ‘대체복무를 돌아보며: 문제점과 개선점’ 에서 발표자, 토론자, 사회자가 단상 위에서 질의응답 중에 있다.
무책임한 국가와 부재한 시민사회 곁에 방치된 제도
제도를 둘러싼 문제가 중첩되고 고착화된 대체복무 현장에서 자부심과 만족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때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제도로 주목받았지만 대안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실패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양심을 심사한다는 것 혹은 심사받는다는 것의 불가능성을 고민하며 심사제도에 회의를 느끼는 심사위원과 대체역 신청인들, 인권 역량이 낮고 위계적이며 폐쇄적인 교정시설에서 장기간 합숙 복무가 강제된 대체복무요원, 특정 종교 신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주변화되는 이른바 개인 신념 대체복무요원 모두 표류하고 있다.
심지어 교정기관 관계자 역시 대체복무제도가 교정기관에 어떤 공익적 가치를 제공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는 한다. 대체복무요원이 하던 일은 대부분 그간 수용자가 담당하던 노역이었던 만큼 업무는 동일하되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만 교체한 모양새가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현재는 교정본부에서는 대체복무요원의 업무를 확대한다는 명목으로 명확한 법적 근거와 유권 해석 없이 CCTV로 수용자를 관찰하는 영상 계호 업무를 대체복무요원에게 시키고 있다.
어떤 면에서 국가가 인권 문제 해결에 자발적으로 앞장서는 사례는 상당히 드물다. 이는 인권이 자신의 몫을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 자신의 주장이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들, 자신의 삶의 방식이 세계에 기입되지 않는 이들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반면 국가는 인권의 언어를 번역하고 이해하고 이에 응답하기보다 자본과 권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이에 시민사회가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당사자를 조명하며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국가가 인권 정책을 시행하도록 견인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민사회의 노력으로 어떤 정책이 제도화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투쟁에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다. 장애인차별금지법이 도입되었다고 해서 장애차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여성 폭력 방지 기본법이 통과되었다고 해서 성차별이 없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도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어지고 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또 다른 투쟁이 펼쳐진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대체복무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체복무제도가 전제하는 기본 개념에 의문을 던지는 일, 제도가 누락하거나 배제한 부분을 포함시키는 일, 제도에 국한되지 않는 사회적 변화를 추동하는 일 모두 중대한 과제다. 그러나 평화운동 가운데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합의된 입장이 없고, 제도의 개선 방향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부재한 상황이 지속되면서 대체복무제도의 표류 역시 계속되고 있다.
병역거부자도 외면하는 제도
개인적인 경험일 수 있겠으나 입대를 앞두고 평화와 양심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는 주변 동료들도 대체복무를 자신의 선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현역 대체복무와 비교해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인 예비역 대체복무마저도 시민사회 동료들이 쉬이 선택하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병역거부가 양심과 신념의 자유를 실현하고 폭력과 전쟁에 저항하는 적극적 실천임에도 대체역 심사와 복무 과정 전반이 그러한 취지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병역거부자가 대체복무제도를 외면한다고 간단히 설명할 수는 없다. 오히려 전직 장성 출신 심사위원 앞에서 양심의 진실성을 호소해야 하고, 인권 침해적인 규율을 요구하는 교정시설에서 합숙복무를 해야 하며, 의미를 찾기 어려운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대체복무제도가 병역거부자를 외면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회운동의 오랜 주장처럼 병역을 거부하고 전쟁에 저항하는 일은 모든 이들의 보편적 권리다. 대체복무는 이를 구체화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도입되었고, 이에 누구나 선택할 수 있도록 최대한 문턱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제도는 특정 종교의 신자에게 맞춰진 형태로 설계, 도입, 운영되어 대체복무 현장을 일반 사회로부터 고립시키고 있다. 결국 대체복무를 선택하는 병역거부자의 수는 점점 줄어들고, 당사자가 겪는 문제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으며, 병역거부자의 고통은 여전히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몫으로 남겨진다. 앞서 적었듯이 여기에는 국가가 가장 큰 책임이 있지만, 시민사회 역시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은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병역거부 운동의 다음 과제
20년 동안 전개된 병역거부 운동 덕분에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었다면, 이제는 그다음 단계에 맞는 전략과 투쟁이 요청된다. 제도 도입 이후 5년이 흐른 지금까지 제도 개선에 관한 별다른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제도에 대한 입장과 견해조차 불명확한 상황은 충분히 절망적이다. 병역거부를 동시대의 문제로 만드는 데 시민사회가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대체복무를 평화운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법과 제도 안팎에서 투쟁을 이어나가는 작업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 심각한 문제라는 말처럼 제도 역시 국가와 관료에게 맡겨두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다. 더욱이 제도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이들이 제도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따라서 똑같은 제도라고 하더라도 매우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고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시민사회의 개입이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대체복무 제도화는 시민사회가 엄청난 노력과 수고를 들인 영역이지만, 정작 제도화 이후에는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20년 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이 거리에 모일 때, 병역거부는 전쟁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방법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지구 곳곳에서 파괴와 지배가 서슴없이 자행되는 때, 대체복무는 폭력을 끝장내고 세계를 바꾸는 유의미한 결정으로 선택받을 수 있을까? 한국 사회의 남성성, 군사화, 폭력 문화를 고민하는 이들이 대체복무제도를 당사자의 자리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대체복무제도가 병역거부 운동의 미래가 아니라고 선언할 수 없다면, 인권과 평화의 언어가 대체복무제도에 또렷이 새겨질 수 있도록 시민사회가 나서야 한다. 군 복무와의 형평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제도의 취지를 왜곡하고, 병역거부를 특정 종교 신자의 선택으로 축소하는 이들이 제도의 한계를 긋는 시도에 맞서 대체복무제도가 민주적 가치를 보장할 수 있도록 앞장서야 한다.
대체복무제도를 개선하는 작업은 시민사회 운동, 그 가운데서도 평화운동의 시급한 과제라고 믿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마 전부터 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모임이 꾸려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5년의 침묵과 공백을 뛰어넘는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