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병역거부자, 전 대체복무요원)
병역거부를 고민하는 동안 내게 병역거부를 추천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적어도 수감생활을 했던 병역거부자 가운데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명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걸맞은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혹은 수감생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지 스스로 헤아려보아야 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고, 병역거부라는 결정은 같아도 그러한 결정에 이르게 된 과정까지 같을 수는 없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병역거부자가 역경을 돌파하는 힘만큼 병역거부자에게 파고드는 힘이 크다는 것을 절실히 체감했기에 그저 말을 줄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복무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대체복무를 추천할 수 있을까? 대체복무가 아무리 길다고 해도 적어도 수감생활은 아니니까, 일과 이후에는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외출·외박·휴가를 이용해서 종종 얼굴을 볼 수 있으니까 나름 괜찮은 선택지라고 제안할 수 있을까? 대체복무 초기부터 나는 다른 누군가에게 대체복무를 자신 있게 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지금은 그 생각이 더욱 확고하다. 이는 대체복무가 이른바 국가가 허락한 병역거부이기에 지지하지 않는다는 정치적인 입장도, 우리가 모두 다른 시공간을 살아내기 때문에 각자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윤리적인 자세도 아니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이 제도에 참여해서 나와 비슷한 괴로움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마음이다.
하지만 내게 병역거부를 추천한 이들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내가 병역거부를 했던 것처럼 누군가는 아득한 고민과 반복되는 결심의 나날을 지나 대체복무를 선택할 것이다.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는 동의어가 아니지만, 대체복무가 병역거부에 대한 주요한 번역으로 제도화된 상황에서 대체복무를 찬찬히 살펴보는 작업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글은 대체복무의 여정을 돌아보면서 내가 거쳐 온 과정을 기록한 일종의 후기다. 내가 이전 세대의 병역거부자가 남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통해 나의 좌표와 방향을 가늠해보았던 것처럼 이 글이 어두운 우주를 횡단하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사소한 절망
오랜 기간 사회운동은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중단하고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대체복무가 가능해질 것으로 믿은 사람은 2017년에도 그리 많지 않았다. 잔뜩 긴장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경찰 조사에서 담당 형사는 내 사건이 조서 “다섯 장짜리밖에” 안 될 만큼 간단한 편이라 사건을 곧장 검찰로 넘기겠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범죄 사실을 인정한 확신범에게 신경 쓸 별다른 이유(애써 너그럽게 말하면 여유)가 없었고, 소속 종교를 성공회로 명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처럼 보였다. 복잡한 사건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쉬운 사건이 걸려서 행운이라는 그의 말이 너무나 어이없던 나머지 제대로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도 적절히 받아칠 말을 고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대체복무제도가 도입되기 전에 형사처벌은 그만큼 당연한 결론이었다.
그나마 법정에서는 대체복무에 관해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대체복무제도를 마련하라는 2018년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 이후, 재판의 쟁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쟁점 자체가 없던 사건에 쟁점이 생겨났다. 유죄판결이 사실상 정해져서 꼼꼼히 살펴볼 필요가 없던 사건이 다툼의 여지가 있는 사건으로 바뀐 것이다. 내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던 1심 재판부와 달리 2심에서는 내가 과연 병역거부를 할 만한 자격과 조건을 갖춘 인물인지 살폈다. 그 가운데는 대체복무에 참여할 의사를 확인한 것도 포함됐다. 그때 국회에서는 대체복무를 5년은 해야 한다느니, 휴전선에서 지뢰 제거를 시켜야 한다느니 하는 막말이 한창이었고, 그나마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과대평가된 법안이 3년 동안 교정시설에서 합숙 복무를 강제하는 현행 대체복무제도였다.
재판부의 물음에 나는 제도에 아쉬운 측면도 있지만 제도가 마련됐다는 데 의의를 두고 대체복무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의사 표명은 내가 무죄 판결을 받는 데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만일 대체복무 역시 거부하겠다고 진술했다면 아마도 재판부는 신속하게 유죄를 선고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당황스러운 사실은 당시에는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어서 대체복무가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나만 해도 안개 속에 놓인 대체복무보다 다른 평화수감자에게서 들은 수감생활이 더 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대체복무를 수행하겠다는 내 말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다른 자리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3년 8개월 동안 이어진 재판은 마치 부조리극과 같았다.(“재판이 한 편의 부조리극 같았다”, 한겨레21 1372호, 2021. 7. 18.) 1심 재판은 얼마나 빠르게 진행됐는지 격려차 법정에 와주신 신부님과 잠시 기도할 겨를조차 없었다. 준비했던 말은 많았지만 워낙 분주하게 이루어지는 재판에 나도 모르게 래퍼처럼 말을 쏟아냈다. 컨베이어 벨트에 놓인 택배 물품처럼 수많은 피고인이 이른바 3분 재판을 통해 각자의 운명을 마주했다. 나는 여느 병역거부자와 마찬가지로 징역형 1년 6개월의 정해진 결론에 이르렀다. 예외가 아니라서 안도했고 예외가 아니라서 절망했다. 항소해서 다시 판단을 받아보라는 재판부의 마지막 말이 행운을 빈다는 이야기였는지,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는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항소심 재판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통스러웠다. 무엇보다 양심과 신념이라는 섬세한 내면의 요소를 형사재판이라는 둔탁한 도구로 파헤치려는 시도가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어떤 게임을 했는지, 매주 성당에 출석했는지, 심지어 앞으로 결혼할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면서 유무죄를 가름하려는 시도는 정말이지 우스꽝스러웠다(당연히 피고인의 위치에서는 전혀 웃음이 나지 않았다). 대체복무를 마친 시점에서 재판 과정을 되돌아보면 허탈하고 황당한 마음이 든다. 대체복무가 이런 것인 줄 알았어도 검사가, 변호사가, 판사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을까. 형사재판이 대체복무에 필수적인 선행요건이어야만 했을까. 재판은 무엇을 규명했고 무엇을 규명하지 못했을까. 내 곁에 있던 동료 병역거부자들은 왜 재판의 문턱을 넘지 못했을까.

병역거부 형사 재판을 받던 어느 날, 의정부 법원 앞에서
“선인장 후기능”
무죄를 확정한 대법원 판결 이후, 대체역 편입 절차가 연이어 진행됐다.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는 대법원 판결로 심사를 갈음하고 신속한 인용 결정을 내렸다. 흥미로운 점은 대법원에서는 내가 종교적 양심과 정치적 신념 모두에 근거해서 병역거부를 했다고 인정했지만, 심사위원회에서는 내 사례를 종교적 양심이 아니라 개인적 신념에 의한 것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기술적인 차원에서 종교적 사유는 여호와의증인(이하 증인)에게 해당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것만큼 개인적인 것은 없고 개인적인 것만큼 정치적인 것은 없겠지만, 내게 주어진 개인 신념이라는 이름표는 증인이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한 곳에서 한 명의 개인으로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헤아려보도록 했다.
내가 대체역에 소집된 시기는 대체복무제도가 시행 1년 차에 접어든 때였다. 나는 전국 10여 개 기관에서 일하는 600여 명의 대체복무요원 가운데 증인이 아닌 첫 번째 사례였다. 2024년 기준, 대체복무요원은 3배 가까이 늘었지만 그중에서 증인이 아닌 이들은 여전히 1%를 넘기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사전 정보를 얻지 못한 채 낯선 환경을 마주한 내가 제일 많이 한 일은 기록하는 것이었다. 전자기기 사용이 금지된 교육 기간 3주간 내가 목격한 모든 장면을 받아적었다. 교육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생활관은 어떻게 생겼는지, 식사는 괜찮은지, 분위기는 어떠한지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규칙을 찾아내고 패턴을 확인하는 일은 일상을 안전하게 만들기 위한 자구책이자 다음에 대체복무에 참여할 이들을 위한 나름의 선물이었다.
나는 대체복무를 하면서 교정시설 네다섯 군데를 거쳤다. 그중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낸 곳은 첫 번째 복무지였다. 비수도권 지역에 있는 중소형 교정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일기예보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도시에 거주한다는 것의 의미를 얕게나마 배울 수 있었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지역에 사는 것이 아니라 생활관 안에 머문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특히 코로나 위기에 따른 방역 지침이 강화됐을 때는 사실상 교정시설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건강진단결과서(구 보건증) 발급을 위해 모처럼 보건소에 들러 엘리베이터를 탄 순간, 수직으로 이동하는 감각이 오랜만이었던 탓에 어지러웠던 기억이 난다. 휴대폰 사용이 하루 서너 시간으로 제한되어 심리적 단절감이 물리적 거리보다 크게 느껴진 시기도 있었다. 생활관 창가에 기대 멀리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도대체 대체복무를 수행하는 데 합숙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는 날이 지속됐다.
의문이 드는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대체복무요원으로서 내가 3년 동안 한 일은 대원의 일상과 살림살이를 담당하는 행정, 직원과 대체복무요원의 식사를 준비하는 급식, 수용자에게 적절한 의료적 조치를 제공하는 보건위생, 교정시설의 전자기기와 정보시스템을 다루는 전산, 수용자의 물품을 관리하는 보관 업무였다. 이들 업무는 대부분 대체복무요원이 배치되기 전까지 수용자가 하던 일이었다. 어떤 대체복무요원은 자신의 가족이 과거에 병역거부로 수감생활을 했던 기관에 배치됐는데, 가족이 하던 것과 똑같은 업무를 똑같은 부서에서 똑같은 직원과 하기도 했다. 직원 사이에서는 교정본부가 힘이 없어서 애물단지 같았던 대체복무요원을 떠맡은 것이라는 소문만이 무성했다. 대체복무요원은 왜 다시 교정시설에 와야 했는지, 평화수감자의 자리와 대체복무요원의 자리는 얼마나 달라졌는지, 대체복무는 도대체 무엇에 대한 대안인지 좀처럼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 내 곁을 맴돌았다.
어쩌면 여기서 이 일을 3년이나 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대체복무와 군 복무의 형평성이 실현된 지점인지도 모르겠다. 그간 사회운동에서 더 나은 방안을 제시했음에도, 이미 외국에서 백여 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제도를 운용했음에도 오직 교정시설에서 무려 3년 동안 어떠한 예외 없이 합숙 복무를 해야 한다는 비합리적인 제도가 4년째 계속되고 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천연덕스럽게 펼쳐진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워서인지, 아니면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봐도 좋은 아이디어가 금세 떠올라서인지, 연말이면 어김없이 제도 개선에 관한 뜬소문이 퍼졌다가 연초가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졌다. 내년부터 2년 합숙 복무와 1년 출퇴근 복무 형태로 바뀐다더라, 기수별로 복무 기간이 점차 줄어든다더라 등 출처를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가 생활관에 떠돌았다. 번번이 예상이 어긋남에도 속절없이 기대를 거는 것이 우리가 세 번의 연말연시를 맞이하는 방식이었다.
일상이 불현듯 참을 수 없이 갑갑해질 때면 생활관 옥상에 올라 바람을 쐬고는 했다. 그러면 ‘선인장 후기능’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수용자 작업장이 담장 너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선인장을 기르는 특별한 기술을 가르치는 곳으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先 인간 後 기능’, 그러니까 ‘기능을 갖추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자’는 서늘한 만트라가 적힌 건물이었다. 병역거부자가 수용자 작업장과 대체복무 생활관을 가르는 담장 하나를 넘어오는 데 20년이 걸렸다. 사회운동에 한정하지 않는다면 그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마저도 모든 병역거부자가 담장을 넘지 못했다. 별과 별을 가로지르는 데 빛의 속도가 필요하다면, 병역거부자가 비인간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이동하는 데 소요된 시간은 비교적 짧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마치 사건의 지평선 너머에서 벌어진 일을 전혀 감지할 수 없는 것처럼 교정시설 안에서 병역거부자의 자리가 달라진 일이 담장 밖에서는 어떠한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원칙을 바꾼 것일까, 아니면 예외를 늘린 것일까. 대체복무를 끝마친 지금도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