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우(병역거부자, 전 대체복무요원)

 

2020년 10월 26일, 양심과 신념에 따라 군 복무를 거부한 이들 60여 명이 역사상 처음으로 대체복무요원으로 소집됐습니다. 그 이후로 4년이 지난 현재까지 1500명이 넘는 인원이 3년 동안 교정시설에서 합숙복무를 하고 있습니다. 병역거부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과거와 달리 대체복무제도 시행 이후에는 오히려 많은 이들의 관심 밖으로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체복무제도를 직접 경험한 이들이 현장에서 길어 올린 생생한 경험을 전하는 기획 〈대체복무 표류기〉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모색하는 활동가 모임’에서 준비했습니다. 심사와 복무 전반에서 나타나는 문제를 살펴보고 이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는 글을 연재합니다. 시우 님의 글은 이번 연재를 마무리하는 글로 이 글과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대체복무를 하면서 나를 ‘여호와의증인(이하 증인)이 아닌 첫 번째 대체복무요원’으로 부르는 이들을 종종 만났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대체복무를 먼저 시작했을 뿐, 대체역으로 편입된 이들 가운데 내가 최초는 아니었다. 더욱이 내가 대체복무를 시작하기 전에도 증인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바로 증인 조직에서 이탈하거나 제명된 이들이다. 작년에 다른 이름으로 발표한 글(서하, [대체복무 표류기] 0.5%로 살아남기,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2023. 11. 3.)에 적었듯이 이들은 증인 조직에서 성원권을 박탈당하며 증인 구성원들은 원칙적으로 이들과 교류와 접촉이 금지된다. 1,095일 동안 24시간 합숙복무를 하는 곳에서 말 그대로 존재가 지워지는 것이다. 복무관리관의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생활관 복도에서 마주칠 때 가볍게 인사를 하는 것 정도가 최대한으로 허용된 관계였다.

나와 같은 기수에도 제명된 대원이 한 명 있었다. 제명 이후 증인 조직에 복귀한 다음 대체복무를 시작하거나 아예 대체역 편입을 취소한 사례는 있었지만, 제명된 상태로 대체복무를 시작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나는 그가 죽고 싶다고 말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한 적이 있다. 안 그래도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던 복무관리관은 내게 혹시라도 문제 상황을 발견하면 반드시 알려달라고 당부했다.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상 자체가 문제 상황이 아닌지 고민했지만, 이 질문은 복무관리관이 아니라 증인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국 3주 교육을 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증인들이 제명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봤다.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들도 그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도대체 왜 왔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포기할 거면 진작에 하지 주변 사람들만 고생시켰다’, ‘이제라도 안 봐도 돼서 다행이다’라는 이야기가 오갔다. ‘제명된 사람과는 교류하지 않는다는 교리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안타깝지만 이게 다 그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는 변명이 그나마 온건한 편이었다. 나는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고 도덕적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결코 먼 행성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각할 수 없었다. 이는 주류 사회와 보수 교회가 병역거부자를 처벌하고 배제해온 방식이었고, 성소수자를 비난하고 차별하는 방식이었고, 증인을 비롯한 소수 종교인을 괴롭히고 억압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증인들과 진솔한 관계를 맺는 일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이른 시점부터 하게 됐다.

 

착한 사마리아인

증인에게 최적화된 세계에서 나는 자주 불리한 자리에 놓이고는 했다. 내 이름을 ‘시후’라고 착각할 정도로 초기에 이미 많은 이들이 내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교육센터에서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담당한 강사는 내가 ‘퀴어 페미니스트 병역거부자’라고 소개된 신문기사를 강의자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는 궁금한 점이 있으면 연락하라며 친절하게 이메일 주소를 공유했지만, 정작 내가 보낸 항의 메일에는 답하지 않았다. 생존의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하는 곳에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내게 허용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그럼에도 내가 해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법을 빠르게 익혔다. ‘대학원을 졸업한 나이 많은 비증인 성소수자’라는 차이를 언제 드러내야 하는지, 어떻게 드러낼지, 누구에게 드러내도 괜찮은지 끊임없이 판단하는, 매우 익숙하고 피곤하고 지긋지긋한 일상이 계속됐다.

나는 대체로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여겨지고는 했다. 나는 증인의 요구를 가급적 받아들였고, 증인은 이를 우호적인 제스처로 받아들였다. 증인은 경우에 따라 나를 같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묶기도 하고 자신들과는 구분되는 개인 신념 대원으로 지칭하기도 했다. 나 ‘역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종교적 양심(과 퀴어 페미니스트로서 정치적 신념)에 따라 병역거부를 했다는 주장은 증인만이 참 종교이고 진리라는 확신 앞에서 별다른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편 몇몇 직원은 내가 (증인들이 자신을 비하하는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여호와’ 내지 ‘여증’과는 달리 이른바 진정한 의미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면서 치켜세웠다. 제도가 개선되면 아이에게 대체복무를 권하고 싶다는 직원도 만났다. 반면 증인도 아닌데 왜 군대에 가지 않았냐며 타박하는 이들 또한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나에 대한 과도한 관심을 흩어놓으면서도 필요한 대로 이를 자원으로 활용했다.

내가 만난 증인은 대체로 동시대의 평범한 청년 남성에 가까웠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인 특성을 제외해야 한다는 첫 번째 전제와 그게 불가능하다는 두 번째 전제가 따라붙어야 한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기 위해 자격증 공부에 매진하는 모습, 형과 동생의 관계로 이루어진 남성 사회에 익숙한 모습, 외부에서 진행하는 종교활동이 궂은 날씨로 취소된 것을 아쉬워하면서도 반기는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었다. 주류 사회와 보수 교회가 편견과 낙인을 조장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그렇게 이상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바로 그만큼 증인 조직과 개인이 자부하고 내세우는 것과 달리 이들은 그렇게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춰본다면 나는 증인이 ‘이방인’(증인이 아닌 이들)이나 ‘거짓 종교’(증인이 아닌 종교)보다 나은 점을 좀처럼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기억하는 장면은 모순적이고 중층적이다. 자신의 가족이 불과 얼마 전에 병역거부로 수감생활을 했음에도 수용자의 인권이 ‘지나치게’ 보장되는 세태를 한탄하는 대원이 있는가 하면, 많은 수용자에게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며 수용자의 편의를 최대한 고려해서 업무를 처리하는 대원이 있었다. 직원에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따질 것은 따져야 한다면서 행동하는 대원도 있었고, 복무생활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적힌 인권진단 조사지를 복무관리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멋대로 파쇄해버린 대원도 있었다. 대체복무를 시작한 지 이제 막 6개월이 지난 대원에 대해서 ‘닳고 닳았다’ ‘눈이 풀렸다’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누구보다 일하기 싫어한 신규대원이 있었고, 소집해제 전날까지 빈틈없이 생활하면서 주변에 울림을 준 대원이 있었다.

내게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교회는 타락했다고 나름 일침을 놓은 대원 곁에는 성소수자인 건 아무런 잘못이 아니며 나중에는 증인 교리도 바뀔 것으로 내다본 대원이 있었다. 비증인이 겪는 부당한 대우와 차별 조치를 없애기 위해 먼저 나선 대원이 있는가 하면, 비증인이 소수라는 이유로 (나로서는 여전히 짐작조차 어려운) 특혜를 받는다고 분노한 대원도 있었다. 내게는 알리지 않은 채 자기들끼리 회식을 하고 나들이를 가는 생활실이 있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내 의견을 참조하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생활실이 있었다. 이처럼 대체복무 현장은 대체복무제도 도입보다 아마겟돈(세상의 멸망)이 먼저 일어날 것으로 믿었던 대원과 빠듯한 월급을 쪼개서 꾸준히 국민연금을 내는 대원이 함께 있는 곳이었다. 증인들조차 ‘형제들’(남성 증인을 가리키는 호칭)과 생활한 덕분에 영적으로 성장했다고 기뻐하는 이들과 ‘이방인과 다름없는 형제들’을 바라보며 신앙의 회의를 느끼는 대원이 동시에 있었으니 내가 마주한 풍경이 이례적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증인과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하고 유지하는 데 곧잘 실패했다. 증인의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 2년 동안 교리공부를 했음에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증인 조직의 강력한 위계 구조와 기이한 선민의식을 용납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하게는 증인 조직이 발휘하는 중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개개인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존재이기에 저마다 다른 고도와 속도를 고려해서 도킹하는 작업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복무한 기간이 늘어나고 여러 기관을 경험할수록 증인 내부의 차이가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기수, 지역, 세대, 계급 등에 따라, 그리고 어쩌면 가장 결정적으로 대체복무 이전에 비증인과 어울렸던 경험 여부에 따라 증인들은 서로 다른 입장과 판단을 내렸다. 증인 조직의 공식 교리라는 선율과 증인 개인의 생애 경험이라는 선율로 이루어진 대위법 악보에서 나는 곧잘 불협화음을 내고는 했다. 적응해야 하지만 적응할 수 없고, 적응하고 싶지 않지만 적응되는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나는 끝내 적응하지 않았다. 이 비적응의 역사는 얼마간의 자부심과 커다란 상처로 남아 있다.

2023년 11월

2023년 11월에 열린 국제컨퍼런스 ‘양심적 병역거부, 진단과 모색’에서 대체복무제의 문제점에 대해 발표하고 질의 응답 중인 시우(가운데)

 

저항의 화원

대체복무를 하면서 가장 좋아한 일은 꽃을 가꾸는 것이었다. 잠을 깊이 이루지 못하는 날이 이어지고, 불안과 우울이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시기를 거치면서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꽃을 산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꽃집에 들러 다채로운 꽃을 만났다. 색상, 질감, 높이, 모양 등을 살피면서 꽃을 배치하는 작업은 대체복무에서 크게 요구되지 않는 창의성과 섬세함을 발휘해서 마찬가지로 좀처럼 경험하기 어려운 순수한 기쁨을 누리는 미적 노동이었다. 과중한 업무량과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기피되는 급식 업무를 즐겨 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도 (조금 건조하지만 정확하게 부르면) 급식노동자 혹은 (문제가 있지만 현장감을 살리자면) ‘이모들’이 식물을 키우고 공간을 돌보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식당 뒤편 작은 공터에 빼곡히 들어앉은 다육식물과 계절마다 피고 지는 꽃을 보면서, 일하는 장소에 대한 이모들의 애착과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꽃을 보며 지친 마음을 달랬다고 하면 황당함을 느낄 대원도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제일 오래 머물렀던 기관은 대원의 처우가 좋다고 알려진 곳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복무관리관은 대원을 직원에 준해서 대하려고 노력했고, 제도 자체가 징벌적인 성격을 띤다는 점을 고려해서 생활만큼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팀장은 대원이 요청해서 마지못해 응하는 것과 대원의 필요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하고 앞장서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면서 자신은 끌려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끌고 가는 사람임을 명확히 했다. 나는 복무관리관을 포함해서 직원들과 전반적으로 가깝게 지내면서 외교적인 제스처를 보였다. 순환 근무로 인해 부서를 옮기게 됐을 때 직원들이 그간 고생했다며 수고비를 모아 건네준 에피소드에 대해 친구가 ‘이 정도면 사측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내가 경험하는 대체복무가 상대적으로 훌륭한 수준이라는 말을 믿기 어려웠다. 직원이 아무리 호의적이라고 해도 구조적 차원에 존재하는 제도의 문제를 우회할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국방부와 병무청은 대체복무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역할을 떠넘겼다. 대체역 심사위원회는 군 관련 인사가 과반을 차지하는 불균등한 위원 구성과 제한된 권한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법무부에서는 제도 개선을 주요 과제로 인식하지 않았고, 교정본부에서는 국회가 법을 바꾸기 전까지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무책임한 자세로 일관했다. 복무기관에서는 반드시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하는 강행규정이 없는 한, 검토해보겠다는 공허한 답변만 반복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다. 시민사회는 제도 도입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고, 증인 조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내세우며 언제나처럼 나서지 않았다. 결국 일선 기관의 복무관리관이 어떤 인식을 갖고 어떻게 방침을 세우는지에 따라 대체복무요원이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일이 되풀이됐다.

하루라도 빨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무력감이 증폭되는 가운데 나는 종종 길을 잃고는 했다. 환멸과 분노와 끝없는 말 줄임표로 채워진 생활이 조금 덜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새로운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이 등장한 순간이었다. 이들이 대체복무를 하면서 겪을 어려움에 염려가 되면서도 더 이상 유일한 예외가 아니라는 안도감과 반가움을 느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요?’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요?’라는 공감 어린 의문을 주고받던 우리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한줌단》을 만들었다. 한 줌밖에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한 줌이라도 되고 싶어서 꾸린 모임이었다. 《한줌단》은 느슨한 활동 단체이자 자조적 성격을 지닌 당사자 모임이면서 제도 개선에 나선 프로젝트 집단으로서 변화의 실마리를 찾고자 했다. 작년과 올해 두 차례에 걸친 연재 기획 역시 대체복무의 현실을 조명하고 저항의 화원을 같이 만들기 위한 시도였다.

단지 생활을 같이 하는 우리가 아니라 마음을 같이 하는 우리를 만나는 일은 커다란 힘이 됐다. 여기에 더해서 담장 밖에 있는 이들로부터 격려와 응원이 잇따랐다. 편지를 보내준 이들, 푸념과 한탄을 들어준 이들, 글을 공유하고 행사에 참석해준 이들이 기꺼이 기댈 곳이 되어주었다. 나는 이들 덕분에 내가 소속된 곳이 어디인지, 준거로 삼는 이들이 누구인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대체복무 현장 안에서는 적응과 비적응의 상태를 넘나들고, 밖에서는 소속과 준거에 맞춰 시공간을 다시 조율하는 작업이 대체복무 내내 반복됐다. 그 과정에서 배운 것 하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에 먼지가 쌓이다 보면 여유가 사라지고 답답한 기분이 들어 이내 시들어버리지만, 그럴수록 새로운 공기가 들어오도록 마음의 문을 열고 자주 환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헨리 나우웬이 이야기했듯이 소중한 이들과 나눈 따스한 식사와 다정한 포옹이 나를 구원했다. (헨리 나우웬, 최종훈 옮김, 《제네시 일기》, 포이에마, 2010.)

 

다른 우주에서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조차 없다면,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가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인류의 외연을 확장하더라도 그곳에 매번,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면,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내가 대체복무를 마무리한 곳은 나와 비슷한 시기에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유죄선고를 받은 이들이 수감됐던 곳이다. 서로의 출처는 달랐지만 고민의 모양은 닮아있던 우리는 어느새 다른 궤도에 놓였다. 결과가 엇갈리는 상황은 이전에도 있었다. 내게 무죄를 선고한 항소심 재판 이틀 전에 동료 병역거부자는 항소심에서 유죄선고를 받았고 두 달 뒤에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됐다.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는 ‘평화적 신념에 따른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의 무죄 선고를 환영한다’며 내 사건을 축하하는 논평과 ‘평화활동가에 대한 대법원 유죄 판결을 규탄한다’며 동료 병역거부자 사건에 분노하는 논평이 나란히 실렸다. 내가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병역거부자는 대체역 심사위원회에서 편입 기각 결정을 받았고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되고 있다.
병역거부에 따른 사법 절차가 시작되고 우여곡절 끝에 대체복무를 마치기까지 7년이 흘렀다. 고민하고 준비한 시간까지 셈하면 훨씬 길고 험난한 과정이었다. 내게는 너무나도 기나긴 여정이었지만, 실제로는 내가 가장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에 웃음조차 나지 않는다. 나는 수감생활을 앞두고 두려움을 표하면서도 더 이상 재판을 치를 일이 없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하던 동료의 덤덤한 말투를, 사법부를 설득하지 못해서 실망스럽고 죄송스럽다며 고개를 들지 못하던 동료의 모습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같은 교정시설에 있음에도 각자 다른 옷을 입은 채 편지를 나누는 일과가 안겨주던 먹먹한 느낌도, 대체복무의 시작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흔쾌히 받을 수도 어색하게 거절할 수도 없던 난감한 감정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내게 병역거부의 여정을 마치면서 어떤 기분이 드는지 묻지만, 나는 그저 이렇게 마침표를 찍어도 괜찮은지 확신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서 있다. 막막한 현실과 서로 다른 진실 앞에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 가지다. 우리는 빛의 속도로 가지 않는다. 사회 변화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느리고 더딘 것처럼 보이고, 그러한 변화마저 멈추고 막아서는 이들은 기어코 나타난다. 우리가 아무리 빛의 속도로 가더라도 그보다 더 빠르게 빛을 등진 채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계가 있고, 끝을 알 수 없이 추락하는 세계가 있다. (홍정훈, [감옥에서 온 편지] 전쟁없는세상께 드리는 열 번째 편지,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2022. 1. 26.) 관측 가능한 우주 너머로 나아갈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을 때, 더 이상 같은 우주라는 개념이 불가능해질 때, 그렇게 남겨지는 사람이 생겨나고 외로움의 총합이 늘어만 갈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는 차디찬 질문을 껴안은 채 하릴없이 열두 번의 계절을 보냈다. 이제는 여러분과 그 질문을 나누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