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성공회대 냉전평화연구센터)
전쟁없는세상: 비상계엄이 선포한 지 두 달 보름이 지나갑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윤석열 탄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계엄과 쿠데타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계엄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주로 그날의 정황 및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내용입니다. 전쟁없는세상은 계엄, 쿠데타와 관련해서 반군사주의 맥락에서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고 저항해야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런 고민을 담은 글 다섯 편을 기획했습니다. 함께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기 위한 글들입니다.
- 망설임과 배신감이 구한 세계: 최성용(성공회대 냉전평화연구센터)
- 계엄을 막은 힘, 시민들의 비폭력 저항: 이용석(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폭주하는 남성성과 계엄: 오매(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
- 12.3 계엄, 윤석열의 군비 증강과 방산 진흥의 종착역: 쥬(전쟁없는세상 활동가)
- 그날, 사람들의 선택과 행동을 이해하고 싶다면-《명령에 따랐을 뿐》을 읽고: 안민영(인천원당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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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에 입대해 처음 훈련을 받을 때 교관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이 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람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지 말라는 것이다. 탄창이 없는 상태라 해도 총으로 누군가를 겨누며 장난을 치면 호되게 혼이 난다. 어떤 경우에도 전우를 향해 총구를 겨누어서는 안 되며 항상 총구가 하늘 방향을 향하도록 총을 들라고 교육받는다.
물론 훈련 상황이 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가령 나는 전우를 향해 총을 발포해 본 경험이 있다. 레이저 감지기가 달린 소위 마일즈 장비라 불리는 훈련용 장비를 착용하고 옆 중대와 교전을 했다. 다들 서바이벌 게임처럼 들뜬 마음으로 뛰어다니며 상대를 향해 공포탄을 쏘았다. 훈련이 끝난 뒤, 중대장은 다들 게임처럼 훈련에 임했지만 실제 전쟁 상황이 되면 무서워서 고개를 처박고 움직이기도 어려울 거라고 말했다.
주저하고 망설이던 계엄의 밤
아마도 그 말이 맞을 것이다. 현실에서 적군의 신체를 맞출 때마다 점수가 올라가는 일 따위는 없을 테니까. 애초에 실탄과 포탄이 오가는 전장에서 냉정하게 적군을 겨냥할 정도의 이성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중대장은 한 가지를 빠뜨리고 말했다.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공포를 상상해 보라고 강조할수록, 내가 타인을 죽일 수도 있다는 공포는 인식에서 밀려난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 그러니까 참전 군인들이 호소하는 트라우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만이 아니라 곁의 전우의 죽음과 자신이 죽인 사람에 대한 죄책감도 뒤섞여 있기 마련이다.
제아무리 사람을 죽이도록 규율되고 훈련된 신체라 할지라도, 실제 사람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건 두려운 일이다. 가령 2024년 활동을 종료하면서 많은 한계를 남겼지만,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고백과 증언을 끌어내고자 했으며 당시 투입된 군경의 피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당시 투입된 계엄군 20,317명 중 2,857명(14.06%)을 대상으로 면담조사가 시도되었다.[1] 그 과정에서 계엄군 출신 일부는 공개적으로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조사를 거부한 경우도 많았지만, 조사에서 죄책감과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계엄군 출신도 적지 않았다.
왜 계엄군은 사람을 향해 잔인하게 곤봉을 휘두르고 총구를 겨눌 수 있었을까? 당시 군 지도부는 계엄군에게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하며 과잉진압을 지시했다. 현장 지휘관들도 그 지시를 따라 군인들에게 강경한 진압과 대응을 명령했다. ‘빨갱이’로 몰린 사람은 죽여도 되고 죽여야 하던 시절이었다. 1980년 2월부터 쉴 틈 없이 강도 높은 충정훈련을 감당했던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대에 대한 강한 불만과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그리하여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에게 광주시민들은 비인간화dehumanize 되었고, 인간이 되지 못한 ‘빨갱이’, ‘폭도’를 향해 휘둘러지는 폭력은 둔감화desensitize 되었다.
그럼에도 1980년 5월 광주에서 군인들은 때때로 망설였다. 어떤 군인들은 명령에도 불구하고 진압과 학살에 가능한 소극적으로 가담하고자 했다.[2] 반면에 2024년 12월 3일 국회로 출동한 계엄군은 시민들을 비인간화할 까닭이 없었다. 계엄군은 44년 전보다 더 크게 망설였다. 애초에 사람을 향해 함부로 총구를 들이대지 말라고 배우지 않았던가. 특전사 부대원들은 현장에 도착하니 민간인과 국회의원을 대상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에 대한 자세한 이유도 듣지 못했다. 1980년과 달리, 현장 지휘관마저 혼란과 당혹감을 느끼며 망설였다. 현장에 출동했던 김현태 제707특수임무단장은 기자회견에서 휴대전화로 지휘통제실의 지시가 계속되는 가운데 민간인과 대치했던 현장의 혼란을 증언했다. 국회에 출석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던 이상현 제1공수특전여단장은 “민간인 절대 충돌하지 말라, 다치게 하면 안 된다”고 지시했다고 말했다.[3]
보통 사회적 갈등이 대량학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상호보복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학살자와 피학살자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상호 간 폭력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학살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12월 3일 밤의 국회 일대에는 망설임이라는 정동적 순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계엄군은 상부의 지시에 따른 출동과 국회봉쇄가 과연 옳은 것인지, 시민들을 진압하다가 자칫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민간인들이 죽고 다치게 되는 것은 아닌지, 그 가해자가 자신이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과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이다.
군인의 신체는 명령에 복종하도록 규율된다. 특전사의 경우 특수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전문적인 훈련을 받으며 더 강도 높은 규율을 겪는다. 그럼에도 12월 3일 밤, 명령에 따르도록 프로그래밍 된 신체는 원활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망설임이라는 오류가 폭력으로 나아가는 신체를 정지시킨 것이다. 현장에서 오류를 해소하는 역할을 해야 할 현장 지휘관마저 망설임의 오류에 빠져 있었다.
군경과 대치하고 장갑차를 막아 선 시민들 역시 일이 잘못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하고자 담벼락을 넘어 어쩌면 사지가 될지도 모를 국회 본청으로 들어간 의원들도, 바리케이트를 쌓고 계엄군과 대치하며 목숨을 걸었던 보좌진들도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모두가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될 가능성,’ 즉 상호보복의 메커니즘이 작동할 가능성을 예감하면서 주저하고 망설였다. 철수하는 한 군인이 “죄송합니다” 사과하자 “감사합니다”로 한 유튜버가 답례했던 장면은 이를 예증하고 있다.[4]
검찰이 공개한 현장 지휘관들의 전화통화 녹취록에서 윤석열은 ‘문을 부수고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직접 지시했다.[5] 대통령과 군 지도부의 계속된 지시에도 불구하고 망설임의 순간은 늘어지고 지연되었다. 그 결과, 아찔하고 위험했던 계엄의 밤이 막을 내릴 수 있었다.

주저함과 망설임이 교차했던 12월 3일, 국회 앞 상황
망설임 다음에 오는 배신감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3일 뒤인 12월 7일,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본회의 통과를 요구하고자 모인 여의도의 무수한 인파 속에 군복을 입고 등장한 남성들이 있었다. 청년에서 노년에 걸친 여러 연령대의 남성들은 ‘해병대예비역연대’라는 이름으로 대통령 탄핵을 외쳤고,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며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6]
해병대예비역연대는 지난 2023년 7월 고 채수근 상병 순직 이후 결성되어 채 상병 순직의 진상규명과 박정훈 대령의 명예회복을 요구해 왔다. 이들은 채 상병과 박 대령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또는 책임감을 1년이 간직해 왔다. 진상규명을 방해하고 특검법마저 거부했던 정부에 대한 이들은 ‘배신감’을 토로했다. 2024년 10월 4일 채 상병 검법이 부결되자 이들은 “윤 대통령은 특검을 세 번째 거부했고 그 하수인 국민의힘은 또 다시 국민을 배신했다”고 비판했다.[7]
계엄의 밤 이후, 더 이상 배신감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계엄군이 되어 국회를 향해 출동했던 특전사 부대원들은 “국가에 배신감이 든다”고 했다.[8] 방첩사의 여러 간부 및 부대원들은 비상계엄과 친위쿠데타에 가담하기를 거부했으며, 계엄 이후 여인형 방첩사령관에 대한 배신감을 토로했다.[9] 비상계엄 당시 국회로 출동했던 경찰들 역시 “지휘부에 배신감을 느낀다”고 했다.[10] 그간 소음과 오물풍선으로 고통받았던 접경지역 주민들은 대통령을 외환죄로 고발하였고, 한 주민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낀다. 정권을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담보로 전쟁도 불사했다는 것 아니냐”고 했다.[11]
윤석열을 향한 배신감은 비단 계엄에 가까이 연루되었던 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윤석열의 친위쿠데타와 이후 정부 각료 및 여당을 향해 ‘배신’이라는 단어는 정치권과 언론, 집회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망설임’ 다음에 ‘배신감’이 온 것이다. 배신이라는 단어에 깃든 언어감각에는 사태가 일단락된 후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와 신념에 가해지는 반성적 회고가 깔려 있다. 당장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의 가장 기본적인 존재 이유가 부정되었고, 불가역적인 민주화를 이루었다는 사회적 상식 역시 뒤흔들렸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게 됐다.
배신감으로 표현되는 이 자각의 과정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세계를 다시 해석하도록 만든다. 해병대예비역연대는 지난 1월 24일 서울역 역사에서 설 귀성 인사에 나선 국민의힘 의원들에게 항의 행동을 했다. 그 가운데 한 회원은 권성동 원내대표를 향해 “내란 빨갱이”라고 소리쳤다.[12]
해병대 예비역이 보수세력과 대척점에 서는 것만큼이나 보수정당을 ‘빨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생경한 장면이다. 그 회원은 자신의 심경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신이 가진 언어 중 ‘빨갱이’를 골랐을 것이다. 배신당한 측은 세계를 정반대로 읽고 쓰기 시작한다.
채 상병 사건이 불러일으킨 배신감은 이윽고 해병대 예비역들로 하여금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행동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배신감은 문제를 제대로 시정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수 있다는 예감으로 사람들을 이끈다. 이미 모두가 목도한 것처럼, 비상계엄 이후에도 2차 계엄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았고, 윤석열 체포 및 구속 과정에서도 지도부의 위헌·위법적 명령과 병사 및 직원들의 ‘망설임’이라는 구도는 반복되었다. 시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이렇게 반복되고 있는 폭력의 가능성과 긴밀히 결착되어 있다. 배신감은 그렇게 시민들로 하여금 직접행동으로, 광장의 정치로 나아가도록 만든다.
항명하는 시민의 계보
망설임과 배신감은 12월 3일 비상계엄과 그 이후의 시국에서 폭력의 가능성에 저항하는 항명의 근거로 작용했다. 이는 민주화 이후 친위쿠데타라는 초유의 사태를 막은 놀라운 힘이었다. 동시에 망설임과 배신감은 항명의 긴 역사적 계보에서 드물지 않다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망설임과 배신감으로부터 항명의 행동으로 나아간 이들은 국가폭력에 의해 진압되고는 했다. 그럼에도 끝끝내 이어져 온 항명의 계보는 결국 12월 3일의 파국을 막아낼 수 있었다.
1948년 10월 19일, 신생국가 대한민국의 여수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출동명령을 거부하였다. 여순사건은 부당한 명령에 따를 수 없고 시민을 죽일 수 없다는 14연대 군인들의 ‘망설임’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윽고 이들은 ‘반란군’으로 몰렸다. 반란에 가담했다는 의심을 이유로, 여수와 순천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계엄이 발동되어 주민들을 향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반란’이라는 언어는 ‘빨갱이’처럼 부당한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항명은 사람을 죽일 수 없다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단순히 살인과 학살에 대한 소극적인 항명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는 것은, 바꿔 말해 죽을 운명에 처한 사람을 ‘살리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부당한 명령에 대한 항명은 그런 의미에서 살인이 아닌 ‘활인’하는 군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설적이지만 명백하게도, 12월 3일 군인들은 총을 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구하고 나라를 지켰다. 다행히도 망설였던 군인들은 더 이상 반란군으로 몰리지 않았다.
국가폭력에 의한 시민의 부당한 죽음과 그에 대한 ‘배신감’에서 시작된 저항은 민주화 운동 내내 이어졌다. 1980년 5월 18일부터 광주에서 시민들을 향해 전방위적으로 자행된 폭력은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대한 뚜렷한 배신감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배신하는 측의 언어, 지배자의 언어로 말한다면 시민들의 항명은 계엄 포고령 위반이었다. 그러나 광주시민은 자신들이 폭도가 아니라는 ‘진실’을 알리고자 했다. ‘국가가 배신자’라는 ‘진실’의 확산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졌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사건이 이어지면서 배신감과 진실은 더 이상 광주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망설임과 배신감이 항명과 민주화, 그리고 12월 3일 계엄의 밤을 설명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을까? 분명 망설임과 배신감을 부정적인 어감을 갖는 단어이다. 하지만 5월 광주에서처럼 애초에 항명이야말로 금지되고 부정된 것이 아니었던가.
2025년 1월 12일,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고공농성 중인 한국옵티칼하이테크 해고노동자들과 연대하는 1박2일 희망텐트 문화제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사람은 굴복하지 않았던 단 하루의 기억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2월 3일 이후, 항명은 이제 새로운 의미로 쓰여져야 한다. 항명은 새로운 세계관을, 그 세계관을 형성하고 구축해나갈 새로운 인간을 탄생시킨다. 항명하는 존재들은 세계를 다르게 읽고 써나가기 시작했다. 아주 보수적인 집단으로 여겨지는 해병대 예비역들이 국민의힘을 향해 ‘빨갱이’라고 말한다. 남태령에서 이어지고 드러난, 농민과 여성과 퀴어의 존재는 기존에 주변화되고 억압되었던 항쟁하던 존재들을 가시화하고 연결시키고 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항명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 다른 사회를 만들어 간다.
각주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백서』, 2024, 212쪽.
- 곽송연, 2023, 『오월의 정치사회학』, 오월의봄, 41쪽.
- “”실탄은 지휘 차량에 실어만 놓고 지급 안 해” … 대원들에겐 공포탄도 챙기지 말라고 지시”, JTBC, 2024.12.6.
- “부상 우려 시민 감싸 안고… 철수하며 사과한 계엄군”, SBS, 2024.12.5.
- “”총을 쏴서라도 끌어내라” … 윤석열 ‘발포 명령’”, MBC, 2024.12.27.
- “’탄핵’ 표결을 기다리며… ‘임을 위한 행진곡’ 부르는 해병대, 장갑 끼고 과제 하는 학생”, 경향신문, 2024.12.7.
- “채상병 특검법 세번째 폐기… 해병대 예비역연대 “국민 배신했다””, 동아일보, 2024.10.4.
- “대북 작전으로 알고 나섰는데… 내려보니 국회였다”, 조선일보, 2024.12.6.
- “방첩사 관계자 “여인형에 부하들 극도의 배신감 … ‘정치인 체포조’도 지시 불이행””, KBS, 2024.12.9.
- “국회출동 경찰 기동대 “‘시민 점령 막아라’ 지시 받았다””, TV조선, 2024.12.10.
- “’대통령 외환죄 고발’ 접경지 주민들… “엄청난 배신감””, 경향신문, 2025.1.19.
- “서울역에 설 명절 인사 왔다가 “내란 빨갱이” 항의 들은 국민의힘”, 경향신문, 2025.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