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석(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전쟁없는세상: 비상계엄이 선포한 지 두 달 보름이 지나갑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탄핵 심판을 받고 있습니다. 윤석열 탄핵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지만,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계엄과 쿠데타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대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계엄에 대해서도 이미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주로 그날의 정황 및 사실 관계를 파악하기 위한 내용입니다. 전쟁없는세상은 계엄, 쿠데타와 관련해서 반군사주의 맥락에서 우리가 이 일을 어떻게 기록하고 기억하고 저항해야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런 고민을 담은 글 다섯 편을 기획했습니다. 함께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행동하기 위한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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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스터즈-거친 녀석들’에서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히틀러를 프랑스의 한 극장에서 그야말로 폭사시켜 버린다. 웹툰계의 시조새 격인 강풀 작가의 ‘26년’은 전두환 암살을 다룬다. 열린 결말로 끝나지만 강풀 작가는 독자들이 바라는 결말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고 있다고 느껴진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창작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고난 이야기꾼들은 실제 역사에서는 실패했지만 대중이 바랐던 것을 상상 속에서 이룩해낸다.

만약 12월 3일 밤 국회가 계엄 해제를 하지 못했다면, 2025년 한국 사회는 어땠을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과거의 계엄처럼 혹은 수사를 통해 드러나는 정황처럼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 판사까지 잡혀가서 B1 벙커에 수감되고, 국회는 해산되고, 전공의는 처단(대체 처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되었을까? 그랬다면 독재가 시작되고 세월이 한참 지난 어느 시점에서 타란티노나 강풀 같은 이야기꾼들이 2024년 12월 3일 밤을 조금 다른 상상력으로 채웠을까? 예를 들면 계엄 선포를 들은 시민들이 여의도로 모이고, 국회의원들의 국회 출입을 막아서려는 경찰을 시민들이 막아서고, 국회의원들이 담을 국회 담장을 넘어 본회의장으로 들어가 계엄을 해제시킨다는 이야기를,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을 상상으로 창조해 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야기꾼들의 상상력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계엄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윤석열과 그 일당들이 일으킨 친위쿠데타가 당초 자신들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한들 이는 실패가 유예된 것일 뿐이지 결코 성공이 아니었을 것이다. 군인이 정치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폭력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기본 감각을 가진 한국의 시민들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민의 협조 없이 권력은 작동하지 못한다. 아무리 막강한 독재 권력이라도 그 권력의 원천은 시민에게서 나온다. 만약 시민들이 독재 권력의 정책과 행정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무시무시한 공권력의 폭력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더 나아가 독재 권력에 저항을 한다면 그 권력은 유지될 수 없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덴마크의 시민들은 나치 점령에 맞서 불복종, 비협조 저항을 이어갔다. 덴마크의 공무원들은 나치 행정의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거나 태업을 일삼았다. 나치는 덴마크를 손쉽게 군사 점령했지만 수월하게 통치할 순 없었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들이 살아남은 곳이 덴마크라는 사실이 나치의 통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들은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저항의 싹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해 한편으로는 무지막지한 권력 수단으로 시민들을 겁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회유책, 이른바 당근을 제시한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노동조합을 혐오하던 히틀러가 전쟁이 길어지면서 법인세를 대폭 인상하거나, 같은 시기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1938년 후생성을 창립하고 1944년 일본인들을 국민건강보험 조합에 가입시킨 것처럼 말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시민들이 가진 큰 힘에 대해 알 수 있다. 정부에 협조하거나 최소한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등 관심 두지 않았던 시민들이 자신의 지지 또는 협조를 철회해 버린다면 정부는 부당한 권력 행사를 할 수 없게 된다. 인종차별에 맞서 싸운 1950년대~1960년대 미국의 흑인 민권 운동, 영국 제국주의 식민 지배에 맞선 간디의 비폭력 저항 등 다양한 역사적 사례들이 시민들의 힘-협조하지 않고, 동참하지 않고, 협력하지 않고, 더 나아가 복종하지 않고, 항의하며, 저항하는 힘의 위력을 보여준다. 실제로 2024년 12월 3일 계엄을 막은 것은 바로 이러한 시민들의 불복종, 비협조였다.

 

 

국회 탄핵 소추를 촉구하던 여의도 국회 앞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는 이후 광화문으로 옮겨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외치고 있다.

국회 탄핵 소추를 촉구하던 여의도 국회 앞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는 이후 광화문으로 옮겨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외치고 있다.

 

시민 저항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대규모 시위다. 수십만, 수백만의 군중이 광장에 모여 한목소리로 사회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 풍경. 멀게는 3.1 만세운동부터 4.19와 1987년 6월항쟁을 거쳐, 최근 박근혜 탄핵 집회까지 한국 사회는 대규모 시위의 역사를 빼고는 현대사를 기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이런 대규모 시위에서는 다양성과 숫자가 무기다. 더 넓게 연대하기 위해서 낮은 단계에서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주장(예: 박근혜를 대통령 탄핵)을 넘어서는 첨예한 사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는 점이 한계이지만, 더 많은 사람들 더 다양한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적인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을 발휘한다. 이번 계엄 사태와 탄핵 국면에서 국회 표결을 앞두고 여의도에 모였던 시민들, 이후 남태령과 한남동에서 밤을 새운 시민들,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경복궁 앞 대규모 탄핵 집회가 보여준 힘이 경찰과 검찰, 공수처가 저들을 체포하고, 구속하고, 수사에 나설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이러한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는 것 자체도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민주주의가 정착된 국가의 경우는 대규모 시위에서 모두가 비교적 안전하게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편이다. 반면 좀 더 위험을 감수하며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시민들도 있다. 12월 3일 밤 여의도로 달려간 시민들이 좋은 예다. 이런 행동은 때로는 불법이기도 하고 그에 따라 처벌받을 수도 있어서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는 어렵지만 더 다급하고 시급한 상황에서는 필요한 힘을 제때 발휘할 수 있다. 국회 앞에서 몸을 던져 군용차량을 막아서고, 국회의원들의 월담을 도운 시민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쩌면 더 많은 희생을 치른 뒤에야 계엄을 막을 수 있게 되었을지 모른다. 12월 3일 다급했던 그날 밤, 국회가 계엄 해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국회 앞에 모여 상황에 직접 개입해 행동했던 시민들의 저항 덕분이다.

 

관저앞

1월 4일 관저 앞 시위 때 시민들이 버스에 자신의 주장을 가득 붙였다.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저항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보통의 경우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대규모 시위나 직접행동의 경우 조직된 집단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조직되지 않은 개인들도 불복종, 비협조, 태업 등을 비롯한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저항할 수 있다. 이번 12월 3일 계엄 국면에서도 이러한 방식의 저항이 드러났다. 선관위원회에 출동한 계엄군들이 일부러 주변을 산책한다든지 편의점에서 간식을 사 먹는 식으로 일종의 태업을 했다. 선관위 서버 압수를 반대한 윤비나 방첩사 법무실장의 행동은 태업보다는 불복종이나 비협조에 가까운 저항이었다. 언론에 알려진, 또는 알려지지 않은 이러한 개인들의 양심에 따른 저항은 윤석열 일당의 계엄 시도를 막아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는데, 우리는 이를 시민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시민사회의 성장과 함께 뿌리내린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가 시민들 개개인의 양심 형성에 영향을 끼쳤고, 이러한 양심을 바탕으로 권력의 의도와 어긋나는 저항을 했기 때문이다.

시민 저항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비폭력 직접행동의 효과를 연구한 에리카 체노웨스에 따르면 비폭력 시민 저항은 다양한 전술 및 방법이 공존할 때 목표를 달성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한다. 이번 계엄 시도 국면에서도 다양한 방식의 시민 저항들-대규모 집회에 참석해 민주주의 회복의 열망을 보여준 시민들, 계엄 상황에 직접 개입해 군용차량을 막아선 시민들, 각자의 자리에서 계엄에 협조하지 않고 명령에 복종하지 않은 군인과 경찰 등 제복 입은 시민들의 저항이 다양하게 펼쳐지면서 윤석열 정부의 친위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계엄은 막았지만 윤석열과 극우세력, 그리고 국민의힘은 여전히 계엄 사태를 이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이러한 시도들이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인다. 윤석열이 다시 돌아와서 2차 계엄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 연성화된 방식으로, 사회의 극단적 갈등을 유발하면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이들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걱정과 근심으로 2025년을 시작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근본적이고 강력한 힘은 시민의 저항이라는 것이다. 마치 12월 3일 계엄 시도를 막아낸 것처럼, 국회가 탄핵 소추안을 가결시킬 수밖에 없게 압박한 것처럼, 시민들의 다양한 저항만이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확장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힘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저항을 어떻게 즐겁게, 얼마나 창의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