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경(〈드라마의 말들〉저자)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도 언젠가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파괴된 건물은 다시 세워질 것이고, 전쟁의 파편 틈 사이로 살고자 하는 열망들이 빼곡하게 메워질 것이다. 모든 것이 전쟁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 복원은 될 것이다. 그 ‘언젠가’는 언제일까? 어느 한 편이 항복을 선언한 직후? 협정 문서에 서명하고 종료 선언을 한 순간? 사실 전쟁이 무서운 이유는 그 ‘언젠가’가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끝난 것 같은 전쟁이 저마다의 의식 속에, 삶 속에, 사회 체제 속에서 끊임없이 부활하는 걸 보면, 한 번 시작한 전쟁은 영영 끝나지 않는 걸까 생각하게 된다. 최근 이런 생각을 하게 한 사건(?)이 있었다.

2022년 드라마 <작은 아씨들>(tvN)을 둘러싼 논란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한창 방영 중이던 때 베트남 넷플릭스에서 이 드라마가 퇴출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극 중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자 비밀 조직 ‘정란회’를 만든 원기선 장군이 전쟁 중 무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된 대목과 그가 “제일 잘 싸운 전투에서 한국 군인은 1인당 베트콩 20명을 죽였다”며 “한국 군인은 베트남전 영웅이다”라고 회고한 대사를 문제 삼은 것이다. 아직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베트남 입장에서는 문제적으로 여겨질 장면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베트남 전쟁에 침략국을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아 국가 성장의 동력으로 삼았던 우리나라도 베트남 입장에서 보자면 ‘가해자의 나라’이니 그런 설정은 무리수였다고 볼 수 있다. 대중문화가 이런 가까운 과거의 역사를 다루거나, 어떤 집단을 묘사할 때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면에서 고민거리를 주었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을 보며 베트남 전쟁이 끝난 지 한 세대가 지났음에도 이 전쟁은 여전히 ‘과거’가 되지 못했구나 체감했다. 어디 베트남 전쟁뿐일까? ‘한국 전쟁’도 70년이 넘은 지금도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걸 생각하면 그런 반발은 당연한 것도 같다. 설령 그 말이 군사주의로 대표되는 인물이 자신의 행위를 미화하는, 폭력적 언사로 해석될 여지를 주어 전쟁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도 말이다.

 

https://tvn.cjenm.com/ko/littlewomen

드라마 <작은아씨들>의 등장인물들. 사진 출처: 작은아씨들 공식 홈페이지 https://tvn.cjenm.com/ko/littlewomen

 

유령으로 남은 전쟁

그런 논란과 별개로 <작은 아씨들>은 여러모로 특이한 드라마다. “가난하지만 우애 있게 자란 세 자매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부유하고 유력한 가문에 각자의 방식으로 맞서는 이야기”로 소개되었지만,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푸른 난초인가?” 싶을 정도로 푸른 난초가 의미 있게 자주 등장한다. 극 중 푸른 난초는 “베트남의 유령”이라고 불리며 “베트남 전쟁 중 미군에 의해 미국에 들어온 것”이라고 소개된다. 푸른 난초는 희귀종으로서 환각 기능을 가지고 있어 유령을 볼 수 있거나 죽음에 이르게 한다고 한다.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푸른 난초 나무가 있는 ‘원령가’는 모든 비극이 일어나는 곳이다. 드라마는 베트남에 참전했던 이들로 구성된 ‘정란회’를 통해 ‘베트남 전쟁’으로 대표된 전쟁과 국가주의가 한국 사회를 어떻게 지배하고 있었는지 사유한다.

아무런 정당성이 없는 불의한 전쟁에 투입된 하층민들이 국가에 의해 버려진 상태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푸른 난초’ 때문이었다. 그것에 취한 힘으로 그들은 살아 돌아왔고, 부동산을 중심으로 악착같이 부를 축적하였고,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지키기 위해 교육과 정치를 활용하여 사회 곳곳을 지배하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공고히 했다. 전쟁의 생존자들은 전쟁의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존재한다. 드라마는 이 전쟁에서 비롯된 세계관을 가진 이들을 살았으나 죽은 ‘유령(원령)’으로 은유함과 동시에 호흡기에 의존한 채 목숨만 부지한 원기선 장군을 통해 ‘이미 죽었으나 아직 죽지 못한 상태’인 군사주의와 가부장 체계를 비판한다. 그러니까 이 큰 이야기는 결국 사실은 이미 죽어버린 폭력적인 체계와 어떻게 맞서고 탈출하는가의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상태인 유령이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전쟁’ 혹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의 상처와 기억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을 떠도는 유령을 죽여야 전쟁이 온전히 끝날까?

 

산 자들의 몫으로서의 전쟁

수많은 희생자를 낳아 현대사에서 최악의 전쟁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베트남 전쟁을 ‘유령’이라는 매개로 분석한 책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권헌익, 산지니)이 주목한 유령은 조금 다르다. 베트남인들은 자신의 주변에 베트남 전쟁(베트남인들은 ‘미국 전쟁’이라 부른다고 한다)으로 인해 “폭력적이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유령들이 넘쳐난다”고 믿는다고 한다. 그들에게 전쟁으로 인한 죽음이란 단지 친족 체계 혹은 ‘아군’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무차별적 학살이 길게 이어져 ‘객사’한 사람들이 많아 피아를 구분하지 못한 ‘무명’의 죽음도 함께 경험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베트남인들에게 유령을 감각하며 전쟁을 기억하는 일이란 “역사의 상처와 고통을 넘어 인류의 연대라는 윤리적 지평을 지향하는 창조적인 문화적 실천”이기도 하다. 그러니 ‘유령’이라는 존재를 가해자의 입장에 선 승리주의적 세계관을 대변하고,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는 악하고 무력한 체제를 은유한 한국 드라마가 베트남인들에게는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고, 전쟁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무책임한 말일지 모르나)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우리의 일상과 사회에 단단히 뿌리박은 ‘정란회’와 같은 체제를 정확하게 직면하는 일과 전쟁으로 사라져 간 모든 것들을 질기게 기억하는 일을 성실하게 할 수밖에 없다. “전쟁은 산 자들의 일”이기 때문이다.

 

 

전쟁없는세상에서 기회를 준 덕분에 여섯 편의 드라마를 통해 전쟁에 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전쟁은 나와 먼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짧고 얕은 글에서 ‘전쟁’이라는 광범위한 비극을 감히 다 살펴볼 수는 없었지만, 글을 쓰면서 전쟁이란 먼 나라에서 일어났다 끝나는 유한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일상과 사회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비극이라는 걸 어렴풋하게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있는 자로서 전쟁에 대항하여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앞으로 풀어야 할 나의 숙제다. 이 숙제를 함께 풀자고 감히 초청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