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열쭝, 인터뷰이: 오리(최정민)

 

전쟁없는세상은 운영위원회를 두고 단체의 운영과 사업, 활동에 대한 중요한 사항을 의논하고 결정합니다.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은 모두 8명으로 제각각 멋진 매력을 뽐내는 평화활동가들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빛나는 전쟁없는세상의 평화활동가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역시나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을 역임했던 열쭝이 인터뷰어로 나서 8명의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두 차례에 나눠서 발행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는 오리, 우공, 쭈야, 쥬의 인터뷰입니다.

 

[평화를 만나다] 군대 안 가서 (가까스로) 사람 된 우공
[평화를 만나다] 예술과 활동의 교차점에 서 있는 ‘딴따라 활동가’ 쭈야
[평화를 만나다] 전쟁게임 만드는 평화주의자 ‘평화운동의 챗쥬피티’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한 오리는 전쟁없는세상 사무국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데모를 더 잘할 수 있을까, 액션을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을까, 직접행동을 더 창의적으로 할 수 있을까 불철주야 고민하는 오리의 꿈은 연금받으면서 데모하는 할머니 활동가가 되는 것입니다.

 

오리는 어떻게 평화운동을 시작했나요?

저희 가족이 다 전라도 출신이에요. 막냇삼촌은 학생운동 하던 중에 군대에 가서 갑자기 죽었고, 엄마의 삼촌뻘 되는 분이 실종됐는데 알고 보니 납치되어 북파공작원이 됐다가 북한에서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야 사망통지서를 받았대요. 집안에 그런 사건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부모님이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비디오를 몰래 보여주시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다 보니 대학에서 학생운동 하는 게 자연스러웠죠. 그때가 1990년대 초였는데 소련이 붕괴하면서 노동 중심이던 운동이 여성·환경·문화 등의 의제를 받아들이고 분화하는 상황이었어요. 제가 있던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뤘고, 뜻 맞는 사람들이 사회에 나와서 ‘평화인권연대’라는 단체를 만들었어요. 거기에 저도 함께 한 거죠.

 

전없세와는 어떻게 만난 거예요?

2000년에 평화인권연대에서 병역거부운동을 시작했고요. 2002년부터 실제 병역거부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양심을 나누는 사람들’이라는 병역거부자 자조모임이 만들어졌어요. 초기의 병역거부운동은 반군사주의보다는 ‘양심 때문에 감옥에 갇혀야 하는 개인의 인권’을 강조하는 방식이었는데, 더 본질적으로 병역거부의 이유인 ‘평화’에 초점을 맞추고 싶었던 사람들이 그 자조모임을 기반으로 전없세를 만들었고요. 그 때 제가 한 일은… 뭐, 자조모임에 참여하고 옆에서 박수 쳐주고 그랬죠. 직책을 맡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평화인권연대와 전없세가 사무실을 같이 썼는데, 이사 가면 전없세도 데려가고. 자매단체처럼 생각하긴 했죠.

 

오리는

오리는 한국 병역거부운동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신윤동욱 기자는 오리를 가리켜 “병역거부운동의 기획자이자 조정자이자 실행자”라며 “한국 병역거부운동에서 가장 먼저 언급돼야 할 사람”이라고 칭했다. 사진은 2004년 어느 집회에서 병역거부 관련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는 모습.

 

이후에 평화인권연대가 해산하고 저는 유학을 갔다가 2012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전없세에서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는 전없세가 제대로 급여를 주면서 사람을 채용하던 시절이 아니라서 별도의 채용 절차가 있었던 건 아니었고요. 전없세 활동가와 교류하다가 그냥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사무실에 책상이 3개 있었는데 저한테 하나를 주더라고요. 그렇다고 매일 상근한 건 아니고, 다른 단체 활동도 병행했어요. 그 단체에서 받는 급여로 생활비를 쓰고요.

 

어이쿠, 그래도 그동안 전없세의 활동가 처우가 그동안 많이 달라졌죠?

2012년에 사무국 활동가 2명에게 들어간 인건비가 합쳐서 월 100만 원이었어요. 급여라기보다 활동비의 개념이었죠. 그러다가 2015년에는 활동가 3인에게 각 70만 원씩을 줬고요. 지금은 많이 늘었어요.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지만요. 자녀가 있거나 월세를 내야 하는 분이라면 전없세 상근 활동이 어려울 수 있어요. 다행히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집에서 사는 데다가 돈 쓸 일도 별로 없고요. 다른 직업을 갖고 좀 더 돈을 많이 벌면 더 행복할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월급을 조금 받고 눈치 보면서 엄마 집에서 살더라도 활동을 하는 삶이 저에겐 더 나은 거죠.

 

몇 년 전에 오리에게 자가면역질환이 생겼잖아요. 요즘은 좀 어떠세요?

피부근육염이라고, 면역체계가 피부나 근육조직을 공격하는 거예요. 급성기 때는 다리 근육이 약해져서 침대에서 혼자 일어나지 못했는데, 지금은 많이 좋아졌어요.

 

혹시 그런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활동에 나 자신을 너무 갈아 넣어서 병이 생긴 것 아닌가’ 하는.

네. 그런 부분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병을 진단한) 의사 선생님이 “활동을 좀 줄여야 할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단체 활동이라는 게 업무량 자체도 많지만, 24시간 각성한 상태로 지내는 측면이 있어요.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요. 그런데 ‘활동 때문에 병이 왔다’는 생각은 안 하려고 해요. 원인도 정확히 모르는 병인데, 원망은 해봐야 뭐 하겠어요?

이 병은 꾸준히 관리를 해야 하는데요. 나이 들어서 걸린 게 다행이에요. 젊어서는 조신하게 살기 어려운데, 저는 이미 막 살아봤으니까. (웃음) 올해가 발병 6년 차인데 의외로 장점이 있더라고요. 술을 아예 안 마시니까 두통이 사라지고, 정해진 시간에 약을 먹느라 일찍 일어나니까 하루도 길어지고. 물론 활동에는 제약이 생기죠. 근육이 손실돼 탱크 위에는 못 올라가고, 자외선이 병에 안 좋으니까 땡볕에서 데모를 잘 못 하고. 그런데 활동을 그만두진 못하겠어요. 활동하지 않고 사는 거는…. 그렇다고 무리할 수는 없으니까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긴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운동을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었어요?

그 정도는 아니고 힘들 때는 있어요. 문제는 보통 사람과의 관계죠. 그럴 때는 주말 내내 집에 짱박혀서 아무것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그러면 좀 회복이 돼요. 음… 앞으로도 저는 평화운동을 평생 안 떠날 것 같아요. 대신 활동의 지평을 더 넓히고 싶어요. 지금 제가 맡은 활동 분야도 ‘군사주의와 기후위기’예요. 과학적 지식이 필요해서 어렵긴 한데, 이런 식으로 평화운동의 반경을 넓히고 다른 이슈들과 교차하는 거죠.

 

2010년에 영국에 유학을 가서 사회운동 전략에 대해 공부하고 오셨죠. 이것도 지평을 넓히는 과정이었을까요?

그때는 제가 병역거부운동을 10년을 넘게 해서 맨날 똑같은 얘기하고 똑같은 글 쓰는 것이 너무 지겨웠어요. 마침 노무현정부가 대체복무제를 도입한다고 해서, ‘한국을 떠나도 된다’는 신의 계시라고 생각했어요. (웃음) 그리고 제가 1990년대 후반부터 효과적인 사회운동 전략과 캠페인을 고민하는 비폭력 트레이닝에 참여했거든요. 외국에서 하는 프로그램인데, 그때는 영어를 잘 못해서 다 이해하진 못했죠. 그래서 사회운동 전략이나 시민불복종에 대해서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 보고 싶었어요. 한국 사회운동에서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오리의 관심사는

오리의 관심사는 ‘액션’이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민주적으로 직접행동을 잘 해서 사회변화의 가능성을 높일지 불철주야 고민하는 오리에게 최근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데모핑’. 2021년 무기박람회 아덱스 행사장에서 탱크 위에서 기습 액션을 하는 오리(우)와 참여연대 이영아 활동가(좌).

 

비폭력은 전없세에서 굉장히 중요한 운동 방향인데요. 최근 몇 년간 관련해서 굵직한 논쟁들이 있었죠. 전쟁 반대에 대한 뜻은 같더라도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할 것인가’,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어떻게 볼 것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단체마다 입장이 좀 달라요.

전없세는 어떤 식으로든 무력 충돌을 찬성하지 않아요. 피해를 입은 주민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무력으로 러시아나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니까요. 그보다는 이스라엘의 병역거부자를 지원함으로써 팔레스타인을 돕는 게 전없세의 포지션이죠. 이 때문에 때로는 다른 단체들에게 오해를 사거나 공격을 받기도 해요. 답답하긴 한데, 이런 입장 차이가 잘 좁혀지지 않고 평행선을 달리는 경우를 많이 봐와서… 서로 할 일을 하면 되는 것 같아요.

 

오리는 전없세 사무국에서 최고참 활동가잖아요. 운영위원 중에서도 그렇고요. 그런 오리도 새내기 활동가이던 시절에는 시행착오가 많았겠죠?

너무 많아서 뭘 얘기해야 할지. (웃음) 그 땐 경험 부족에서 오는 좌충우돌과 자기복제가 많았어요. 여기에서 했던 말을 저기에서 또 하고, 내가 쓴 글을 복붙해서 쓰고 또 쓰고. 밑천이 많지 않으니까요. 지금 보면 그게 가장 ‘이불킥 모먼트’예요. 그리고 당시에 여자라고 배제된 다양한 사례가 있었는데, 적극적으로 목소리 내지 못한 것도 아쉬워요. 그때는 너무 위축이 돼 가지고.

 

전없세가 평등한 조직이긴 하지만, 나이나 연차에 따른 부담감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현실에서 나이 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공간은 없으니까요. 최연소 운영위원인 뭉치랑 저랑 나이 차가 20살이 넘는데요. ‘뭉치보다 나이가 적은 분들이 전없세에서 활동하려면 나는 사무국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나이 적은 사람의 패기와 나이 많은 사람의 노련함이 조직에 함께 갖춰지면 제일 좋죠. 제가 만일 60살까지 전없세에 있고 20대 활동가도 들어왔는데 대화와 토론을 잘하면… 어우, 상상만 해도 막 즐겁네요.

 

다양한 오리의 모습

데모에 진심인 오리는 조그만 단체 활동가들이 그렇듯 다양한 역할을 소화한다. 좌측부터 2023년 아덱스 VIP 환영만찬장 앞 액션 사진, 직접행동기금 모금 당시 찍은 머그샵 컨셉 사진, 2024년 태국 병역거부자 네티윗을 위한 팝업스토어 행사 때 비건 사모사를 튀기는 사진.

 

그런 연차와 경력에도 불구하고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겠죠? 앞으로 해보고 싶은 일이 있어요?

글도 쓰고 번역도 하면서, 전문적 액션팀을 꾸리고 이런저런 주제로 데모하면서 살 것 같아요. 노년연금 받으면서요. 제가 그릴 수 있는 미래는 그런 거예요. 안되면 말고요.

 

마지막으로, 전없세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전없세 활동은 전없세를 후원하는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활동이란 걸 꼭 알아주시면 좋겠어요. 사회운동이라는 게 때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잖아요. 조급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나무보다 숲을 보는 심정으로 함께 꾸려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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