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어: 열쭝, 인터뷰이: 안악희
전쟁없는세상은 운영위원회를 두고 단체의 운영과 사업, 활동에 대한 중요한 사항을 의논하고 결정합니다.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은 모두 8명으로 제각각 멋진 매력을 뽐내는 평화활동가들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빛나는 전쟁없는세상의 평화활동가들을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역시나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을 역임했던 열쭝이 인터뷰어로 나서 8명의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을 인터뷰했습니다. 이 인터뷰는 두 차례에 나눠서 발행합니다. 두 번째는 악희, 뭉치, 가람, 용석의 인터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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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공연장에서 멋진 레게음악을 연주하는 밴드에서 당신은 아마도 안악희를 봤을 것입니다.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 안악희는 레게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전쟁없는세상 운영위원입니다. 전없세가 너무 운동권이어서 합류 제안을 거절했던 안악희가 이제는 운영위원을 하는 까닭, 궁금하지 않으세요?
‘안악희’라는 이름은 ‘아나키스트’라는 뜻이지요? 동시에 ‘음악을 즐긴다’는 뜻 같기도 하고요.
예. ‘아나키’를 음차하듯이 쓴 게 시초예요. 그게 스무 살 무렵이었나? 그땐 무정부주의자였죠. 지금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사회운동 경험이 없었고 본명으로 활동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어요. 그런데 딱히 음악과 연결한 건 아니에요. 나중에야 ‘그런 뜻도 말이 되겠는데’ 싶었어요.
사회운동 경험이 없었다면서 어떻게 무정부주의자가 되고 평화운동을 만난 거예요?
그런 건 있었죠. 어릴 때부터 사회에 불만이 많았고 학교도 마음에 안 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영문판으로 ‘공산당선언’을 읽었어요. 그래서 대학에서 학생운동 하는 선배들과 말이 안 통했어요. (책에서 읽은 내용과) 맞는 소리를 하는 선배가 없더라고요. (웃음)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오만하고 건방졌던 것 같아요.
무정부주의자가 된 거는… 1990년대에 사람들이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무정부주의를 고민하면서 관련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요. 그런 책을 많이 읽어보고 저는 ‘이쪽인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방향이 훌륭하잖아요. 개인의 자발성에 의거한 세상을 만들자는 거니까. 지금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닙니다. 무정부주의 노선에 상당부분 동의하지 않아요.
당시에도 무정부주의 활동에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관련 웹사이트도 찾아보고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도 했죠. 그러다가 어떤 블로그 글을 읽었는데 “남한 사람들은 징병노예고 한국은 거대한 노예국가”라는 거예요. 일본에서 무정부주의 활동을 하는 유학생이 쓴 글이었어요. 관심이 생겨서 그 사람에게 연락하고 같이 어울리게 됐죠. 2010년부터 일본을 드나들면서 징병제 관련 토크 행사에 패널로 참여하기도 했고요. 그렇게 징병제 폐지 운동을 시작했어요.

2017년 전없세 총회에서 안악희. 당시 박근혜 전 태동령의 탄핵을 반대하는 시위대가 나눠 준 “계엄령이 답”이라는 손피켓을 수정해서 만든 “게임이 답” 손피켓. 이때만 해도 안악희는 전없세가 너무 운동권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스스로 운동권이 되었다.
그리고는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의 서울 지부장이 된 거죠.
‘지부장’이라는 직함은 서울에 (활동할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그런 거고, 거창한 조직은 아니에요. 제 활동이 본격화된 계기는 2014년에 있었던 이예다 씨 기자회견이에요. 이예다 씨는 2013년에 병역거부를 이유로 프랑스 난민 지위를 획득했고 2014년에 일본을 방문해 기자회견을 했어요. 저도 그 자리에 함께했고요. 그런데 기자회견장에 한국 기자가 하나도 안 오고 기사도 전혀 안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렸는데, 이게 포털사이트에 뜨면서 한국에서 이슈가 일파만파 퍼진 거죠. 그러다 보니 제가 뽕에 차 있었어요. 상황이 사람을 만든다고 해야 할까. 대뜸 “내가 한국 지부장을 맡고 국내에서 활동하겠다”고 나선 거예요.
그런데 징병제 폐지 운동을 한 것은 개인적 경험도 작용한 것 같아요. 저는 전없세의 여러 활동가들과 다르게 군필자잖아요. 제대하면서 ‘이런 걸 계속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징병제를 지속하지 않으려면 누군가 활동을 해야겠다 싶었죠.
그러고 보니 악희는 전없세에서 보기 드문 군필자네요. 그로 인해 악희만의 관점이나 통찰이 나오기도 하나요?
평화운동에서 군필자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웃음) 군필자라고 해서 전문적 군사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군대가 얼마나 폭력적 구조인지는 굳이 가보지 않아도 다들 알고요. 한국 전체가 병영국가 같은 곳이라서, 어차피 다 아는 억압이고 다 아는 부조리예요.
전없세는 징병제 폐지운동을 하면서 만난 거죠?
오래전부터 건너건너 알긴 했지만 그땐 제가 사회운동과 거리를 둘 때였고요. 징병제 폐지운동을 하면서 전없세를 만나러 갔어요. 그런데 그땐 ‘이 사람들은 나랑 좀 다르구나’ 싶었어요. 많이 생소하게 느꼈고, 같이 뭘 할 것 같진 않았어요. 전없세도 ‘쟤는 뭐야?’ 싶었을 거예요. (웃음) 그땐 스스로 활동가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개인으로 존재하겠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는데, 그런 저에게 전없세는 너무 운동권이었거든요.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도 그렇고, 집회에 다 같이 간다거나 하는 활동 방식도 그렇고요.

2018년 평화캠프 때의 안악희. 전쟁없는세상에서 연말시상식을 한다면 ‘베스트 헤어상’ 수상은 안악희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전없세 운영위원이잖아요.
그동안 오만함이 줄었다고 해야 하나. (웃음) ‘사회를 바꾸려면 조직된 행동으로 여러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기존 활동에서 한계를 느낀 것도 커요. 아무리 뛰어다녀도 혼자 해서는 지속성이 없겠더라고요.
또 저는 징병제 폐지운동을 하다가 평화운동으로 영역이 확장되었어요. (군사주의적인) 한국 사회가 정말 바뀌려면 징병제 하나만 없애선 안 되겠다 싶은 거죠. 오히려 징병제를 없앤 다음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도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게 능사가 아니잖아요. 제도가 없어진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고민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평화주의자가 된 거예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한국의 평화단체 중에서도 전없세밖에 없었어요.
처음엔 전없세 병역거부팀 합류를 제안받고 고사했다면서요.
2017년 즈음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확신이 없었어요. ‘내가 여기 들어가서 활동해도 되나? 괜히 사고만 치는 거 아닌가’ 싶었죠. 그런데 그러고 나서 계속 전없세 사무실을 오가면서 교류하고 함께 활동했거든요. ‘어차피 이럴 거면 전없세에서 활동해도 되지 않나’ 싶어서 몇 달 뒤에 제가 넌지시 “같이 해도 되겠냐”고 물어봤어요. 전없세는 좋아했죠.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운동이 더 나아질 수 있으니까.
그러다 나중에 전없세가 운영위원을 충원하게 되면서 저에게 제안을 했는데, 그땐 흔쾌히 하겠다고 했어요. 운영위원이 되면 병역거부팀 활동만 할 때보다 더 많은 걸 경험하고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실제로 운영위원 활동을 해보니 어때요? 혹시 지금도 운동권의 문화나 방법이 낯설거나 부담스럽진 않나요?
시민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더 알게 된 게 큰 즐거움이에요. 전없세에서 배운 게 정말 많아요. 어떻게 문제를 공공의 관심사로 만들고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그런 것들이요. 그리고 사회운동의 문화는 이제 뭐, 저도 어엿한 활동가니까요. (웃음)

2023년 11월 국제컨퍼런스에서 한국 대체복무제도의 문제점을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발표하는 안악희. 발표 장소가 국회여서 평소와는 다르게 차분한 착장으로 발표를 했지만 그의 몸 속에는 (구 펑크, 현 레게) 뮤지션의 피가 솟구쳐 오르고 있다.
악희의 본업은 베이시스트죠. 소속된 그룹 ‘리셋터즈’는 보스레게 음악을 한다고 들었어요.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서 학교에서 밴드도 만들었어요. 본격적으로 한 건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고요. 원래는 기타를 치려고 했는데, 어느 밴드에서 베이스 칠 사람을 구한다는 거예요. 베이스 쳐본 적이 없는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마침 제가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하고 혹해서 일단 “내가 칠 줄 안다”고 하고서는 친구 베이스를 빌려서 찾아갔어요. (웃음) 사실 베이스는 이렇게 시작한 사람이 많아요.
90년대에는 한국에 쏟아진 펑크 음악을 듣고 “이걸 해보자”고 했어요. 펑크의 미니멀한 구성이 좋았고, 또 펑크가 애초에 사회에 불만이 없을 수 없는 장르라서 저랑 잘 맞기도 했어요. 지금은 레게를 해요. 그게 편해요. 제 관점의 변화도 있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우르르 충격을 주는 식으로 단칼에 세상을 바꾸려 했는데, 이제 꾸준하고 잔잔한 방식을 찾거든요. 음악도 자연스럽게 변한 게 아닐까 해요.
‘활동가 안악희’와 ‘뮤지션 안악희’는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나요?
활동과 음악은 잘 안 섞으려고 해요. 몇 번 시도해보니까 저는 그 둘을 결합하는 데 재능이 없더라고요. 예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음악이 민중가요였어요. 지금은 그 장르도 나름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아직도 저와는 많이 다른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액티비즘과 예술의 혼합이 어렵다는 것도 새삼 느끼고요. 제가 그걸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활동가 안악희’와 ‘뮤지션 안악희’는 상호참조의 관계예요. 각자의 영역이 나뉘어 있고 필요한 소식이 있으면 서로 공유하죠.
요즘 악희의 관심사는 뭐예요?
전혀 다른 입장에서 평화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더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평화를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한국이나 세계의 전쟁 사례를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고. 넓은 자리에서 이야기해보고 싶네요.
그리고 뭐가 있더라? 음… 요즘 인도네시아어를 배우고 있어요. 라이브 음악 씬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에게 국내 시장은 좁아요. 저희 밴드도 국내보다 해외 팬이 훨씬 많고요. 레게는 장르 특성상 소비층이 제일 많은 지역은 남유럽과 남미이고 다음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예요. 남미까지는 멀어서 못 가고 인도네시아는 언젠가 가야 할 건데, “제 악기 소리 들려요?” 정도는 그 나라 말로 얘기하고 싶어요. 다행히 인도네시아어가 알파벳을 문자로 쓰기 때문에 배우기는 쉬운 편이에요.
와, 근사하네요! 마지막으로, 전없세 회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요?
평화운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요.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해야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한 가지 더 하고 싶은 말은, 서로 사랑하기에도 바쁜데 미움 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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