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대체복무 중인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표류기〉는 현재 대체복무 중인 병역거부자들의 생생한 경험을 담은 연재 기획입니다. 11월 초까지 매주 2편씩 전쟁없는세상 블로그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인터뷰, 제도, 생활, 업무, 신념, 관계를 키워드로 하는 일곱 편의 글을 통해 대체복무의 현실을 들여다봅니다.
교육센터 식당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에 선 대체복무요원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느 회중에서 오셨어요?” 나는 대체복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호와의증인(이하 증인)이 사용하는 용어를 몇 가지 익혔는데, 그중에는 회중도 있었다. 회중은 증인 모임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성당이나 교회와 비슷한 의미다. 다시 말해서 이 질문은 “어느 본당 소속이세요?” “어느 교회 다니세요?”와 같은 물음이었다. 내가 증인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증인이 아닌 대체복무요원이 교육센터에 올 때마다 소문이 금세 도는 만큼 ‘그 사람이 이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내게 다시 물었다. “여기 생활은 어떠세요?” 그는 나와 똑같이 대체복무를 시작한 지 채 1주일도 되지 않은 신규교육생이었다.
병역거부를 고민하고 심사를 거쳐 실제로 대체복무를 하는 긴 과정 가운데 내가 주의 깊게 살피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증인과 함께 대체복무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증인이 99%를 차지하는 공간에서 하루 24시간 3년 1,095일을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증인이 아닌 병역거부자 중에서 대체역을 신청한 사람이 30여 명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에 대해서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증인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소수 종교인이라는 추상적 이미지가 전부였다. 병역거부로 징역형을 살았던 평화활동가들로부터 증인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평화수감자로서 했던 경험이었기에 내가 마주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대체복무 현장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실제로 체감하는 언어로 다가오지 않았다. 물론 대체복무를 시작하자마자 그게 무슨 말인지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대체복무요원이 전국에 약 1,200명이 있는 현재, 증인이 아닌 이들은 7명에 불과하다. 증인은 서로에게 어느 회중 출신인지,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대체복무를 준비했는지, 대체복무를 하는 동안 어떤 종교적 목표를 세웠는지 물어보며 관계를 형성하는 반면, 나와는 다소 어색한 분위기에서 가벼운 대화만 나눴다. 증인들이 종교 집회에 참석하느라 생활관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을 때, 나는 내가 증인 수련회에 잘못 온 것은 아닌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센터에는 “대체복무는 수련회가 아니”라는 안내 문구가 적혀있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대체복무가 증인 사회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드러냈다. 지금도 생활관 곳곳에는 증인이 보는 신세계역 성서 구절이 붙어있고, 증인이 출판물이라고 부르는 종교 서적이 비치되어 있다. 나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하자는 이야기를 굳이 성서 구절을 인용하면서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기껏 성서 구절을 적어놨음에도 깨끗하게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또 무엇인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몇몇 교정시설에서는 나와 같은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을 ‘개인 신념 대원’이라고 부른다. 대체복무요원은 심사 단계에서부터 지원 동기를 기준으로 종교적 신념과 개인 신념으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러한 분류는 종교와 비종교를 가르는 것이 아니라 증인과 비증인을 구별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이를테면 개신교, 성공회, 천주교 등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단이나 불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의 신자로서 병역거부를 하더라도 이들은 개인 신념에 따른 대체복무요원에 해당한다. 심지어 대법원에서 종교적 병역거부라고 인정해도 개인 신념으로 분류된다. 즉 개인 신념은 종교적 신념으로 표기되는 증인의 믿음과 똑같은 무게와 의미를 지닌 범주가 아니라 증인을 기준으로, 증인이 아닌 이들을 한데 모은 것에 가깝다. 결국 그리스도교 신앙, 반군사주의, 비거니즘, 사회주의, 아나키즘, 페미니즘, 평화주의 등 다양한 양심의 모양은 증인의 여집합으로 처리된다.
* 최근 종교적 신념과 개인 신념을 통합한 범주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몇몇 사례에서처럼 종교적 양심과 정치적 신념을 아우르는 범주인지, 아니면 개인 신념을 주장하는 증인을 가리키는 표현인지는 모호하다.
“여러분은 이방인들처럼 살지 마십시오”
비증인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가 ‘개인 신념 대원’이라면 종교적 용어로는 ‘이방인’이 있다. 이 표현은 증인 사회에서 자신의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 나는 증인이 만들어낸 자그마한 도덕적 우주에서 이방인으로 살고 있다. 증인이 압도적 다수인 대체복무 현장에서 이방인이라는 말은 누가 주인의 위치에 놓이고 누가 손님의 위치에 놓이는지를 시사한다.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은 한편으로는 증인만큼, 어쩌면 증인보다 더 고된 여정을 거쳐서 심사를 통과했다는 점에서 대단하다고 여겨질 때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품으로 존재하는 증인 대체복무요원의 모조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후기식민주의 논의가 알려주듯이 비슷하지만 똑같지 않고 구별되지만 다르지 않은 모호한 존재는 긴장과 불안을 일으키고는 한다. 나는 증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 때로는 증인과 협력하고 협상하면서, 때로는 내려놓고 포기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나 대체복무 현장이 모든 증인에게 편안함을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증인은 약 10만 6천 명 정도 되는데, 이들은 모두 개별 회중에 속해 있다. 내가 어떤 회중에 소속되어 있다고 밝히는 일은 내가 어느 지역에서 생활하고, 어떤 역할을 맡고 있으며, 누구와 아는 사이인지를 밝히는 일과 자연스레 포개진다. 증인 사회가 “한두 다리를 건너면 다 아는 사이”인 만큼 대체복무 현장에서 어떻게 생활하는지는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간다. 더군다나 대체복무를 하는 증인들은 각자가 복무하는 교정시설의 소식을 공유하기도 한다. 정부에서 대체복무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충분히 제공하지 않는 상황을 자체 네트워크를 통해 대응하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네트워크는 누가 사고를 일으켰는지, 누가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지, 누가 이른바 증인답지 못한지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통로로도 기능한다. 그러다 보니 “밖에 있을 때보다 더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동료 평가와 평판 조회가 이루어지는 네트워크가 있다는 점은 증인 개인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적절히 관리함으로써 공동체에서 인정받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자신의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을 통해 적절한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는 문화적 규율을 부담스러워하고 불편해하는 이들도 있지만, 내가 만난 증인은 대체로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일반 사회와 거리를 두고 종교 생활에 집중하며, 선과 악의 이분법에 따라 상황을 판단하고, 다른 무엇보다 조직에 헌신하는 일은 증인 공동체를 대표하는 특징이다. 하지만 이는 근대 시기 영미권에서 출현한 보수 개신교 계열의 여러 신종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속성이기도 하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신의 존재 없이 세계를 설명하는 일이 가능해지고, 교리의 모순을 파고들면서 교회 없는 세계를 주장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변화는 ‘세속화된 현재를 벗어나 순수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회복주의 운동을 추동했다.
이처럼 대체복무 현장에서 비증인이 이방인인 이유는 단지 수가 적기 때문이 아니라 증인이 믿는 진리 밖에서 산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증인 사회에서 ‘진리하다’라는 말이 증인으로 종교 생활을 한다는 뜻으로 통용되고, ‘거짓 종교’라는 말이 증인 이외의 모든 종교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는 점은 이들이 자신을 올바른 믿음을 지닌 특별한 존재로 인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모든 종교 공동체가 배타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 체제가 사탄의 (일시적인) 지배 아래 놓여 있기에 세상은 점점 악해지고 결국 멸망과 종말로 치닫는다고 믿는 증인은 자신이 원칙을 따르는 삶을 살다가 구원을 받을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는 한다. 예상할 수 있듯이 원칙주의적인 태도와 배타적인 신앙은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밀어내는 일로 쉽게 이어진다.

사진 설명 : 〈게티즈버그의 종군 사제〉(The Chaplain at Gettysburg painted by William A. Smith) 가로가 긴 직사각형 캔버스에 미국 남북 전쟁 가운데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의 참혹한 상황이 펼쳐져 있다. 세로를 기준으로 아래로부터 3분의 2까지는 교전 가운데 사망한 수없이 많은 군인의 주검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에는 북군과 남군의 종군 사제가 나란히 서서 사망한 이들을 위한 성사를 집전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미국 종군 사제의 역사를 다룬 <The Chaplain Kit>에 따르면 남북 전쟁 당시 활동한 종군 사제는 3,300명이 넘는다. 여호와의증인은 다른 종교, 특히 제도 그리스도교가 전쟁을 지원하고 살상 행위를 지지한다는 이유에서 거짓 종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평화주의는 1세기 초대교회에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오랜 교회 전통이며, 3세기 병역거부자로 순교한 막스밀리아누스와 4세기 군인을 그만둔 마르티누스는 성인으로 공경받는다.
세계에 대한 정다운 무관심
한번은 한국 증인의 역사를 다룬 영상을 시청한 적이 있다. 국가 폭력과 종교 박해의 역사가 할아버지에서 아버지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지만, 정성 어린 기도와 끝없는 인내로 마침내 아들 세대에서 병역거부가 법적으로 인정됐다는 줄거리였다. 억압과 시련에도 굽히지 않고 세상 정부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겠다는 믿음을 지킨 이들이 결국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이야기가 증인들에게 종교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러나 남성 서사를 기초로 하는 이 전형적인 종교 드라마는 실제 역사를 왜곡한다. 어느 활동가가 지적한 것처럼 식민 지배, 전쟁, 군사정권, 더 나아가 민주화 이후에도 증인이 고통과 폭력을 겪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병역거부가 하나의 권리로 인정받는 변화를 증인이 아니라 사회운동이 실현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오로지 증인만이 전쟁에 반대하고 군사훈련을 거부하는 것처럼 재현하고, 대체복무제도가 마련된 일을 “여호와의 사랑”이 성취된 사건으로 묘사할 때, 변화를 이루기 위한 투쟁과 노동은 지워지고 만다.
‘우리’가 고통을 받았고 ‘우리’가 마침내 승리했고 ‘우리’가 주인공으로 제도에 참여한다는 믿음은 너그럽게 이야기하면 소수자의 자부심이지만 정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르시시즘에 가깝다. 대체역 심사를 통과한 나와 같은 비증인은 모두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활동에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했다. 이른바 병역기피자를 가려내야 한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엄격하게 설계된 현 제도에서는 그러한 활동 없이 심사를 통과하기 매우 어렵고, 활동을 증명해도 탈락하는 일이 발생한다.반면 증인은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정치적 활동을 교리로 금지한다. 이들에게 병역거부는 중립을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다. 이들은 대체복무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인식하지만, 개인이 민원을 제기하고 헌법소원을 청구하는 것을 제외한 어떠한 집단적인 움직임도 나서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도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없는 본인을 대신해서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이 제도 개선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하는 모순적인 태도가 있다.**
**다만 증인이 사회적 소수자로서 무시되고 존중받지 못하는 현실이 이러한 경향을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병역거부 운동이 어떤 역사를 써왔는지, 제도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증인이 아닌 종교적 양심과 정치적 신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피는 시간은 교육센터에서 진행하는 기초교육에서도 대체복무를 수행하는 기관에서도 전무한 반면, 증인을 마치 순교자로 이해하는 분위기는 증인 사회 안에서도 대체복무 현장에서도 발견된다. 이와 관련해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교육센터에서 강의를 맡은 어떤 교도관이 ‘그간 수감생활을 해야 했던 증인이 대체복무요원이 된 것이 감격스럽다’면서 이러한 변화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찬송가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 자리에는 비증인 대체복무요원도 있었지만, 교도관은 모든 교육생이 당연히 증인일 것으로 착각했고 증인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찬양을 불렀다. 이와 같이 사회운동의 역사가 완벽하게 휘발된 대체복무 현장에서는 정치와 종교, 제도와 교리의 긴밀한 협력이 나타나고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내가 만난 증인이 모든 증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증인이라고 해서 같은 경험과 배경을 지닌 것도 아니고, 모든 사안에 의견이 일치하는 것도 아니다. 증인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저마다 다르며, 내가 증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변화한다. 복무 기간이 늘어날수록 동료의식이 강해지기도 하고, 비합리적인 지침과 억압적인 규칙에 같이 분노하고 항의하며 끈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생활실 한 곳에 적게는 6명, 많게는 10명이 지내는 밀도 높은 환경에서, 전자기기 사용이 제한되고 외출이 통제되는 단절의 공간에서 증인과 매우 넓은 접촉면을 가지는 경험은 증인에 대해서 무언가를 분명히 알려준다. 나는 증인이 공식적인 매체에서 보여주는 정제되고 온화한 이미지가 담지 못하는 장면을, 증인 사회를 떠난 이들이 전하는 체험담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증인의 증인’으로 목격하고 있다.
나는 증인이 일반 사회에서 종교적 소수자로서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면서도 대체복무제도의 명백한 다수로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영토를 주장하는 모습에 서늘한 감정을 느낀다. 0.5%의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으로 ‘우리’의 고민은 계속된다. 생활실에서 성서 독서, 설교 영상 시청, 집회 참여와 같은 종교 활동을 단체로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전체 방송을 사용해서 종교 활동을 진행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청소 시간에 찬송가가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기념식, 지역대회, 순회대회처럼 특별한 종교 행사가 있을 때 업무가 조정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장로(회중에서 의사결정권을 지닌 이들로 남성만 할 수 있다)로 임명된 대체복무요원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야 할까? 모든 대체복무요원에게 적용되는 일반 외출의 제한(전체 인원의 50%)을 완화하는 것보다 증인의 집회 참석을 위해 마련된 종교 외출(인원 제한 없음)에 전도 활동을 포함하는 것을 우선 과제로 부각하는 것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회중에서 보낸 편지가 단체대화방에 올라오고 공식 행사에서 동료 대체복무요원을 형제로 부르는 일은 언제까지 가벼운 실수라고 넘겨야 할까?
다른 종교인이 저지른 잘못은 해당 종교 자체의 문제고 증인이 저지른 잘못은 개인의 문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뭐라고 답해야 할까? 공무원 의무 교육에 해당하는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증인의 교리에 어긋난다면서 기초교육에서 없애야 한다는 민원을 꾸준히 넣는 이들과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 청소년기에 심한 가정 폭력으로 힘들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때 맞기를 잘했다면서 자신의 아이도 체벌하겠다고 말할 때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이 지구에 실제로 존재했고 진화론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는 이들에게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침공에 대해 ‘이번에도 종말에 관한 예언이 성취됐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증인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낙원(이상적인 세계)이 찾아오면 모두가 완전해져서 장애인이 없어질 것이라는 말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못생겼지만 믿음이 좋은 자매’와 ‘믿음이 좋지만 가난한 자매’와 ‘가난하지만 예쁜 자매’를 두고 웃고 떠드는 상황에 어떻게 개입해야 할까? 결정적으로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이 대개 한 명씩 배치된 상황에서 이 모든 문제를 누구와 상의해야 할까?
가라앉은 자들
증인과의 관계를 살피는 이 글에서 꼭 다뤄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증인 공동체를 스스로 벗어나거나 공동체에서 제명된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대체복무 현장에는 증인과 비증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증인 공동체에 소속된 적이 있지만 여러 이유에서 더 이상 활동하지 않거나 공동체를 탈퇴하고 제명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대체역 심사를 통과하고 배치가 진행되기 이전, 혹은 배치가 완료된 이후에 무활동, 이탈, 제명 상태에 놓인다. 나는 종교적 믿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종교 활동을 하거나 종교 공동체에 속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신념의 모양과 소속의 장소는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증인은 공동체를 떠난 이들과 어떠한 교류도 금지한다. 무활동 상태, 다시 말해서 믿음은 있지만 활동은 중단한 ‘가나안 성도’ ‘쉬는 교우’ ‘냉담자’와 같은 경우는 그나마 나은지도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이탈하거나 제명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증인 공동체에 복귀하기 전까지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한다. 여기서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친구와 연인은 물론이고 가족과도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원칙은 개인 공간이 전혀 없고 합숙 복무가 이루어지는 생활관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증인이 ‘기피shunning’라고 부르는 교류 금지 교리가 종교의 외피를 쓴 따돌림과 괴롭힘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고, 종교는 종교고 복무는 복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복무는 수련회가 아니고 생활관은 회중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평소에도 힘이 없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사이더라도 이탈이나 제명 상태에 있는 이들은 동료로 인정받지 못한다. 실제로 대체복무를 중간에 포기한 사례가 발생했고 이들은 군 복무와 수감생활로 이분화된 결과 앞에 다시 서게 됐다. “그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었는데 드디어 나갔다” “어차피 그만둘 텐데 왜 왔는지 모르겠다”며 조소한 이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었다는 것은 적어야겠다.
배타적인 공동체, 특히 배타적인 종교 공동체는 처음부터 그들이었던 이들보다 우리였으나 그들이 된 이들을 더 가혹하게 대하고는 한다. 공동체의 배타성이 합숙 복무라는 강제된 조건과 만나면서 이탈이나 제명된 이들은 매우 치명적이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다. 이에 대해 교정본부는 이탈이나 제명 후 복귀가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소집을 연기하거나 이들을 특별 관리 대상으로 지정하는 방안 정도를 구상할 뿐,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참고로 증인은 이탈이나 제명된 이들이 공동체에 복귀를 원하더라도 그가 충분히 반성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그가 집회에 다시 참석한 이후에도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아무리 종교가 중요해도 인권 원칙에 우선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마저 들리지 않는 이곳에서 이들은 하릴없이 가라앉고 있다.
Atomruig indíu
‘대체역은 증인이 하는 것’이라는 말은 0.5%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지우고, 아예 말할 수 없는 위치에서 불가능한 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을 지울 때야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제도 초반에 나타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믿기에는 제도가 시행된 지 이미 3년이 지났고, 비증인이 다수가 되면 자연히 없어질 것으로 기대하기에는 대체역을 지원한 이들 가운데 비증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1%에 머물고 있다. 그렇다면 역시 대체복무제도는 증인만을 위한 것일까? 대체복무제도를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증인의 믿음은 그저 사실을 반영한 것이었을까? 뒤늦게나마 눈치를 챙기고 대체역마저 거부해야 할까? 이 지점에서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바로 2023년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대체복무의 핵심은 정부가 내건 슬로건처럼 신념과 병역의 조화가 아니라 증인과 적절한 관계를 맺는 기술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기술이 없다면 당신을 위한 자리는 이곳에 없다는 것이다. 다만 비증인 대체복무요원이 새로운 길을 열심히 만들고 있다는 사족은 덧붙여본다.
이것이 정말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통해 기대하던 역사적 변화일까? 한쪽에서는 ‘힘에 의한 평화’를 외치고 다른 한쪽에서는 ‘하느님의 왕국이 실현하는 세계 평화’를 노래하는 시기에 병역거부자로서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의 표류는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증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는 일이 단지 동료와 사이좋게 지낸다는 의미를 넘어 생존의 기반이 되는 곳에서 수백 일을 보내고 수백 일이 남은 지금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질 때면 누구에게나 시간이 정직하게 흐른다는 것을 다시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그러나 단순한 기쁨을 누리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곳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익힌 삶의 지혜인지, 절망과 환멸이 만든 패배주의인지는 여러분의 해석에 맡긴다.
<연재 끝. 그동안 ‘대체복무 표류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